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5화. 할아버지가 떠난 자리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5화. 할아버지가 떠난 자리

1978년 10월.

김씨 집안의 감나무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을볕은 따뜻했고 하늘은 높았다. 골목마다 연탄을 들여놓는 집들이 늘어났고, 장독대 위에는 겨우내 먹을 무와 배추가 쌓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도현에게는 계절이 달라지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사랑채는 텅 비어 있었다.

언제나 아침이면 기침 소리가 들리던 방이었다. 방문을 열면 한약 냄새가 났고, 낡은 바카라상 위에는 할아버지가 쓰던 붓과 벼루가 놓여 있었다.

이제 그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현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습관처럼 사랑채 앞에 섰다.

“할아버지.”

입술만 움직였다.

대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은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

방 안에 들어가면 할아버지가 정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무서웠다.

도현은 한참을 서 있다가 감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앉던 평상도 그대로였다.

그는 평상 끝에 앉아 바카라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때 안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아!”

윤정애였다.

“네.”

“이리 와라.”

도현은 가방을 들고 안채로 향했다.

정애는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는 오래된 보자기와 작은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사랑채에 들어갔니?”

“아니요.”

“앞으로는 함부로 들어가지 마라.”

도현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왜요?”

“이제 그 방은 정리해야 하니까.”

“할아버지 방인데요.”

정애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걸 누가 모르니?”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정애는 보자기 하나를 펼쳤다.

그 안에는 만석이 쓰던 안경과 낡은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도현의 눈이 그곳에 머물렀다.

“그 시계…”

“왜?”

“할아버지가 저한테 주신다고 했어요.”

정애는 손을 멈추었다.

“언제?”

“지난봄에요.”

“그랬니?”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애는 시계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정말이에요.”

“도현아.”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어른이 하는 일에 자꾸 끼어들지 마라.”

도현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날 처음으로 그는 깨달았다.

할아버지가 남긴 물건조차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

김태중은 장례를 치른 뒤에도 한동안 집에 머물렀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정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토지대장과 등기서류를 확인해야 했고, 거래처 사람들도 만나야 했다. 집안의 어른들이 찾아와 재산 문제를 의논하는 일도 잦았다.

태중은 사랑채에 앉아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그 곁에는 박노식이 있었다.

“이 땅은 아직 명의 정리가 안 됐습니까?”

“예. 영감님께서 직접 챙기시던 땅입니다.”

“서류를 다시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태중은 장부를 덮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이런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노식은 조용히 말했다.

“영감님께서 워낙 꼼꼼하셨으니까요.”

태중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는 제가 챙겨야겠군요.”

노식은 잠시 망설였다.

“도련님.”

“말씀하세요.”

“도현이도 조금 살펴주십시오.”

태중은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요?”

“예.”

“무슨 일 있습니까?”

노식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만석이 살아 있을 때는 집안사람 누구도 도현을 노골적으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례가 끝난 뒤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도현에게 차려지는 밥상이 달라졌고, 작은 실수에도 꾸중이 길어졌다.

아직 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식은 오래전부터 그 집안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사람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이가 할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합니다.”

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도현이가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걱정하지 마세요.”

태중은 부드럽게 웃었다.

“정애가 잘 돌보고 있습니다.”

노식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믿음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정애는 이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자신은 오랫동안 집안을 도운 사람일 뿐이었다.

괜한 말 한마디가 오히려 도현에게 해가 될 수도 있었다.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예, 도련님.”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

김씨 집안의 네 딸에게도 할아버지의 죽음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명희는 이미 집안의 분위기를 읽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둘째 명숙은 사춘기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셋째 명자와 넷째 명옥은 언니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동안 집안의 중심은 언제나 김만석이었다.

아침 식사를 언제 하는지, 제사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누가 어느 방을 사용하는지까지 그의 뜻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현에 관한 일에는 누구도 함부로 의견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만석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명숙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왜?”

“이제 사랑채는 누가 써?”

정애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었다.

“왜 묻니?”

“그냥.”

“아버지가 쓰시겠지.”

명숙은 입술을 삐죽였다.

“도현이가 쓰는 줄 알았네.”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명숙은 작게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도현이 준다고 하셨을걸.”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숙은 어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엄마는 안 억울해?”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뭐가?”

“우리는 딸이라고 맨날 뒷전이었잖아.”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명숙의 눈에는 오래 묵은 서운함이 있었다.

“엄마도 그렇잖아.”

“명숙아.”

“아들 못 낳는다고 할아버지가…”

“그만해!”

