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들에 대하여 1>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의 부름을 뒤로하고 다시 자신의 고독(동굴)으로 돌아오는 여정 속에서, 한때 자신의 가르침에 고무되었던 이들이 결국 사상적 순수함을 저버리고 과거의 세속적·종교적 질서로 변절해 버린 모습을 목격하며 토해내는 깊은 탄식으로 그들을 비판합니다.
아, 최근까지만 해도 여기 이 초원에 널려 있던 그 파랗고 다채롭던 것들 모두가 어느새 말라 잿빛이 되어 있는가? 이곳에서 나 얼마나 많은 희망의 꿀을 모아 나의 벌통으로 날랐던가!
여기서 '초원'은 차라투스트라의 사상과 생명력이 펼쳐지던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파랗고 다채롭던 것들'은 한때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생기를 띠며 새로운 삶을 꿈꾸던 인간들, 즉 제자나 추종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삶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다시 무기력한 대중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잠재력과 변화의 가능성을 보며, 그것을 미래의 지혜와 사상의 '벌통'에 소중하게 축적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품었던 간절한 기대는 실망으로 되돌아옵니다.
진정, 한때의 일이기는 했지만 저들 가운데 많은 자가 춤추는 자처럼 발을 들어 올렸고, 그런 저들에게 나의 지혜 속에 깃들어 있던 웃음이 눈짓을 보냈었다. 그러자 저들은 생각해 보는 듯했고, 그러던 저들이 저렇게 새우등을 하고 십자가 쪽으로 기어가고 있으니.
'춤추는 자'는 무거운 도덕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삶을 가볍고 기쁘게 긍정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상징합니다. '웃음' 역시 심각함과 죄의식을 강요하는 구시대의 가치를 허무는 해방의 힘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이 잠시나마 기존의 억압에서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춤출 때 미소를 지어주며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는 듯하던 그들은 결국 고독과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새우등을 하고'는 당당히 직립하지 못하고 굴욕적으로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며, 또한 '십자가 쪽으로 기어가고' 자기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며 다시 기독교적 구속, 죄의식, 그리고 세속적인 복종의 굴레로 비겁하게 기어들어가는 '배신'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아! 저들 가운데는 끈질긴 담력과 담력 이상의 담력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자들이 언제나 적었다. 그런 사람들에에게는 정신까지도 참을성이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그 밖의 사람들은 겁쟁이들이다. 그 밖의 사람들, 그것은 언제나 대다수의 사람들, 일상적인 데다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많은-너무나도-많은-자들로서 하나같이 겁이 많다!
기존의 가치를 깨부수고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는 '강인한 담력'을 가진 인간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언제나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냉정한 현실입니다. 정신적 지구력과 고독을 견딜 힘이 있는 소수와 달리, 그 힘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쟁이'들입니다. 이들은 신념을 지키다 배신했다기보다, 애초부터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가 없어 늘 다수(너무나도-많은-자들)의 무리 속에 숨어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들의 삶이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은 타인의 기준에 종속되어 자기 고유의 주체성을 상실한 맹목적 삶에 대한 가차 없는 철학적 사형선고를 의미합니다.
고야의 〈채찍질 고행자들의 행렬〉 앞에 서면 먼저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깔을 쓴 사내들은 허리를 굽힌 채 맨등을 드러내고, 손에 쥔 채찍으로 스스로를 내리칩니다. 그들 뒤로는 구경하는 군중이 어둠 속에 얼굴 없는 그림자처럼 이어집니다. 이 그림에서 눈여겨볼 것은 폭력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누군가 이 사람들을 억지로 굽힌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 손으로 제 등을 내리치고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시든 초원 앞에서 토해낸 탄식도 바로 이 지점을 향합니다. 한때 춤추는 자처럼 발을 들어올리고, 그의 웃음에 응답하여 생각에 잠기던 이들이 새우등을 하고 십자가 쪽으로 기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외부의 억압에 굴복한 패배라기보다,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몸이 스스로 택한 자세에 가깝습니다. 고독은 아무도 대신 짊어져 주지 않기에 무겁고, 죄의식은 누군가 대신 짊어져 준다고 약속하기에 가볍습니다. 그래서 겁은 신앙의 형식을 빌려 자기 학대로 굳어집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많은-너무나도-많은-자들"이라 부른 것은 바로 이렇게 서로의 등을 보며 같은 방향으로 걷는 행렬입니다.
물론 고야와 니체의 비판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고야가 겨눈 것은 맹신과 제도화된 종교의 관행이었고, 니체가 겨눈 것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도덕의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두 시선은 한 곳에서 만납니다. 굽은 등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힘이 없는 다수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답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는 행렬 밖에서 구경하는 군중일까요, 아니면 아직 고깔을 쓰지 않았을 뿐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람일까요? 고야의 어두운 화면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등을 곧게 펴고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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