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2
진짜 내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상대방의 의견도 경청하고. 이런 토론을 해본 적이 있기는 한가. 10년 전 행정고시 면접 때 했던 그룹토론이 기억난다. 그때는 내 의견을 너무 내세우면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보여서 면접에서 떨어질까 봐 상대방의 의견을 치켜세우면서 내 의견을 살짝 보태는 식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실수만 하지 말자며 조심스러운 발언만 했던, 가식적인 느낌의 토론이었다. 행시 합격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LLM 학생들에게 필수 과목인 Legal System of the U.S.라는 과목에서 있었던 토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LLM 학생들은 두 개의 필수 과목이 있는데, 이 수업은 그중 하나이다. 즉, LLM 학생들로만 구성되고, JD 학생이 없다. 그래서 미국인 없이 외국인만 있으니 부담이 없는 수업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사실 LLM 학생들 사이에서 "진짜"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 다른 종류의 부담이 있다.
JD 수업에서는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라고 어느 정도 배려를 받는다. 수업시간에 좀 못해도 크게 부끄럽지 않다. 반면, LLM 수업에서는 LLM 동기들이 친구면서도 경쟁자다. LLM이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나와 몇몇 빼고는 다들 미국에서 좋은 온라인 게임을 구할 계획이라는데, 그러려면 좋은 학점이 필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학점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자격증 같은 스펙을 중시하는 한국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LLM 수업에서도 수업 참여도가 학점에 반영된다니까 그런 건지 아니면 다들 적극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의 질문이 나오면 대부분 경쟁적으로 손을 든다. 수업 중간중간에 질문도 참 많이 한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전혀 본 적 없던 걸 여기서 겪고 있다. 사실 나도 할 말은 많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최대한 입을 닫고 있는 거긴 하다. 언젠가 입이 뚫리길 기다리며 에너지를 모으고 있다.
다시 돌아와 수업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면, Legal System of the U.S. 과목은 우리처럼 외국에서 법을 공부하거나 일해 온 사람들에게 미국 법 체계를 개괄적으로 훑는 과목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판례가 곧 법이나 마찬가지라는 Common Law 체계가 나에게 생소했다. 그러면서도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람 이름을 붙여 "누구 케이스"라고 부르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갑자기 공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한데, 꽤나 흥미로운 판례를 잠깐 소개해주겠다.
George A. Hormel & Co. v. Maez
과실행위로 인한 손해가 어디까지 법적 바카라임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판례다. 피고 Maez는 술이 취한 채 운전을 하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았고, 전봇대가 부러지면서 일대에 정전이 발생했다. 인근 Hormel 공장에서 정전으로 기계가 멈추는 등 설비가 손상되고 공장 운영에도 차질이 생겼다. 법원은 공장이 입은 손해가 운전자의 과실로부터 합리적으로 예견 가능한 결과(reasonably foreseeable)라고 보고, 운전자인 피고에게 손해배상 바카라임을 인정했다.
1979년 판례라 아주 오래된 사건이지만, 사실 미국에는 아직도 전봇대가 흔하다. 나도 폭풍우가 심한 날에 정전을 겪은 적이 있다. 촛불을 켜놓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더라.
어쨌든, 교수님은 이 판결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물었다.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영어를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벨라루스는 자기 나라에선 규제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단순 정전으로 공장이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고, 터키는 음주 운전 행위 때문에 배상을 더 쉽고 넓게 인정해 준 것 아니냐고 했다. 영국과 독일은 정전 때문에 공장이 멈춘 것까지 운전자에게 배상하라는 건 말도 안 된다며 판례를 비판했다. 중국은 병원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면 피해를 입은 환자가 병원에 손해 배상을 청구할 것 같다고 했다.
평소에 말이 없던 나도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나는 정전 한 번에 공장이 멈출 정도라면 비상용 발전기라도 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우리는 판례라고 무조건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했다. 나도 이 사이에 껴서 토론을 즐겼다.
한창 토론이 끝나갈 때쯤, 교수님이 그랬다. 또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냐고. 신이 난 나는 또 손을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미국 변호사처럼 온갖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중이었다. "이건 전력회사 잘못일 수도 있다. 혹시 전봇대가 도로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문제였을 수도 있지 않냐." 그랬더니 교수님이 좋은 의견이라면서 칭찬을 했다. 얼마 만에 듣는 칭찬인가.
너무 기억에 남아서 아내를 보자마자 자랑했더니, "초등학교 다니는 애기"냐며 핀잔을 줬다.
바로 전날 Constitutional Litigation Seminar 수업에서는 나이가 굉장히 많은 교수님이 질문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수업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지 반응이 전혀 없었다. 나 또한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It could be a dumb question..."
그러자 교수님은 단호한 표정으로 "There's no dumb question."이라고 했다. 학생이 바로 "Don't say that yet."이라고 받아쳤고 다들 웃었다. 무거웠던 수업 분위기가 좀 풀렸다. 나도 알아들을 수 있었던 농담이라 자신 있게 웃었다. 웃으면서도 우리는 왜 이렇게 못 할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