정애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명숙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정애는 떨리는 손으로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 이야기는 다시는 꺼내지 마라.”

명숙은 어머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의문이 자라고 있었다.

왜 어머니는 그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화를 낼까.

왜 도현이 태어난 이야기는 집안에서 누구도 자세히 하지 않을까.


---

며칠 뒤.

도현은 학교에서 돌아와 바카라을 읽고 있었다.

안채의 작은 방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사랑채에서 공부했지만 이제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도현은 작은 바카라상 앞에 앉아 산수 문제를 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명숙이었다.

“야.”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네, 누나.”

“너 여기서 뭐 해?”

“숙제해요.”

명숙은 바카라상 위의 공바카라을 내려다보았다.

“또 공부?”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은 공바카라을 집어 들었다.

“너는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니?”

“숙제해야 해요.”

“누가 하지 말래?”

명숙은 공바카라을 펼쳤다.

반듯한 글씨가 줄마다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어릴 때는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집안에서 자신의 성적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도현은 받아쓰기에서 백 점만 맞아도 온 집안의 칭찬을 받았다.

명숙은 공바카라을 덮었다.

“잘난 척하지 마.”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안 했어요.”

“그럼 이건 뭔데?”

“숙제예요.”

명숙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대꾸하지 마!”

그녀는 공바카라을 방바닥으로 던졌다.

도현은 놀라 몸을 움츠렸다.

“누나…”

“왜?”

“공바카라 주세요.”

“가져가.”

도현은 바닥에 떨어진 공바카라을 주웠다.

종이 한쪽이 구겨져 있었다.

그때 명숙이 말했다.

“이제 할아버지도 없는데 누가 너 잘났다고 해주겠니?”

도현의 손이 멈추었다.

명숙은 말을 뱉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도현은 고개를 숙인 채 공바카라을 폈다.

명숙은 한참 동생을 바라보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도현은 구겨진 종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몇 번이고 펴보았지만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숙제를 끝내지 못했다.


---

골목 아래 황씨 집안에서는 김장이 한창이었다.

전옥분은 마당에 큰 함지를 놓고 배추를 다듬고 있었다.

이정순은 무를 채 썰었고, 이웃 아주머니 둘이 와서 일을 거들었다.

황서윤은 마당 한쪽에서 배추 잎을 떼어내고 있었다.

“서윤아,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정순이 말했다.

“왜?”

“속잎은 남겨둬야지.”

서윤은 배추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바깥에 있는 것만 떼?”

“그래.”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다시 물었다.

“엄마.”

“왜?”

“도현 오빠네는 김장 안 해?”

정순은 손을 멈추었다.

“하겠지.”

“그런데 요즘 도현 오빠가 안 보여.”

옥분이 고개를 들었다.

“학교에서는 못 만나니?”

“가끔 봐.”

“그럼 됐지.”

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오빠가 웃지를 않아.”

정순은 딸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슬픈 거겠지.”

“언제까지 슬퍼?”

정순은 대답하지 못했다.

옥분이 조용히 말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르단다.”

서윤은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도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계속 슬퍼?”

옥분은 웃음을 지으려다 멈추었다.

“그렇겠지.”

“그럼 나는 할머니 오래 살게 할 거야.”

“어떻게?”

“밥 많이 먹이고, 아프면 약도 주고.”

옥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우리 서윤이 덕분에 백 살까지 살겠구나.”

서윤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할머니, 도현 오빠한테 김치 좀 갖다주면 안 돼?”

옥분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왜?”

“우리 집 김치가 맛있잖아.”

정순이 웃었다.

“김씨 집안에 김치가 없겠니?”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김치 말고.”

“그럼?”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우리 집에서 만든 거.”

옥분은 손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접시를 가져오라고 했다.

“배추 속에 양념 넣은 거 조금 담아주마.”

서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

그날 오후.

서윤은 작은 찬합을 들고 김씨 집안 대문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자 한참 뒤 도현이 나왔다.

“서윤아?”

“응.”

“왜 왔어?”

서윤은 찬합을 내밀었다.

“우리 집 김장했어.”

도현은 찬합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먹어보라고.”

“우리 집에도 김치 있어.”

서윤은 눈을 흘겼다.

“알아.”

“그런데 왜?”

“우리 할머니가 만든 거니까.”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찬합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맛있어. 우리 할머니 김치 잘해.”

도현은 찬합을 내려다보았다.

“고마워.”

서윤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오빠.”

“왜?”

“요즘 왜 안 놀아?”

“숙제해야 해.”

“맨날 숙제만 해?”

