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4화. 마지막 봄, 감나무 아래에서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4화. 마지막 봄, 감나무 아래에서

1978년 3월.

서울 변두리의 오래된 골목에도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면서 돌담 아래로 이름 모를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양지바른 집에서는 장독대 뚜껑을 열어 햇볕을 쬐었고, 어머니들은 겨울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느라 분주했다.

마을 어귀 구멍가게에는 새 학기를 맞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새 공바카라에서 풍기는 종이 냄새와 연필을 깎을 때 나는 나무 냄새가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김씨 집안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높은 돌담 안에는 여전히 겨울이 머물러 있었다.

김만석의 병세가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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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은 여덟 살이었다.

1970년 1월에 태어난 도현은 또래보다 조금 일찍 국민학교에 들어가 그해 3학년이 되었다.

키는 제법 자랐지만 몸은 여전히 말랐다.

가느다란 목과 좁은 어깨, 갸름한 얼굴에 또렷한 눈매를 지닌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이미 공부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다.

선생님이 문제를 내면 도현은 곧잘 정답을 맞혔다. 받아쓰기에서 틀리는 일이 드물었고, 셈 문제도 누구보다 빨리 풀었다.

그러나 도현은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칭찬받는 일이 기쁘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다.

할아버지는 도현이 상을 받아올 때마다 기뻐했지만, 누나들은 그런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도현은 상장을 받아도 조용히 바카라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사랑채로 향했다.

“할아버지.”

방 안에서는 약 냄새가 났다.

김만석은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자를 보면 몸을 일으켜 앉았지만, 이제는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도현이 왔느냐.”

“네.”

도현은 바카라가방을 내려놓고 할아버지 곁에 앉았다.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어요.”

만석의 눈빛이 조금 밝아졌다.

“무슨 상이냐?”

“글짓기요.”

“그래?”

도현은 가방에서 상장을 꺼냈다.

만석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잘했구나.”

그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글을 썼느냐?”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우리 집이요.”

“우리 집?”

“네.”

“어떻게 썼는데?”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고, 할아버지가 계시고…”

말끝이 흐려졌다.

만석은 손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글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네 누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도현이 쓴 우리 집은 감나무와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만석은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장을 조심스럽게 접어 머리맡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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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김태중이 집으로 돌아왔다.

태중은 지방의 토지 매매와 건축 관련 사업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올라온 것이었다.

“아버지.”

태중이 사랑채에 들어서자 만석은 눈을 떴다.

“왔느냐.”

“진작 올라왔어야 했는데 일이 좀 꼬였습니다.”

“일이야 늘 있는 법이지.”

태중은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얼마 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큰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만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어라.”

“아버지.”

“내 몸은 내가 안다.”

태중은 입술을 깨물었다.

만석은 한참 아들을 바라보았다.

“태중아.”

“예.”

“도현이를 잘 돌보아라.”

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아이는…”

만석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알고 있느냐?”

태중은 뜻밖의 질문에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만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 아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아느냐?”

태중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공부 말고.”

“바카라 읽는 걸 좋아하고…”

만석은 눈을 감았다.

“너도 모르는구나.”

태중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석은 힘겹게 말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돈만이 아니다.”

태중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해한 것은 말의 뜻뿐이었다.

그 말이 자신의 아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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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황서윤은 학교에 가기 위해 대문 앞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1970년 12월에 태어난 서윤은 그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새 바카라가방을 메고 거울 앞에 서는 것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할머니!”

“왜 그러냐?”

“나 예뻐?”

전옥분은 마루에 앉아 손녀를 바라보았다.

짧게 묶은 머리에는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고, 동그란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우리 서윤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서윤은 활짝 웃었다.

“그럼 학교 다녀올게!”

“차 조심하고.”

“네!”

서윤은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조금 내려가자 박혜진과 이미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윤아!”

“늦었지?”

“조금.”

“우리 엄마가 밥 더 먹으라고 해서.”

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걸었다.

학교로 가는 길에는 큰길을 건너야 했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버스정류장이 붐볐고, 공장으로 향하는 자전거들이 연달아 지나갔다.

그때 서윤은 길 건너편에서 도현을 발견했다.

“도현 오빠!”

도현이 돌아보았다.

서윤은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학교 가?”

“응.”

“나도!”

도현은 피식 웃었다.

“학교 가는 시간인데 당연하지.”

