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4
행정직 공무원으로서 미국 로스쿨에 지원하는 실익이 뭔지 고민을 한다. 원래라면 진학하기 전에 했어야 하는 일을 지금에서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요즘 하루하루 수업 따라가기 너무 벅차고 힘이 들다 보니 왜 내가 사서 고생하고 있나, 지금이라도 마음을 놔버리고 편하게 지내야 하나 하는 마음이 계속 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내처럼 행정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기재부 동기들처럼 경제학을 전공했더라면 좀 나았을 테다. 나는 방통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4년제 법대나 로스쿨을 나온 것도 아니고 사법고시를 준비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법 관련 업무 경력이 좀 있다고 LLM으로 미국 로스쿨을 시작하는 건 굉장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다. 영어 부담은 덤이다.
그래서 얻는 장점과 단점이 무엇일까. 장점을 찾으려고 쓰는 글이니만큼 단점부터 생각해 본다. 일단, LLM 가지고 한국에서 써먹을 건 없다. 외국 석사 학위만으로 갑자기 학계에 진출할 수도 없고, 공직슬롯에서도 크게 알아주지 않는다. 1년 바짝 공부한 지식, 그것도 미국 법체계에 대한 것이면 한국에서 얼마나 쓸모가 있으려나. 판사라면 미국의 다양한 판례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 논증 같은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복귀한다 하면 써먹을 지식은 별로 없다. 보고서에 * 한 줄에다 미국의 사례 정도 적는 것 외에는 말이다.
LLM 졸업 후 미국 변호사라도 따면 달라지려나. 미국에 오기 전에 실제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공무원들을 여럿 만나보았다. 부처도 직급도 다양했다. 그런데 대답은 한결같았다. 공무원으로서 큰 도움이 되는 건 없다. 그냥 자기만족, 명함 한 줄, 그리고 퇴직하면 도움이 될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정도. 심지어 변호사 갱신 비용이 아까워서 몇 년째 자격이 정지되어 있는 분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미국 변호사를 따려는 계획이었다. 어차피 미국에서 있는 2년 동안, 1년은 LLM을 하고 나머지 1년은 연수를 받더라도 남는 시간에 미국 변호사 시험공부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워싱턴 D.C. 미국 변호사 자격 요건이 강화되는 바람에 나에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LLM 이후 미국 변호사까지 생각하려면 그 요건을 미리 파악하고 한국에서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못했지만, 후배들에겐 법과목을 많이 들어놔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제 미국 변호사는 신포도가 되어버렸다.
그럼 왜 사서 고생하느냐란 질문이 나올 때가 됐다. 열심히 공부해 봐야 한국에서 쓸 곳도 없고, 미국 변호사도 따지 않을 거라면 왜 굳이 LLM 과정을 하느냐는 거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얻는 게 많다. 특히 나같이 어려운 도전을 즐기는 데다가, 공부로 지식을 쌓는 것까지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공부하는 경험이 나를 성장시킨다. 요즘 Constitutional Law II 과목에서 평등 원칙을 배우고 있는데, 과거 인종을 둘러싼 갈등의 역사를 사법부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하나의 결론을 내기 위해 어떻게 논리를 만들고 쌓았는지 판례를 읽다 보면 감탄이 나오곤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견조차도 논리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가치관'을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A인지 B인지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형제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이유로 찬성한다, 또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가진다는 것이다. 40년 넘게 나름 밀도 있는 삶을 살다 보면 어떤 분야에서든 가치관이라는 게 꽤 선명하게 생겨 있다. 누가 무얼 물어도 내 마음속의 잣대를 갖다 대면 쉽게 답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제시되는 문제들에 대해 선뜻 답을 못 내리고 있다. A를 주장하는 의견을 들으면 A가 그럴듯해 보이고, B를 주장하는 의견을 들으면 B가 그럴듯해 보인다. 초등학교 때 했던 경험을 지금 또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정바카라에 대해서 정부가 인종을 구분하는 행위 그 자체가 차별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해 보이고, 오랜 차별의 역사를 보상하기 위해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타당해 보인다.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 마음을 모르겠다.
아마도 한국에선 평생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라 그럴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도 쓸모없는 거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이민이 늘어나고 국제결혼이 흔해지면, 인종 문제도 핵심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당장 써먹을 데는 없어도 언젠가 비슷한 문제를 만나게 되면 '그때 미국에서 진지하게 공부했던 지식'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예전에 열심히 살았던 보람을 찾기도 하니까.
사실, 자기 나라에서 법조인으로 활동한 다른 LLM 학생들과는 달리, 로스쿨 공부를 하는 데 있어 나의 공무원 경험이 크게 도움 되는 것 같진 않다. common law 법체계도 생소하고, 연방 정부와 주 정부 관계에서 생기는 사법권의 쟁점도 낯설며, 미국 헌법의 역사까지 모든 게 다 새롭다. 아니, 변호사의 글쓰기 방식조차도 ABC부터 새로 배우는 수준이다. 그냥 완전 쌩 초짜 대학생인데, 그 나라 말까지 못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반면에 행정대학원을 다니는 내 아내는 좀 달랐다. 수업 시간에 공무원의 경험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학생으로서 조별 프로젝트를 한 경험과, 실제 정바카라을 수립하고 집행해 본 경험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아내는 기술직이다 보니 경제학 과목에 대해선 나에게 많이 묻는다. 꽤 어려웠던 문제를 15년 전 공부했던 기억을 되살려 설명해 주었더니 아내가 깜짝 놀랐다. 나를 만나고 처음으로 재경직 포스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때가 미국에 와서 유일하게 공무원으로서 보람을 느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