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는 관계가 오래가려면 누군가는 조금 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한 번 더 이해하고, 먼저 연락하고, 서운해도 그냥 넘어가야 관계가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되는 일에 꽤 익숙했다.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는 상대가 편한 날을 먼저 물었다. 만나고 싶은 장소가 있어도 어디든 괜찮다고 했고, 약속이 갑자기 바뀌어도 별일 아닌 듯 맞췄다. 연락이 뜸해지면 먼저 안부를 묻는 쪽도 주로 나였다.
서운한 일이 생겨도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내가 조금 양보하면 되고, 한 번쯤 참으면 그만이라고 여겼으니까. 이 정도 일로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관계를 잘 지키는 방법인 줄 알았다. 처음부터 많이 참았던 건 아니다. 오늘은 상대가 원하는 걸 하고 다음에는 내가 원하는 걸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연락했으니 다음에는 상대가 하겠지 싶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약속도 한 번쯤은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음에도 비슷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뭘 좋아하는지보다 주변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를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고, 누구는 늦은 시간을 좋아한다. 갑자기 약속을 잡아도 괜찮은 사람과 며칠 전부터 시간을 정해야 편한 사람도 안다. 사람에 따라 나도 조금씩 달라졌다. 정작 나는 어디에서 만나고 싶은지, 몇 시쯤 집에 가고 싶은지, 지금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은지는 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걸 배려라고 여겼다. 사람마다 다르니 내가 조금 맞추는 편이 서로 편했다. 실제로 큰 다툼 없이 무난하게 지냈고, 오래 이어진 관계도 많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날이 있었다. 즐겁게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유난히 피곤한 날. 별다른 일도 없고 누구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닌데, 집에 들어오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잘 몰랐다. 한 번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도 별일은 없었다. 상대가 먹고 싶다는 메뉴를 먹고, 가고 싶다는 곳에 갔다. 조금 더 있다 가자는 말에 예정했던 시간보다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분명 즐거웠는데 동시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때는 그 두 마음이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잘 몰랐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니 즐거워야 하고, 즐거우면 조금 피곤한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괜히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처럼 느껴져 모른 척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오늘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생각해 보니 사람을 만날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일이 별로 없었다. 어디에서 만날지 물으면 아무 데나 좋다고 했고, 무엇을 먹을지 물으면 다 괜찮다고 했다. 조금 쉬고 싶은 날에도 약속이 잡히면 나갔다. 먼저 집에 가고 싶다가도 상대가 아쉬워하면 조금 더 앉아 있곤 했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대단한 일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억지로 맞추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은 내 의견을 물었고,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자주 괜찮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상대가 한 번쯤 알아주기를 바랐다. 오늘은 내가 조금 피곤하다는 걸, 사실은 다른 걸 먹고 싶었다는 걸, 이제는 집에 가고 싶다는 걸. 말하지 않으면서 알아주기를 기다린 셈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작은 선택에서 내가 빠지는 일이 꽤 많았다. 관계를 지키고 싶었던 건 맞다. 좋아하는 사람과 괜한 일로 멀어지고 싶지 않았고,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도 싫었다. 한 번 생긴 인연을 오래 이어가는 게 좋았다. 그래서 관계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상대보다 먼저 나를 돌아봤다. 내가 예민했던 건 아닐까. 조금 더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굳이 말해서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몇 번 하고 나면 처음에 느꼈던 서운함은 슬그머니 뒤로 밀려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에게 서운한 것보다 서운해하는 내가 더 신경 쓰였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데 이 정도는 이해해야 할 것 같았고, 좋은 관계라면 사소한 일쯤은 넘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달래고 나면 겉으로는 다시 아무 일도 없어진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내가 그냥 없던 일로 만들고 있었을 뿐이다. 요즘은 사람을 만날 때 아주 사소한 것부터 내 쪽에도 물어보려고 한다. 오늘은 뭘 먹고 싶은지, 몇 시쯤 집에 가고 싶은지. 정말 만나고 싶은지, 아니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은지. 별것 아닌 질문들인데 막상 답을 찾으려 하면 의외로 오래 걸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는 익숙하면서 내 마음을 묻는 일은 자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부터 말해본다. 오늘은 이걸 먹고 싶다고 하고, 그날은 어렵다고도 한다. 피곤하면 조금 일찍 일어나고, 서운했던 일이 있다면 한참 뒤라도 이야기해 본다. 처음에는 이런 말 하나에도 마음이 쓰였다. 괜히 내 의견을 말했나 싶고, 그냥 맞춰줄 걸 그랬나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도 관계는 이어졌다. 내가 먹고 싶은 걸 골랐다고 해서 사이가 달라지지 않았고, 먼저 집에 간다고 해서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서운했던 일을 말한 뒤에야 서로 몰랐던 마음을 알게 된 적도 있다.
물론 모든 관계가 예전과 똑같지는 않다. 조금 멀어진 사람도 있고, 전보다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서 오히려 편해진 관계도 생겼다. 예전에는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 같으면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지금은 모든 관계가 같은 모습으로 오래가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에도 각자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거리가 있을 테니까. 아직도 관계가 틀어지는 건 싫다. 누군가와 서먹해지면 이유를 생각하고, 내가 뭘 잘못했나 돌아보기도 한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더 마음이 쓰인다. 아마 이런 모습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관계가 불편해질 때마다 무조건 내 쪽을 접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은 건 싫을 수 있다. 오래 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인데 오늘은 혼자 있고 싶은 날도 있다.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생기면 어떻게든 없애려고 했다. 좋은 관계라면 그러지 않아야 할 것 같아서.
지금은 그냥 두어본다. 서운하면 잠시 서운한 채로 있고, 피곤하면 먼저 집에 간다. 어떤 날은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만나고 싶지 않은 날에는 다음에 보자고 한다. 아주 작은 일들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런 작은 선택들이 생각보다 오래 어려웠다. 돌아보면 내가 괜찮다고 넘긴 일은 참 많다. 그때는 그게 관계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한 번 더 맞춰주고, 한 번 더 이해하고, 조금 덜 말하면 사이가 오래갈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게 지켜온 관계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안에서 내가 너무 자주 빠져 있었다.
요즘도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일이 싫지는 않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조금 움직이는 것도 여전히 좋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 내 마음도 같이 보는 정도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건네는 배려는 예전과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나도 괜찮은지.
나도 원하는 건지.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일수록 그 사람 곁에서 나도 편했으면 좋겠다. 그 관계 안에서, 나까지 잃어버리지는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