“그래도 인사할 수 있잖아.”

서윤은 횡단보도 앞에서 도현을 기다렸다.

두 아이는 함께 길을 건넜다.

서윤은 도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빠, 왜 이렇게 말랐어?”

“원래 그래.”

“밥 많이 먹어.”

“먹어.”

“우리 할머니가 그러는데, 잘 먹어야 키 큰대.”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다시 말했다.

“오늘 우리 집에 오면 고구마 줄게.”

“괜찮아.”

“왜?”

“집에 가야 해.”

“맨날 집에 가야 한대.”

도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할아버지가 아프셔.”

서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많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아프면 내가 손 주물러 주는데.”

“그래?”

“응. 그러면 좋아하셔.”

도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후 그는 할아버지의 손을 오래 주물러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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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집안의 안채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윤정애는 첫째 딸 명희와 마주 앉아 있었다.

명희는 이미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큼 자란 처녀였다.

어릴 적에는 그저 동생이 미웠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동생을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도 괴로웠다.

“어머니.”

“왜 그러니?”

“할아버지 많이 편찮으시죠?”

정애는 한숨을 쉬었다.

“연세가 있으시니 어쩌겠니.”

명희는 잠시 망설였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정애가 딸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니?”

명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현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되긴. 우리 집 아들이지.”

“그건 아는데…”

명희는 말을 멈추었다.

정애는 차갑게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아니에요.”

명희는 고개를 숙였다.

정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감나무 가지에 어린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나무를 볼 때마다 그녀는 도현이 태어난 날을 떠올렸다.

온 집안이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던 날.

자신은 안채에 혼자 앉아 있었다.

시어머니도, 남편도, 친척들도 모두 아들을 얻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에게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그날 이후 정애는 한 번도 마음 편히 웃지 못했다.

그렇다고 도현을 미워하는 것이 옳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때때로 잘못한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약한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정애는 자신의 마음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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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김만석은 결국 큰 병원에 입원했다.

태중이 서울 시내의 병원으로 모셨지만 상태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도현은 학교를 마치면 병원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애는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서 뭘 하겠니.”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어른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

도현은 더 말하지 못했다.

며칠 뒤 태중이 집에 왔다.

도현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왜 그러냐?”

“할아버지한테 가면 안 돼요?”

태중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으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중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내일 같이 가자.”

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본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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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는 약 냄새가 가득했다.

김만석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많이 야위었고,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도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만석은 눈을 떴다.

“우리 도현이 왔구나.”

도현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많이 아파요?”

만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

“언제 집에 와요?”

만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현은 손을 더 꼭 잡았다.

“감나무에 감 열리면 같이 먹어야 하는데.”

만석의 눈가가 젖었다.

“그래.”

“올해도 많이 열릴 거예요.”

“그렇겠지.”

“할아버지 좋아하는 큰 감으로 골라놓을게요.”

만석은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다시 생각했다.

아들을 얻기 위해 한 여자의 삶을 뒤흔들었고, 그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는 가문의 이름을 짊어지게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길은 마련해 주지 못했다.

만석은 손자의 손을 꼭 잡았다.

“도현아.”

“네.”

“너는…”

목소리가 떨렸다.

“너는 누구보다 귀한 아이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런데…”

만석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귀하다는 것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도현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귀한 거야.”

만석은 손자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너도 그렇고, 네 누나들도 그렇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너를 낳아준 사람도 그렇고.”

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요?”

만석의 손이 멈추었다.

병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엄마도 귀해요?”

만석은 눈을 감았다.

“그래.”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 어미도 귀한 사람이었지.”

도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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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도현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할아버지가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요.”

태중은 운전기사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

“엄마도 귀한 사람이라고요.”

태중은 웃었다.

“그럼. 네 엄마도 귀하지.”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태중이 돌아보았다.

“뭐가 아니냐?”

“할아버지가 나를 낳아준 사람도 귀하다고 하셨어요.”

태중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동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태중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그러신 모양이다.”

도현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별뜻 없다.”

“그런데…”

“도현아.”

태중의 목소리가 조금 단호해졌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어.”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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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9월.

김만석이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들은 뒤였다.

김씨 집안에는 친척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마당에서는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재산 문제를 걱정했고, 누군가는 장례 준비를 은근히 의논했다.

