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의 집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6화.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의 집
1979년 2월.
서울 변두리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골목마다 연탄재가 쌓였고, 아침이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수도가 얼어붙은 집에서는 양동이를 들고 공동수도로 향했고, 어머니들은 찬물에 손을 담그며 하루를 시작했다.
김씨 집안의 높은 돌담에도 밤새 서리가 내려앉았다.
기와지붕 아래 넓은 마당은 깨끗하게 쓸려 있었고, 사랑채 앞에는 여전히 김만석이 아끼던 감나무가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집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집 안의 질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김만석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집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윤정애였다.
남편 김태중은 지방 사업에 매달려 한 달에 며칠밖에 집에 머물지 않았다.
첫째 딸 명희는 스무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둘째 명숙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셋째 명자와 넷째 명옥도 각자의 학교생활로 분주했다.
그리고 김도현은 아홉 살이 되었다.
1970년 1월에 태어난 아이.
김씨 집안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그러나 이제 그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은 집 안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도현의 방은 안채 뒤편에 있었다.
예전에는 이불과 잡동사니를 넣어두던 작은방이었다.
창문은 손바닥 두 개를 나란히 놓은 것만큼 좁았고, 겨울이면 문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아랫목에 손을 대도 미지근할 뿐이었다.
도현은 아침마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바카라가방을 챙겼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방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마당에는 밤새 내린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도현은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
윤정애는 아궁이 앞에서 불을 살피고 있었다.
“일어났니?”
“네.”
“세수하고 밥 먹어라.”
도현은 부엌 한쪽에 놓인 대야를 바라보았다.
찬물이 담겨 있었다.
“따뜻한 물 조금만 써도 돼요?”
정애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솥에 있는 물은 아버지 세숫물로 남겨둔 거야.”
“아버지 오늘 오세요?”
“아니.”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럼 조금만…”
정애가 고개를 돌렸다.
“도현아.”
“네.”
“아침부터 자꾸 사람 귀찮게 할래?”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찬물에 손을 담갔다.
손끝이 저릿했다.
얼굴을 씻고 나자 볼이 얼얼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도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겨울 아침마다 따뜻한 물을 준비해 주셨는데.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지워버렸다.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침밥은 안채에서 먹었다.
정애와 네 딸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도현은 조금 떨어진 끝자리에 앉았다.
밥상에는 무국과 김치, 멸치볶음이 놓여 있었다.
명숙이 도현을 바라보았다.
“야, 너 손 왜 그래?”
도현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이 붉게 터 있었다.
“그냥요.”
“징그럽게.”
명자가 웃었다.
“손이 꼭 할아버지 손 같아.”
명옥도 따라 웃었다.
도현은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숙은 계속 말했다.
“그렇게 공부만 하니까 손이 저 모양이지.”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첫째 명희가 말했다.
“명숙아, 밥이나 먹어.”
“언니는 왜 맨날 쟤 편이야?”
“손이 튼 게 무슨 잘못이라고 그래?”
명숙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냥 말한 건데.”
명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현의 손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국그릇을 밀어주었다.
“국 더 먹어.”
도현은 누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먹어.”
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명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동생을 따뜻하게 대하는 일이 어색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는 도현에게 쏟아지는 사랑을 질투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그 감정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명희는 점점 알게 되었다.
자신들이 미워했던 것은 도현이라는 아이가 아니라, 도현만을 특별하게 대했던 어른들의 태도였다는 것을.
그렇다고 그 사실을 동생에게 설명할 용기는 아직 없었다.
1979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도현은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다.
새 담임은 이영숙 선생님이었다.
서른을 조금 넘긴 여교사로, 아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사람이었다.
첫날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기소개를 시켰다.
“이름하고 좋아하는 것을 말해보세요.”
아이들은 차례로 일어났다.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합니다.”
“저는 딱지치기를 좋아합니다.”
교실에 웃음이 퍼졌다.
도현의 차례가 되었다.
“김도현입니다.”
“도현이는 무엇을 좋아하니?”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바카라 읽는 걸 좋아합니다.”
“어떤 바카라?”
“역사바카라이요.”
선생님은 눈을 크게 떴다.
“역사바카라?”
“네.”
“왜 역사가 좋니?”
도현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어서요.”
선생님은 미소 지었다.
“좋은 이유구나.”
도현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가 역사바카라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김씨 집안의 조상 이야기.
먼 옛날 왕족이었다는 이야기.
전쟁과 피란, 잃어버린 땅과 다시 세운 집에 관한 이야기.
도현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할아버지가 아직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카라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바카라 속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꾸짖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이영숙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 도현을 불렀다.
“도현아.”
“네.”
“잠깐 남아볼래?”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을 나갔다.
도현은 바카라가방을 든 채 교탁 앞으로 갔다.
선생님은 그의 공바카라을 펼쳤다.
“글씨가 참 반듯하구나.”
“감사합니다.”
“지난번 시험도 아주 잘 봤고.”
“네.”
선생님은 잠시 도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도현아.”
“네.”
“요즘 잠을 잘 못 자니?”
도현은 놀라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수업 시간에 가끔 피곤해 보이더구나.”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의 손등을 보았다.
붉게 튼 손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
“손이 많이 아프겠다.”
“괜찮아요.”
“집에 바르는 약은 있니?”
“네.”
거짓말이었다.
집에는 약이 있었지만 도현은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바카라상 서랍에서 작은 연고를 꺼냈다.
“이거 발라보렴.”
도현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괜찮아요.”
“왜?”
“집에 있어요.”
선생님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고를 바카라상 위에 놓았다.
“그럼 이건 선생님이 주는 선물이야.”
도현은 조심스럽게 연고를 집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부드럽게 물었다.
“도현아, 집에서는 잘 지내니?”
그 순간 도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많이 슬펐겠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네.”
“힘든 일이 있으면 선생님한테 이야기해도 돼.”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른들에게 속마음을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을 이해해 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누군가에게 말을 했다가 집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도현은 그것이 더 두려웠다.
“저 괜찮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교실을 나왔다.
이영숙은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린아이가 너무 일찍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같은 학교 2학년 교실에서는 황서윤이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 있었다.
“황서윤!”
“네!”
“수업 시간에 왜 자꾸 이야기하니?”
서윤은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말해봐.”
“미영이가 연필을 잃어버렸다고 해서요.”
“그래서?”
“제 연필을 빌려줬어요.”
“그럼 조용히 빌려주면 되잖니.”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어떤 연필이 좋은지 물어봐야 하니까요.”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도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황서윤, 앉아.”
“네!”
서윤은 씩씩하게 앉았다.
옆자리 이미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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