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웃음이 사라진 제1부. 두 가문의 뿌리집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3화. 웃음이 사라진 집
1977년 봄.
서울의 변두리 마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큰길 건너 논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 벽돌 공장이 들어섰고, 마을 어귀에는 전파사와 양복점이 생겼다.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골목마다 시멘트가 깔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진다는 말이 모든 사람의 삶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김씨 집안의 높은 돌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래된 기와지붕 아래로 봄볕이 내려앉았고,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에서는 연둣빛 새순이 돋아났다.
그 집의 유일한 아들 김도현은 일곱 살이었다.
1970년 1월에 태어난 도현은 또래보다 키가 조금 큰 편이었지만 몸은 여전히 말랐다. 갸름한 얼굴에 깊은 눈매를 지녔고, 생각이 많아 보이는 아이였다.
도현은 그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가는 첫날, 할아버지 김만석은 손자의 바카라가방을 직접 살펴보았다.
“연필은 몇 자루냐?”
“세 자루요.”
“공바카라은?”
“네 권이요.”
“지우개는?”
“여기 있어요.”
만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리 집안 장손이 학교에 가는구나.”
도현은 새 바카라가방을 어깨에 멨다.
검은 가방은 아이의 좁은 어깨에 조금 커 보였다.
만석은 손자의 옷깃을 바로잡아 주었다.
“학교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네.”
“그렇다고 친구들을 업신여기면 안 된다.”
“네.”
“집안이 부유하다고 사람까지 훌륭한 것은 아니야.”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만석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웃었다.
“글쎄다. 그건 네가 커서 판단해 보거라.”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몰랐다.
훗날 자신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원망하게 될지를.
김만석은 그해 들어 부쩍 늙어 보였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기침은 봄이 되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의원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만석은 여전히 아침마다 사랑채에 앉아 집안일을 챙겼다.
오랫동안 집안의 재산과 사람을 다스려온 노인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낯설었다.
그러나 몸은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고, 밤이면 가슴이 답답해 잠에서 깨곤 했다.
어느 날 박노식이 사랑채로 들어왔다.
“영감님, 약을 가져왔습니다.”
만석은 약사발을 내려다보았다.
“노식이.”
“예.”
“도현이는 학교에 잘 다니고 있나?”
“예. 선생님께서도 총명하다고 칭찬하셨답니다.”
만석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놈이 바카라을 좋아하더니.”
노식은 약사발을 건넸다.
만석은 한 모금 마시고 얼굴을 찌푸렸다.
“쓰구먼.”
“몸에 좋은 약이 원래 쓰지 않습니까.”
“허허. 자네도 늙더니 말이 많아졌어.”
노식은 웃지 못했다.
만석의 손이 전보다 많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감님.”
“왜?”
“이번에는 큰 병원에 한번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석은 손을 내저었다.
“사람이 늙으면 병도 친구가 되는 법이야.”
“그래도…”
“내가 죽는 것이 걱정인가?”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석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감나무 가지 끝에 어린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죽는 게 무섭지는 않아.”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만 저 어린것이 마음에 걸리지.”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걱정하는 아이는 같았지만, 그 걱정의 이유는 달랐다.
만석은 손자가 가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노식은 만석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아이를 누가 지켜줄지 걱정했다.
도현은 학교에서 금세 눈에 띄는 아이가 되었다.
글자를 읽는 속도가 빨랐고, 셈에도 능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적으면 도현은 누구보다 먼저 답을 찾아냈다.
그러나 손을 번쩍 들고 나서는 아이는 아니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일어나 또박또박 대답했다.
“김도현.”
“네.”
“이 문제 풀어볼래?”
“네.”
도현은 칠판 앞으로 나갔다.
작은 손으로 분필을 잡고 답을 적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교실에서 박수가 나왔다.
도현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에게 칭찬받은 이야기를 했다.
만석은 크게 기뻐했다.
“역시 우리 손자야.”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했다.
“도현이가 학교에서 제일 잘한다더구나.”
그 말을 듣던 둘째 누나 명숙은 밥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학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제일 잘한대요?”
만석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선생이 칭찬했다잖느냐.”
“저도 학교에서 상 받아왔어요.”
명숙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지난번 시험에서 반에서 일등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만석은 잠시 생각했다.
“그랬느냐?”
명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잘했구나.”
그 말이 전부였다.
명숙은 더 이상 밥을 먹지 않았다.
도현은 누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명숙은 방에서 혼자 울었다.
그녀 역시 공부를 잘하는 딸이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자신의 성적은 동생의 글씨 한 줄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명숙은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왜 딸로 태어났을까.”
그 말은 훗날 동생을 향한 원망으로 변해갔다.
골목 아래 황씨 집안에서는 전혀 다른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서윤이 동네 남자아이와 싸운 것이다.
“황서윤!”
어머니 이정순이 마당에서 소리쳤다.
서윤은 대문 밖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네!”
“들어와!”
“왜요?”
“왜긴 왜야! 성복이 엄마가 왔다 가셨다.”
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걔가 먼저 그랬는데.”
“뭘?”
“혜진이 머리채를 잡았어.”
“그래서 네가 성복이를 밀었니?”
“응.”
정순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저 고집을 어쩌면 좋으냐.”
서윤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혜진이가 맞고 있는데 그냥 봐?”
정순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윤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엄마는 내가 맞고 있으면 친구들이 그냥 보고 있어도 좋아?”
정순은 딸을 바라보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말은 또 어쩜 저렇게 잘하는지.”
그때 마루에서 할머니 전옥분이 말했다.
“서윤이 말이 틀린 건 아니구먼.”
“어머니, 자꾸 편드시면 버릇 나빠져요.”
옥분은 콩을 고르던 손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남을 괴롭히는 걸 보고 모른 척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지.”
서윤은 얼른 할머니 곁으로 달려갔다.
“그렇지, 할머니?”
옥분은 손녀의 이마를 가볍게 톡 쳤다.
“하지만 밀어서 다치게 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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