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인간을 다시 묻다 21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보인다. 좁은 공간에 몇 사람이 서 있고 빈자리가 있으면 그쪽으로 몸을 옮긴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미 서 있는 사람과의 거리를 살핀다. 누군가 가운데에 서 있으면 그 사람을 피해 한쪽에 선다. 뒤에서 사람이 들어오면 조금 앞으로 움직이고, 먼저 내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지나갈 자리를 남겨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서로 이름을 묻지 않아도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린다. 앞사람이 멈추면 뒤에 있던 사람도 걸음을 늦추고, 옆 사람이 팔을 움직이면 가까이 있던 사람은 몸을 조금 돌린다. 문이 열리면 먼저 내리는 사람을 따라 뒤에 있던 사람도 방향을 바꾼다. 혼자 있을 때라면 의식하지 않을 움직임이 다른 몸과 함께 있을 때에는 달라진다.
길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사람이 마주 오면 한쪽으로 비키고, 앞사람이 갑자기 멈추면 걸음을 늦춘다. 좁은 문에서는 먼저 나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계단에서는 앞사람과의 간격을 보며 속도를 조절한다. 내 몸이 혼자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변의 다른 몸을 살피면서 움직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은 말을 건네는 순간보다 조금 앞에서 시작된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에는 콰지모도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나온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482년 파리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과 몸을 보고 그를 놀림의 대상으로 삼고, 그의 외형을 가리키는 말로 그를 부른다. 한 사람의 삶을 알기 전에 눈앞에 드러난 몸의 특징부터 붙잡는 것이다.
콰지모도의 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작품 안에서 계속 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는다. 에스메랄다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녀를 들어 올려 노트르담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그녀가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지키려 한다. 군중 앞에서는 웃음거리가 되던 몸이 누군가를 들어 올리고 지키는 힘을 가진 몸으로 나타난다.
그때 바뀐 것은 콰지모도의 몸이 아니다. 같은 몸에서 드러나는 행동과 그 행동을 받아들이는 관계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의 몸에서 눈에 띄는 모양을 보았고, 다른 장면에서는 그 몸이 하는 일을 보게 된다. 한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눈에 들어온 특징이 그 사람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지는 여기에서 다시 묻게 된다
.
이 작품을 오늘날의 장애에 관한 이야기와 그대로 겹쳐 읽을 수는 없다. 위고가 콰지모도의 몸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당시의 미학과 기형에 대한 상상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단순히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교훈으로 읽으면 작품의 복잡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오히려 눈앞의 몸에서 몇 가지 특징을 골라내고 그것을 사람 전체에 대한 판단으로 넓혀가는 과정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도 다른 몸을 볼 때 비슷한 일을 한다. 걸음이 느리면 몸이 약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이 느리면 생각도 느릴 것이라고 짐작한다. 표정이 굳어 있으면 불편하거나 화가 난 사람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못할지를 먼저 생각할 때도 있다. 몸에서 읽어낸 몇 가지 특징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설명하는 문장이 되어버린다.
사람의 몸을 보고 다른 사람에 관한 정보를 얻는 능력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얼굴과 몸짓, 시선과 움직임을 지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과 슬롯적 정보를 해석한다. 걷는 방식이나 손의 움직임처럼 생물학적 움직임에서 행동의 단서를 읽는 과정도 오래 연구되어 왔다. 함께 움직일 때에는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자신의 움직임을 조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움직임을 읽는 것과 사람을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손을 내밀었다는 것은 볼 수 있지만 왜 손을 내밀었는지는 바로 알 수 없다. 걸음이 느리다는 것도 볼 수 있지만 그 이유가 피곤해서인지 통증 때문인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서인지는 움직임 하나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몸의 일부이고, 그 몸으로 살아가는 경험은 그보다 넓다.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는 낯선 몸으로 보일 때가 있다. 말을 한 번에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면 상대는 내가 한 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지만 어떤 사람은 문장을 대신 완성한다. 그 사람에게는 친절일 수 있지만 내게는 내가 말을 이어갈 속도를 상대가 정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때 몸의 속도와 사람의 뜻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말이 느리다고 생각이 느린 것은 아니고, 걷는 속도가 느리다고 가고 싶은 곳을 늦게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몸이 보여주는 속도와 그 몸을 살아가는 사람의 뜻 사이에는 다른 층위가 있다. 그 사이를 건너뛰면 몸에 대한 관찰이 사람에 대한 판단으로 바뀐다.
