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몸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몸, 인간을 다시 묻다 20

by호시우행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릴 때면 내 몸이 조금 낯설어진다. 평소에는 몸 안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검사실에 들어가면 내 몸은 갑자기 살펴보아야 할 대상이 된다. 혈압을 재고 피를 뽑고, 필요하면 엑스레이나 CT, MRI를 찍는다. 내가 가만히 누워 있는 동안 기계는 내가 볼 수 없었던 몸속의 모습을 화면에 나타낸다.


어릴 때 배운 몸은 바카라 속에 있었다. 심장은 가슴 안에 있고 폐는 양쪽에 있으며 위와 장은 배 안에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익혔다. 그 그림은 내 몸을 설명해주는 지도와 같았다. 지금 병원에서 보는 몸은 그때의 그림과 다르다. 사진과 숫자와 영상으로 내 몸의 상태가 눈앞에 나타난다.


사람은 오래전부터 자기 몸을 살펴왔다. 상처가 나면 눈으로 보았고, 열이 나면 몸의 변화를 느꼈다. 의사들은 맥박을 만지고 숨소리를 들으며 피부의 색을 살폈다. 몸 밖으로 나타나는 작은 변화에서 몸 안의 상태를 짐작했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몸 안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많다. 피부 아래의 장기와 혈관을 직접 확인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해부는 몸속의 구조를 확인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고, 현미경은 눈으로 볼 수 없던 작은 세계를 열어주었다. 사람들이 몸을 알아가는 방법은 몸의 표면에서 몸의 내부로 조금씩 들어갔다.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는 실제 인체를 해부하고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를 펴냈다.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몸에 관한 오래된 설명도 다시 살펴보게 했다. 몸에 대한 지식은 누군가의 권위 있는 말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 고쳐질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몸을 바라보는 도구가 달라졌다. 1895년 뢴트겐의 X선 발견은 피부를 열지 않고도 몸속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후 CT와 MRI가 발전하면서 살아 있는 몸의 내부를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해부를 해야 알 수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영상으로 나타난다.


몸을 보는 방법이 달라질수록 몸에 관한 지식도 많아졌다. 장기의 모양뿐 아니라 조직과 세포를 살펴볼 수 있고, 혈액 속의 여러 물질을 측정할 수도 있다. 유전자의 정보까지 연구하면서 몸을 바라보는 눈은 점점 더 작은 곳으로 들어갔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숫자와 영상과 자료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몸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몸을 더 잘 알게 된 것일까. 몸을 보는 능력이 커졌다는 사실과 몸을 이해하는 일이 같은 것은 아니다. 사진은 몸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검사 결과는 몸의 한 상태를 알려준다. 하지만 사진 한 장이나 숫자 몇 개가 그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하루 전체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병이 생긴 뒤 의사를 찾아가는 사람이 나온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의사는 몸을 살피고 증상을 확인하며 병의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 몸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몸을 바라보는 질문은 다르다.


의사에게 몸은 살펴보고 판단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반 일리치에게 몸은 자신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바로 그 몸이다. 의사는 병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환자는 그 병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겪는다. 검사 결과 하나가 의사에게는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지만, 환자에게는 앞으로의 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는 의학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몸의 이상을 찾아내고 치료 방법을 결정하려면 측정하고 비교하고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느끼는 증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검사 결과가 알려주기도 한다.


다만 그것으로 몸을 모두 안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심장의 구조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슴의 답답함을 어떻게 느끼는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뇌의 구조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몸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전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몸을 구성하는 부분에 관한 지식과 그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겹치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과학은 몸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 살펴왔다. 몸 전체에서 장기로, 장기에서 조직으로, 조직에서 세포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날에는 분자와 유전자의 수준까지 내려간다. 이렇게 몸을 잘게 살펴보면서 우리는 과거에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몸을 잘게 나눈다고 해서 몸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심장과 폐와 뇌와 근육을 각각 이해해도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하루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살아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몸은 여러 부분의 합계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부분별로 경험하지 않고 하나의 삶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몸을 아는 데에는 여러 종류의 앎이 필요하다. 기계가 보여주는 영상도 필요하고, 혈액검사의 숫자도 필요하다. 의사가 듣고 만지고 관찰하는 경험도 필요하다. 동시에 그 몸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느끼는 변화도 빠질 수 없다.


문학은 이 마지막 자리를 오래 바라본다. 의학이 병의 원인을 찾는 동안 문학은 병을 가진 사람이 그 병과 함께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간다. 통증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과 통증 때문에 달라진 삶을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한쪽이 다른 쪽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몸에 관한 앎은 한 가지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병원에서 찍은 사진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사진 속의 뼈와 장기는 분명 내 몸이다. 의사는 그 모습을 보고 필요한 것을 판단할 것이다. 과학은 그 사진을 통해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사진 속에 내 몸으로 살아온 시간까지 모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일도 내 몸이다. 발바닥이 바닥을 누르고 무릎이 펴지며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도 내 몸이다. 피곤해서 잠시 쉬는 것도 내 몸이고, 통증 때문에 움직이는 방법을 바꾸는 것도 내 몸이다. 이런 일들은 검사 화면의 한 장면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면 밖의 몸만 진짜 몸이라는 뜻도 아니다. 화면 속의 몸과 내가 살아가는 몸은 서로 다른 몸이 아니다. 하나는 관찰되고 측정된 몸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몸으로 살아가는 몸이다. 우리는 같은 몸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면 발이 바닥을 누르고 무릎이 펴진다. 몸은 내가 그 과정을 하나씩 생각하지 않아도 움직인다. 검사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일이지만, 이것 역시 몸을 아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다. 발이 바닥을 누르고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 움직임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몸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과 몸을 완전히 안다는 것이 같은 말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우리는 해부하면서 몸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현미경으로 더 작은 세계를 보게 되었으며, 영상 기술로 살아 있는 몸속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세포와 분자와 유전자까지 살핀다. 인간이 몸에 대해 아는 것은 분명 이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럼에도 몸은 한 장의 사진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검사로 끝나지도 않는다. 몸을 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늘리는 일인 동시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질문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다시 한 걸음 내딛는다. 몸은 여전히 내 앞에서 설명해야 할 대상이면서, 내가 그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이기도 하다. 아마 몸을 안다는 일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몸과 살아가면서 만나는 몸을 함께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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