몸, 인간을 다시 묻다 19
한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죽었다는 사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살아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몸이다. 얼굴의 모양도 그대로이고 손가락도 그대로이며 피부와 손톱도 남아 있다. 조금 전까지 그 몸이 누군가의 곁에 있었고 말을 하고 움직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앞의 몸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특히 손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손가락은 다섯 개이고 손등의 주름도 그대로다. 살아 있을 때라면 그 손으로 문을 열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아프면 손을 움츠렸을 것이고 추우면 주머니에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뒤의 손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손의 모양은 아니다. 몸의 많은 부분은 죽음 뒤에도 한동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그 몸을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그 차이를 찾기 어렵다.
오래전에도 사람들은 이 문제를 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 있는 몸을 단순한 물질의 덩어리와 다르게 보면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영혼’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여기서 영혼은 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존재라기보다 살아 있는 몸을 살아 있게 하는 원리에 가까웠다.
오늘날에는 같은 문제를 몸의 작동을 통해 살펴본다. 우리가 걷거나 말을 할 때 몸에서는 여러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심장은 피를 보내고 폐는 산소를 받아들이며, 신경계는 감각을 받아 움직임을 조절한다. 세포들은 필요한 물질을 받아들이고 에너지를 사용한다. 우리는 그 일을 하나하나 의식하지 않지만 몸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잠든 사람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깊이 잠들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그래도 몸은 호흡하고 피를 순환시키며 체온을 조절한다. 마취를 받은 사람도 깨어난 뒤 그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몸의 생명 활동이 멈춘 것은 아니다. 의식이 약해졌다는 것과 생명이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팔과 다리를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생각한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간단한 동작 하나에도 여러 번의 조정과 기다림이 필요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생명이 덜한 것은 아니다. 몸의 움직임은 사람마다 다르고, 움직임의 크기만으로 생명의 정도를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몸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몸 전체의 주인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는 심장에게 뛰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잠들면서 호흡을 계속하라고 부탁하지도 않는다. 상처가 생겼을 때 어떤 세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몸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기 일을 한다.
이런 경험 앞에서는 “나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조금 이상해진다. 몸을 가진 사람과 몸이라는 물건이 따로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몸에서 벗어나 나 자신만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몸이 아프면 생각이 달라지고, 피곤하면 판단이 달라진다. 두려우면 심장이 뛰고, 부끄러우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정신과 물질로서의 몸을 구별했고, 스피노자는 몸과 정신을 하나의 존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의 철학을 여기서 자세히 따라갈 필요는 없다. 다만 몸과 정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질문이라는 사실은 남는다.
죽음을 의학적으로 판단할 때도 몸 전체의 상태를 살핀다. 순환과 호흡의 정지가 중요한 기준이 되고, 신경학적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하는 경우에는 뇌 전체와 뇌간의 기능이 영구적으로 소실되었는지를 엄격하게 평가한다. 단순히 의식이 없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잠든 몸이나 움직임이 제한된 몸과 죽은 몸을 구별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면 비슷해 보여도 몸 안에서 이어지는 생명 과정은 다르다. 살아 있는 몸에서는 서로 연결된 과정이 계속되고 있지만, 죽음에서는 그 몸을 하나의 생명으로 유지하던 과정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몸과 의식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이 몸 밖에서 자기 몸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끼는 유체이탈 경험이나,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서 몸을 떠난 것 같은 경험을 했다는 임사체험이 있다. 신경과학에서는 이런 경험을 몸의 위치와 감각을 뇌가 통합하는 과정과 관련해 연구한다. 하지만 이런 경험만으로 의식이 실제로 몸을 떠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정도의 질문을 남겨두고 다시 몸으로 돌아온다. 내가 내 몸 안에 있다는 느낌은 평소에는 너무 당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손을 움직이면 내가 손을 움직였다고 느끼고, 걸으면 내가 이동했다고 느낀다. 몸은 가장 가까이 있지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플 때, 다칠 때, 움직임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몸이 눈앞에 나타난다.
죽은 사람의 손을 바라보면 손은 여전히 손이다. 피부도 있고 손가락도 있다. 하지만 그 손은 더 이상 몸 전체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아픔에 반응할 수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을 잡으면 서로의 힘이 오간다. 내가 조금 힘을 주면 상대가 반응하고, 상대의 손에 힘이 들어오면 나도 그것을 느낀다. 손 하나의 움직임에도 두 몸 사이의 관계가 들어 있다. 살아 있는 몸은 혼자 닫혀 있는 물체가 아니라 다른 몸과 세계를 만나면서 살아간다.
죽은 손에서는 그 왕복이 멈춘다. 처음 보았던 손을 다시 바라본다. 손가락도 그대로고 손톱도 그대로다. 겉모습만 보면 살아 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데 이제는 처음처럼 그 손을 바라볼 수 없다.
조금 전에는 그 손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찾았다. 지금은 그 손이 살아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한다.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무엇인가를 만들었을 것이며, 아픔에 반응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손과 만나고 세상과 부딪히면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죽음은 손가락을 없애지 않았다. 손의 모양도 당장 바꾸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이 몸 전체와 함께 살아가던 움직임이 멈췄다. 한동안 그 손을 바라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몸의 한 부분이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인지도 모른다. 손 하나가 살아 있기 위해서도 몸 전체의 수많은 과정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몸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과 세계를 만나며 살아간다.
눈앞의 손은 여전히 손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살아 있을 때의 그 손을 생각하면, 손 하나만 보고는 그 사람의 살아 있음을 다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