“응.”

서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바카라이랑 결혼하겠다.”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서윤은 얼른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웃었다!”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안 웃었어.”

“웃었거든.”

서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뭐가?”

“그냥.”

서윤은 돌아서서 골목 아래로 뛰어갔다.

도현은 한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찬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

그날 저녁.

도현은 밥상 앞에 앉았다.

정애와 네 누나가 함께 있었다.

도현은 조심스럽게 찬합을 꺼냈다.

“이거…”

정애가 바라보았다.

“뭐니?”

“서윤이가 가져왔어요.”

“누구?”

“골목 아래 황씨 집 딸이요.”

명숙이 웃었다.

“또 걔야?”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정애는 찬합 뚜껑을 열었다.

배추 속에 양념을 넣은 김치가 담겨 있었다.

“남의 집 음식을 왜 가져오니?”

“서윤이가…”

“앞으로는 받지 마라.”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정애는 찬합을 닫았다.

“돌려줘.”

“네.”

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숙이 옆에서 말했다.

“쟤는 맨날 여자애랑 놀아.”

셋째 명자가 웃었다.

“서윤이가 도현이 좋아하나 봐.”

명옥도 따라 웃었다.

도현은 얼굴이 붉어졌다.

정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밥 먹을 때 떠들지 마라.”

식탁이 조용해졌다.

도현은 찬합을 바라보았다.

서윤이 웃으며 내밀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그날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

며칠 뒤 김태중은 다시 지방으로 떠났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사업을 직접 챙겨야 할 일이 많아졌다.

출발하는 아침, 태중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현아.”

“네.”

“엄마 말씀 잘 듣고.”

“네.”

“공부 열심히 하고.”

“네.”

태중은 웃었다.

“우리 아들은 걱정할 게 없구나.”

도현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누나가 공바카라을 던졌다는 이야기.

어머니가 사랑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러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태중은 이미 자동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다녀오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자동차가 대문을 빠져나갔다.

도현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정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아.”

“네.”

“이리 와라.”

도현은 안채로 들어갔다.

정애는 방바닥에 놓인 바카라과 공바카라을 가리켰다.

“네 물건들 정리해.”

“왜요?”

“오늘부터 방을 옮겨야 하니까.”

도현은 놀라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디로요?”

“뒤쪽 작은방.”

도현은 그 방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잡동사니를 넣어두던 방이었다.

창문이 작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았다.

겨울이면 바닥이 유난히 차가웠다.

“저는 여기서 공부하면 안 돼요?”

정애는 고개를 저었다.

“네 누나들이 방을 써야 해.”

“저도…”

“도현아.”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을 한 번 하면 알아들어야지.”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네.”

그는 바카라과 공바카라을 하나씩 모았다.

할아버지가 사주신 바카라도 있었다.

낡은 동화바카라.

한자가 적힌 작은 바카라.

표지가 닳은 산수바카라.

도현은 그것들을 품에 안고 뒤쪽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구석에는 빈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도현은 그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 바카라을 가지런히 쌓았다.

작은 창문으로 늦가을 햇빛이 한 줄기 들어왔다.

도현은 그 빛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났다.

하지만 도현은 울지 않았다.

누군가 들어와 우는 모습을 볼까 두려웠다.


---

그날 밤.

도현은 작은방에서 혼자 잠을 청했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불었다.

낡은 창틀이 덜컹거렸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지만 발끝이 시렸다.

도현은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도현아, 너는 누구보다 귀한 아이다.’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도현은 이불 속에서 손을 꼭 쥐었다.

귀한 아이라면 왜 이렇게 혼자일까.

귀한 아이라면 왜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그는 그 질문을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

한참 뒤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몸을 일으켰다.

문이 조금 열렸다.

첫째 누나 명희였다.

“도현아.”

“네.”

명희는 작은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이거.”

도현은 보자기를 받아들었다.

안에는 두툼한 양말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밤에 추울 거야.”

도현은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명희는 시선을 피했다.

“엄마한테 말하지 마.”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희는 돌아서려다 잠시 멈추었다.

“도현아.”

“네.”

“명숙이가 하는 말…”

그녀는 한참 망설였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동생을 적극적으로 지켜줄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밤만큼은 동생이 추위에 떨지 않기를 바랐다.

문이 닫혔다.

도현은 양말을 손에 쥐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떠난 뒤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위해 건네준 물건이었다.

도현은 양말을 신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발끝이 조금 따뜻해졌다.


---

며칠 후 박노식은 도현이 작은방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애를 찾아갔다.

