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데,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아."
거절할 때면 미안하다는 말부터 나온다. 약속을 취소한 것도 아니고, 하기로 한 일을 갑자기 못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 부탁했고 나는 어렵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미안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꽤 쉽게 한다. 답장이 조금 늦어도 미안하고, 약속 시간을 바꿔야 할 때도 미안하다. 상대가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오히려 미안해할 때도 내가 더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더 미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서로 미안하다고 한다.
그런데 거절은 더 어렵다. 이번에는 못 할 것 같다고 말하면 충분한데 막상 입 밖으로 내놓고 나면 말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그래서 얼른 미안하다는 말을 보탠다. 그 한마디가 붙으면 조금 안심이 된다. 거절은 했지만 당신을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라는 뜻도 되고, 도와주지 못하는 걸 나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도 되는 것 같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조금 덜 매정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부탁을 하나 받았는데 그날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못 할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었지만 그냥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요즘 조금 바빠서 이번에는 힘들 것 같다고 둘러댔고, 말하고 나니 조금 찔렸다. 바쁜 건 맞지만 시간을 내려면 못 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냥 어렵다고 말했으면 됐을 텐데, 나는 굳이 상대가 이해할 만한 이유까지 붙여서 말한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절한 게 미안했던 걸까.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이 거절하는 내가 마음에 걸렸던 걸까.
누군가 내 부탁을 거절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오늘은 힘들 것 같다거나 이번에는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조금 아쉬울 수는 있어도 그뿐이다. 그 사람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고, 굳이 그 이유를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내가 거절할 때는 자꾸 사정을 설명한다. 요즘 일이 많아서, 이미 다른 일정이 있어서, 그날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유가 길어질수록 거절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내가 말한 이유가 충분한지도 혼자 확인한다. 이 정도면 이해하겠지 싶어야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다.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정하는 일인데도 나는 상대에게 이해받을 만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거절을 하는 게 아니라, 거절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할 때는 있다. 내가 실수했을 때,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내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었을 때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습관처럼 그 말을 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물을 부탁할 때도 죄송하다고 하고, 자리를 조금 비켜 달라고 할 때도 먼저 미안하다고 한다. 누군가 내 시간을 물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을 때조차 미안하다는 말부터 나온다.
미안하다는 말은 참 편하다. 그 말을 먼저 꺼내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조금 줄어드니까. 부탁하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반면 거절은 조금 다르다. 내가 어렵다고 하면 상대가 아쉬울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잠깐 서운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 마음까지 없애주고 싶어 나는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냈던 게 아닐까.
그러다 한 번은 일부러 미안하다는 말을 빼봤다.
"이번 주는 어려울 것 같아. 다음에 보자."
보내기 전까지 몇 번이나 읽어보았지만 역시 뭔가 빠진 것 같았다. 평소라면 자연스럽게 붙였을 미안하다는 말이 없으니 갑자기 무뚝뚝해 보였다. 그래도 그냥 보내본다. 돌아온 답은 평범했다. 알겠다는 말과 다음에 보자는 짧은 답. 그게 전부였다. 상대는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 혼자만 그 짧은 문장을 보내놓고 한동안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정말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말하면 된다. 다만 요즘은 그 말이 먼저 나오려 할 때 가끔 생각해 본다. 정말 미안한 일을 한 걸까. 아니면 거절하는 게 어색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둘은 비슷해 보여도 조금 다르다.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고 해서 언제나 잘못한 것은 아니니까. 시간이 필요해서, 내키지 않아서, 오늘은 쉬고 싶어서 거절하는 날도 있을 수 있으니까.
아직은 미안하다는 말이 거절보다 훨씬 쉽다. 거절하고 나면 이유를 하나 더 붙이고 싶고, 미안하다는 말로 문장을 조금 부드럽게 만들고 싶어진다. 그래도 가끔은 그 말을 빼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내 대답만 남겨보기로 한다. 생각보다 그 문장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