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oss, My Mentor, My Forever Friend
2001년쯤이었던 것 같다.
Pleasanton, California에 있는 PeopleSoft 본사를 지인의 회사에 잠시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P를 만났다.
눈이 크고 맑은, 아주 인상적인 동남아계 미국인 여성이었다. 검은색 터틀넥에 스키니진, 부츠를 신고 있었고, 짧게 정돈한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다. 목소리는 높고 또렷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첫인상이 정말 강렬했다.
그런데 몇 년 뒤, 나는 전혀 다른 모습의 P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삼성전자/ 계열사에 다닐 때, 출장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렀을 때였는데, 그때의 P는 조금 긴 잔머리를 하고 프라다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있었다. 회사 밖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아주 편안했다.
그리고 시간이 또 흘렀다. 몇 년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삼성전자에서 일하고 있었고, 육아휴직 기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생겼다.
당시 Oracle UX/UI 팀의 인터뷰를 위해 San Mateo Building 8층의 전망 좋은 회의실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P를 다시 만났다.
인터뷰 전에 한국에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미리 보내놓은 상태였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서 노트북을 열고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긴장됐다. 그런데 P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Min, you don’t have to sell it to me.”
그리고 이어서,
“A presentation isn’t even necessary. Your work speaks for itself.”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이 거짓말처럼 풀렸다.
나는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P는 이미 내가 보내온 포트폴리오를 충분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P의 팀원들이 한 명씩 들어왔다. 그날의 인터뷰는 일반적인 면접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나에게 포트폴리오를 하나씩 설명하라고 몰아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디자인 트렌드에 대해 물어보고,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떤 디자인을 좋아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인터뷰라기보다 디자이너들끼리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아주 편안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훗날 내가 디자이너들을 인터뷰할 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지원자가 긴장해서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했다. 사람이 편안해야 자신이 가진 것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몇 달 동안 Background Check을 기다렸고, H-1B Visa 문제까지 겹치면서 HR의 답변을 계속 기다려야 했다. 결국 비자 문제로 그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Pat에게서 배운 것은 꽤 오래 남았다.
좋은 인터뷰는 사람을 시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자리라는 것.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Cisco에서 P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조직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였다.
그렇게 처음 만난 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같은 업계에서 서로의 커리어를 지켜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인연이다.
2001년, Pleasanton에서 처음 만난 디자이너.
그리고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
나에게 P는 단순히 예전에 함께 일했던 상사가 아니다. 나보다 먼저 길을 걸었던 디자이너였고, 좋은 리더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때 내게 했던 한마디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Your work speaks for itself.”
어쩌면 디자이너에게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