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인간을 다시 묻다 07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나는 벌써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는지 그때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서둘렀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에는 약속 시간까지 기다리는 일조차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을 조금 더 오래 가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리에 앉아 있다가 괜히 일어나고, 다시 앉아 시계를 보고, 길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하나 나타날 때마다 혹시 그 사람인가 싶어 바라보다가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 옷매무새를 한 번 고쳐보고 머리를 만져보기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몸은 이미 평소와 달라져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런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누구나 비슷한가 보다 했다. 만나기 전부터 마음이 들뜨고, 약속 시간은 평소보다 더디게 오는 것 같고,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두었다가 막상 얼굴을 보면 준비했던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가 웃었던 모습이나 내가 건넨 말 한마디를 집에 돌아와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것을 그냥 설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몸을 생각하면서 그때를 돌아보면 설렘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내 몸이 먼저 그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는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시계의 숫자가 자꾸 눈에 들어오고,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살피게 된다. 옷이 제대로 입혀졌는지 확인하고, 머리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생각한다. 상대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씩 떠올리면서도 정작 그 사람이 나타나면 준비했던 말은 사라지고 만다. 몸은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을 이미 만나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기다리는 동안의 자세도 달라지고, 눈길도 달라지고, 시간도 달라진다. 좋아한다는 마음이 몸과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에게는 그 설렘과 함께 다른 마음도 있었다. 나는 내 몸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었다.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았고 말도 다른 사람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그 사람을 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을 불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지금처럼 그것을 차분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만나기 전부터 마음 한쪽이 조금 조심스러웠다. 그런데도 나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그곳에 나가 있었다. 걱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내 몸의 어려움을 많이 의식했다. 남들보다 움직임이 느리고, 말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고, 사람들 앞에서 내 몸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장애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불편함이나 두려움부터 떠올리기 쉬웠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던 그날의 몸을 떠올리면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몸은 불편하기만 한 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좋아했고, 만나고 싶어 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약속 장소에 먼저 가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한계라고 생각했던 몸이 그날만큼은 누군가를 향해 가는 몸이었다.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까지 다르게 만들지는 않았다. 사람을 좋아하면 만나고 싶고, 만나고 싶으면 기다리게 되고,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들뜨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마음을 드러내는 몸의 모습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내 몸은 다른 사람의 몸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까지 다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 나는 내 몸이 가진 어려움을 잠시 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몸을 의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몸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예전에는 마음이 먼저이고 몸은 그 마음을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 때문에 몸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을 다시 생각해보면 마음과 몸을 그렇게 나누기도 어렵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조금 빨라졌고, 만나기 전부터 몸을 살폈고, 약속 장소로 걸어갔고, 지나가는 사람을 자꾸 바라보았다. 마음이 그 사람을 향하는 동안 몸도 함께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마음과 몸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쁘다고 말하지만 기쁨은 말로만 남지 않는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먼저 밝아지고, 좋은 소식을 들으면 목소리가 달라진다.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몸이 굳고, 안심하면 숨이 조금 편해진다.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는 시간이 달라지고, 별 의미 없던 장소도 특별해진다. 감정은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살아난다. 그래서 몸을 바라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될 때가 있다.
물론 몸의 반응만 보고 마음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설렘인 것은 아니다. 긴장해서 그럴 수도 있고 걱정이 되어서 그럴 수도 있다. 몸은 마음을 그대로 번역해 보여주는 기계가 아니다. 같은 표정과 같은 움직임도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을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너무 빨리 판단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몸은 나를 드러내지만 나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때 약속 장소에 일찍 나와 있던 나를 지나가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저 조금 일찍 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시간은 평범한 기다림이 아니었다. 아직 그 사람은 오지 않았는데 이미 하루가 달라져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고, 기다리는 일이 싫지 않았다. 그 사람이 올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소에는 아무 의미도 없던 길과 의자와 시계가 모두 특별해졌다. 몸은 그 사람이 오기 전부터 그 만남을 살아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설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몸이 조금 먼저 살아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만나지 않았는데 만나게 될 순간을 기다리고, 아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아직 웃지 않았는데 웃게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상대를 기다린다. 몸은 현재에 있으면서 마음이 향하는 곳을 향해 조금 먼저 가 있다. 그래서 기다림이 길게 느껴지면서도 싫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 자체가 이미 그 사람과의 만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몸을 나를 제한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의 몸을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진다. 몸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곳으로 쉽게 데려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막지도 않았다. 나는 그 몸으로 집을 나섰고, 그 몸으로 약속 장소까지 갔고, 그 몸으로 그 사람을 기다렸다. 몸은 내가 감당해야 할 조건인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몸을 아픔이나 불편함만으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 몸에는 내가 견뎌온 시간도 있지만, 누군가를 좋아했던 시간도 있다. 사람들 앞에서 긴장했던 순간도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들떴던 순간도 있다. 몸은 세상을 견디는 자리인 동시에 세상을 좋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해 몸 전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일이었다.
그때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가 있던 사람은 내 몸이었다. 기다리던 것도 내 몸이었고, 설레던 것도 내 몸이었다. 나는 이제야 그때의 몸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이 몸은 단지 내가 살아가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고, 기다리고,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는 몸이었다. 몸은 내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리일 뿐 아니라, 내가 세상을 좋아하게 되는 자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