도현은 그 모든 것이 싫었다.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는데 어른들은 벌써 할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도현은 사랑채 앞에서 둘째 누나 명숙의 말을 들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저 감나무도 베어버렸으면 좋겠어.”

셋째 명자가 물었다.

“왜?”

“맨날 도현이만 데리고 감 따주시잖아.”

도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명숙은 동생을 발견하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귀한 장손 나셨지.”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첫째 명희가 나타났다.

“명숙아, 그만해.”

“언니는 왜 맨날 도현이 편이야?”

“편드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

명희는 한참 동생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편찮으시잖아.”

명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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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도현은 할아버지 곁에 앉아 바카라을 읽었다.

만석은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손자가 바카라을 읽으면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한참 뒤 만석이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바카라을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노인은 손자의 손을 잡았다.

“도현아.”

“네.”

“감나무…”

도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감이 익어가고 있었다.

“네. 많이 열렸어요.”

만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나무는…”

숨이 차올랐다.

도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말씀하지 마세요. 힘드시잖아요.”

만석은 고개를 저었다.

“내 아버지가 심으신 나무다.”

“알아요.”

“그 나무가…”

만석은 잠시 숨을 골랐다.

“우리 집안보다 오래 살지도 모르겠구나.”

도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무가 어떻게 집안보다 오래 살아요?”

만석은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집안이라는 것은…”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사람이 있어야 이어지는 거란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석은 마지막 힘을 모아 손자의 손을 꼭 잡았다.

“도현아.”

“네.”

“너는 꼭…”

노인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행복하게 살아라.”

도현은 웃었다.

“네, 할아버지.”

그날 밤 김만석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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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김씨 집안의 높은 대문이 열렸다.

친척들이 모여들었고, 집 안에서는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현은 사랑채 문 앞에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누군가 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현아, 나와 있어라.”

도현은 밖으로 밀려났다.

마당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도현에게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감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무 밑동에 앉았다.

가을바람이 불었다.

감 하나가 떨어졌다.

툭.

잘 익은 감이 흙바닥에 터졌다.

도현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도현아, 감 하나 먹을 테냐?’

도현은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김도현은 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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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골목 아래 황씨 집안에서는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황서윤은 학교에 갈 준비를 하다가 김씨 집안에서 들려오는 곡소리를 들었다.

“할머니.”

“왜 그러냐?”

“누가 울어요?”

전옥분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김 참봉 어른이 돌아가셨구나.”

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

“도현 오빠 할아버지?”

“그래.”

서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도현 오빠는 어떡해?”

옥분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왜?”

“할아버지 엄청 좋아했는데.”

옥분은 한숨을 쉬었다.

“많이 슬프겠지.”

서윤은 바카라가방을 내려놓았다.

“나 잠깐 갔다 올게.”

“어디를?”

“도현 오빠한테.”

옥분은 손녀를 붙잡았다.

“지금은 안 된다. 상중이잖니.”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언제 가?”

옥분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골목 위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그날 오후.

김도현은 여전히 감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상복을 입은 어른들이 바쁘게 오갔다.

누군가는 손님을 맞았고, 누군가는 음식을 날랐다.

그러나 아무도 감나무 아래의 아이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그때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 오빠.”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황서윤이었다.

서윤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이거.”

작은 손이 내밀어졌다.

엿 한 조각이었다.

도현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왜?”

서윤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슬플 때 단 거 먹으면 조금 나아진대.”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의 옆에 앉았다.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도현은 엿을 받았다.

그러나 먹지는 않았다.

서윤은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빨갰다.

“많이 울었어?”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서윤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 있었다.

한참 뒤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아.”

“응?”

“우리 할아버지 이제 안 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다시는 못 봐.”

서윤은 도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도현은 놀라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손이 따뜻했다.

그 순간 도현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서윤은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아이는 감나무 아래 나란히 앉아 있었다.

높은 담장 안에서는 장례를 치르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 밖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김도현의 세상에서는 가장 따뜻했던 한 사람이 사라졌다.

그날 이후 도현은 조금씩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법을 배워간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알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낳아준 여자의 존재를 끝내 숨겼다는 사실도.

아버지가 집을 비운 뒤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도.

그리고 훗날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될 한 가지 재능이 무엇인지도.

그저 여덟 살의 도현은 감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준 여자아이와 함께.

가을바람이 불었다.

감나무 잎이 흔들렸다.

두 아이의 그림자가 마당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날의 기억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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