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
최근 일주일 동안 말을 정말 잘하는 로스쿨 출신의 미국인, 또는 외국인이라고 하기 미안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는 LLM 동기들을 보면서 자신감을 크게 잃었었다. 여기서 나만 안 들리고, 나만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다. 나의 시선으로만 주변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긴 거였다. 겉으로는 다들 유유히 호수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속에선 가라앉지 않으려고 물갈퀴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한 수업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온 LLM 동기와 함께 앉았다. 그는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다. 방긋 웃는 표정과 적극적인 몸짓에서 긍정적인 기분이 이렇게 태도로 이어지는구나 싶었다. 나한테 왜 한국 사람들은 인사할 때 스킨십을 하지 않냐면서 뻘쭘해하는 내 손을 막 붙잡아 흔들고 그랬다. 그래야 더 빨리 친해진다면서. 그렇게 활발한 만큼 말도 많고 빨랐다. 영어를 공부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이런 사람이 바로 LLM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던 그가 수업 시간에 조용히 물었다. 교수님 말이 잘 들리냐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미리 공부한 부분은 7~80% 들려서 따라갈 수는 있는데, 갑자기 딴 이야기 하면 반도 못 알아듣는다고. 그런데 그 친구는 하나도 안 들린다고 하더라. 이렇게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말도 많이 하는 친구가 안 들린다고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 중간중간에 그가 나에게 물어보는 걸 보면, 크게 어려운 부분도 아닌데 진짜 말이 잘 안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내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봤었구나. 내가 말하는 걸 교수님이나 LLM 친구가 못 알아들으면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LLM 친구가 말하는 걸 내가 못 알아들으면 그것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실상은 내가 친구들 말이 잘 안 들리는 것처럼 다른 친구들도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거였다. LLM 친구의 말을 미국인 교수님이 못 알아들을 때도 있었다. 그땐 내가 그 친구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것만 신경 쓰고, 교수님이 못 알아들은 거에 대해선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겼다. 남에게 관대하고 나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Constitutional Law II 수업에서도 그랬다. 미국 로스쿨의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식 수업과 콜드콜을 몸소 경험했다. 대법원 판례 4개를 숙제로 읽어오라고 했고, 나는 그걸 다 읽고 이해하느라 며칠 동안 개고생을 했다. 나 빼고 모든 학생이 유창할 거란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다. 수업을 철저하게 준비했었기 때문에 수업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교수님의 질문들에 대해 영어로는 몰라도 한국어로는 어떻게 대답할지 속으로 대비가 다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날 교수님은 나를 지목하진 않았다)
그런데 미국 친구들의 대답은 예상과 달리 완벽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질문 의도에 따라 판례의 논리를 말하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본인의 창의적인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이 나에겐 어색했다. 준비가 덜 되어 임기응변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런 대답도 교수가 기대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찌 보면 주입식 교육을 받아 정답만을 말하도록 강요받는 나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멀리서 보면 교수가 영어로 질문하고 갑자기 지목된 학생이 당황하지 않고 대답한다. 참 아름답고 멋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교수님의 질문에 학생이 허튼소리를 하고, 교수님이 그걸 무안하지 않게 잘 포장해서 무마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로 생각만큼 매끄럽진 않다.
그래. 지금까지 나만 걱정하고 애를 태웠는데, 우리 모두가 다 버벅거리고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깐 마음이 많이 놓였다. 앞으로의 수업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겠단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수요일 Constitutional Law II 수업을 마치고 교수님께 찾아가서 말했다. 내가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는 하고 싶은데 지금은 아직 영어에 적응 중이니깐 몇 주만 시간을 달라, 그 후부터는 나를 지목해도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교수님은 자기 수업에서는 LLM 학생에게 콜드콜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아닌가. 정 말하고 싶을 때는 손을 들고 이야기하라고 했다. 속으로 와 대박이다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티 나지 않게 말했다. 그럼 조만간 수업 시간에 발언도 하겠다고.
한편, 이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내가 지금까지 콜드콜 때문에 예민하게 굴고 설레발치길래 아내는 정작 본인 수업에 콜드콜이 있는 것도 티 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나는 콜드콜 대상조차 아니었다니. 아내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분명 지난주 내내 얼굴이 시커멓게 탄 듯했는데, 헌법 수업을 마치고 난 후부터는 내 표정이 너무 밝아 보인다고 한다.
금요일 State and Local Government 수업에서도 비슷했다. 교수님은 첫 수업부터 모두가 수업 시간에 한 번 이상 발언을 해야 한다고 엄포를 놨다. 그래서 교수님의 질문에 내가 과감히 손을 들고 말했다.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손 들기 전에 속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제대로 안 나왔다. 한참 말하다 보니 교실이 썰렁해지는 것 같아서 당황했지만 그냥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내 말을 이해 못 한 표정으로, "You mean it's not clear."라고 말했다. 내가 준비한 핵심 문장은 정작 말을 못 했는데 말이다.
내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태연히 "Yes, that's what I mean." 이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수업 시간에 이상한 소리를 하면 다들 나를 쳐다볼 것 같고 부끄사라도 할 것 같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수업 시간에도 질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