몸의 차이는 같은 공간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사람에게 계단은 몇 걸음이면 지나가는 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난간을 잡고 한 칸씩 움직여야 하는 곳이 된다. 어떤 사람은 전화 한 통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얼굴을 마주 보고 천천히 말하는 편이 낫다. 같은 문을 지나고 같은 길을 걸어도 몸에 따라 필요한 시간과 힘은 달라진다.
도움을 주는 순간에는 이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누군가 일어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곧바로 팔을 잡아 끌어올리는 것이 반드시 좋은 도움은 아니다. 그 사람은 어느 쪽으로 몸을 움직일지 알고 있을 수 있고, 몸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손을 내밀고 기다리는 것과 상대의 몸을 대신 움직이는 것은 겉으로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경험을 만들 수 있다.
도움에는 힘의 차이도 들어간다.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부축하면 넘어지지 않도록 몸을 받쳐줄 수 있지만, 그 힘으로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를 안아 옮길 때도 그렇고 몸이 약해진 노인을 부축할 때도 그렇다. 병원에서 환자의 몸을 움직이는 순간에는 의료진의 지식과 힘이 환자의 몸에 직접 작용한다.
그래서 몸을 돕는 일에서는 좋은 의도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상대의 몸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살피고, 내가 하려는 도움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움직일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필요하다. 상대를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과 상대를 대신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몸 가까이에서 이루어지는 도움일수록 이 차이는 작지 않다.
마르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구분한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의 관계도 이 장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면 내가 보고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가 먼저 들어온다. 하지만 실제 사람을 마주하면 상대는 내가 예상한 방식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손을 잡을 수도 있고 거둘 수도 있으며, 말을 걸었을 때 바로 대답할 수도 있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할 수도 있다.
몸의 만남에서는 그 사실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상대가 뒤로 물러날 수 있고, 내가 길을 비키면 상대가 지나갈 수 있다. 내가 속도를 늦추면 상대가 따라올 수도 있고, 상대가 멈추면 나도 기다릴 수 있다. 한 사람의 움직임이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바꾸고, 바뀐 움직임이 다시 상대의 다음 행동에 영향을 준다.
이런 관계는 거창한 만남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사람이 많은 버스에서 누군가 내리는 동안 옆으로 몸을 돌려 길을 만드는 일도 그렇고, 좁은 복도에서 서로 먼저 지나가라고 잠시 멈추는 일도 그렇다. 누군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일도 비슷하다. 상대가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기 위해 내 몸의 속도와 위치를 조금 바꾸는 것이다.
그 조절이 언제나 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의 속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도움을 강요한다. 배려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의 선택을 빼앗는 경우도 있다. 몸의 관계에서는 내가 무엇을 해주고 싶은가보다 상대의 몸이 실제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는 일이 먼저일 때가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린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온다. 앞사람이 문 앞에서 잠시 멈추자 뒤에 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기다린다. 한 사람이 먼저 나가고 나서야 다음 사람이 움직인다. 누구도 지시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몸이 움직일 자리를 남겨둔다.
복도로 나오면 조금 전까지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진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된다.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한 사람의 몸은 다른 사람의 몸에 반응했고, 그 반응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바꾸었다. 서로의 삶을 알지 못해도 잠시 같은 공간을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복도를 걷다가 앞에서 걷던 사람이 멈추는 것을 본다. 나도 걸음을 늦춘다. 그 사람이 옆으로 비켜서자 나는 지나갈 자리를 찾아 몸을 움직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몸은 잠시 서로의 속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다른 몸을 만난다는 것은 상대의 몸을 다 알아내는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보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몸은 더 넓고,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도 언제나 남아 있다. 그러니 같은 공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 뒤에 가능한 일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부분을 남겨둔 채 서로의 몸이 움직일 자리를 마련하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