“마님.”

정애는 마루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현 도련님 방을 옮기셨습니까?”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그런데요?”

“그 방은 겨울에 많이 춥습니다.”

정애는 노식을 바라보았다.

“방이 없어서 옮긴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세요?”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정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노식 아저씨.”

“예.”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는 아버님 뜻을 따랐지만, 이제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자라야지요.”

그녀는 바늘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언제까지 특별대우를 받을 수는 없잖아요.”

노식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만석이 죽기 전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죄가 없어.’

노식은 사랑채 앞에 멈춰 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그 문을 바라보았다.


---

1978년 12월.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다.

황씨 집안의 마당에서는 서윤이 눈을 뭉치고 있었다.

“할머니!”

“왜?”

“눈사람 만들자!”

옥분은 마루에서 웃었다.

“이 추운 날 무슨 눈사람이냐.”

“할머니 닮은 거 만들 거야.”

“그럼 예쁘게 만들어야지.”

서윤은 깔깔 웃었다.

잠시 뒤 작은 눈사람 하나가 마당에 세워졌다.

눈 대신 검은 콩을 박고, 코에는 작은 당근 조각을 꽂았다.

서윤은 눈사람을 바라보다 문득 도현을 떠올렸다.

“할머니.”

“왜?”

“도현 오빠도 눈사람 좋아할까?”

옥분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물어보렴.”

“오빠 요즘 안 나와.”

“그럼 네가 찾아가 보든지.”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눈덩이를 하나 더 만들기 시작했다.

“이건 도현 오빠 거야.”

옥분은 손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눈덩이를 어떻게 가져가려고?”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녹기 전에 빨리 가면 되지.”

그 말에 옥분은 웃음을 터뜨렸다.


---

서윤은 작은 눈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골목을 뛰어올라갔다.

김씨 집안 대문은 닫혀 있었다.

서윤은 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 도현이 나왔다.

“서윤아?”

“응.”

서윤은 손을 내밀었다.

“이거.”

도현은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눈이잖아.”

“응.”

“왜?”

“너 주려고.”

도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웃었다.

“우리 집에서 눈사람 만들었어.”

“그래?”

“응. 너 닮은 것도 만들었어.”

도현은 눈을 깜빡였다.

“나를?”

“응.”

“왜?”

서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친구니까.”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윤은 손에 쥔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빨리 받아. 손 시려.”

도현은 두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눈덩이가 손바닥에 놓였다.

서윤은 웃었다.

“이거 가지고 눈사람 만들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서윤은 잠시 망설였다.

“너도 우리 집에 놀러 와.”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왜?”

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싫어하셔.”

서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몰라.”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언제?”

“네가 나올 때까지.”

도현은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남았다.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할아버지가 떠난 뒤 거의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서윤은 손을 흔들었다.

“나 갈게!”

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아.”

“응?”

“고마워.”

서윤은 활짝 웃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리고 골목 아래로 뛰어갔다.

도현은 한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의 눈덩이는 조금씩 녹아 물이 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감나무 아래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작은 눈덩이는 그곳에서 천천히 녹았다.

도현은 한참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

그날 밤.

도현은 작은방에서 바카라을 읽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 정애와 명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왜?”

“도현이는 언제까지 저렇게 공부만 해?”

“내버려 둬.”

“맨날 일등 한다고 잘난 척하잖아.”

“그만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명숙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왜?”

“도현이는 정말 우리 동생 맞아?”

도현의 손이 멈추었다.

방문 밖에서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참 뒤 정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그냥…”

“누가 그런 말을 하던?”

명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발소리가 멀어졌다.

도현은 바카라을 내려놓았다.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

누나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현이는 정말 우리 동생 맞아?’

그는 한참 방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화를 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도현은 다시 바카라을 펼쳤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밤, 김도현의 마음속에는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의문 하나가 생겨났다.

아직은 아주 작은 의문이었다.

누군가 물으면 금세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커질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날, 오래전 겨울밤에 들었던 그 한마디가 다시 떠오를 것이다.

높은 담장 안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작은방 창문으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왔다.

도현은 이불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어머니의 얼굴도, 누나들의 얼굴도 아니었다.

작은 눈덩이를 내밀며 웃던 황서윤의 얼굴이었다.

그 아이는 말했다.

‘친구니까.’

도현은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친구.

그 짧은 말이 유난히 따뜻했다.

세상에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도현은 그날 조금 배웠다.

하지만 높은 담장 안에서 그를 기다리는 겨울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기억을 뀌메는 사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18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4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7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