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도 규칙이 필요할까

휴대전화를 찾았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4화. 우리 사이에도 규칙이 필요할까

아침 6시 47분.

윤해원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찾았다.

어젯밤 강태헌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조금이 자꾸 커졌으면 좋겠다.’

해원은 다시 읽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렸다.

“욕심은.”

그런데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조금’이라는 말을 자신이 먼저 꺼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나도 조금.

보고 싶다고.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확히 10초 뒤 다시 들었다.

‘일어났어?’

보내려다가 지웠다.

먼저 연락하면 너무 기다린 것 같았다.

다시 썼다.

‘출근했어?’

또 지웠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태헌.

해원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최대한 무심하게 했다.

“왜.”

“일어났어?”

“응.”

“잘 잤어?”

“응.”

“나는?”

“네가 잘 잤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태헌이 웃었다.

“안 물어봐?”

“뭘.”

“잘 잤냐고.”

“잘 잤어?”

“응.”

“됐지?”

“아니.”

“또 뭐.”

“보고 싶어.”

해원이 눈을 감았다.

요즘 이 남자는 너무 쉽게 말한다.

보고 싶다.

좋다.

예쁘다.

젊었을 때는 그런 말을 많이 하는 남자가 가벼워 보였다.

그런데 태헌은 이상했다.

말은 쉽게 하는데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다가올 때는 허락을 구했고,

해원이 한 걸음 물러나면 멈췄다.

그게 좋았다.

“어제 봤잖아.”

“그건 어제고.”

“우리 매일 봐야 돼?”

태헌이 잠시 조용해졌다.

“싫어?”

“그게 아니라.”

“그럼?”

해원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아침 공기가 들어왔다.

“연애한다고 맨날 붙어 있는 건 싫어.”

“알아.”

“각자 할 일도 있고.”

“응.”

“친구도 만나야 하고.”

“응.”

“혼자 있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

태헌이 웃었다.

“윤해원.”

“왜.”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해원이 입을 다물었다.

맞았다.

태헌은 그저 보고 싶다고 했을 뿐이다.

“미리 말하는 거야.”

“뭘 그렇게 미리 겁먹어.”

“겁먹은 거 아니야.”

“맞아.”

“아니거든.”

“알았어.”

태헌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나도 네 생활 뺏을 생각 없어.”

그 말에 해원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정말?”

“응.”

“매일 만나자고 안 할 거야?”

“응.”

“연락 늦게 받아도 뭐라고 안 하고?”

“노력해 볼게.”

해원이 웃었다.

“왜 그건 확답을 못 해?”

“보고 싶은 건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

“그래도 참아.”

“싫은데.”

“한 살 어린 티 내지 마.”

“연애할 때는 좀 내도 되잖아.”

해원이 웃었다.

“그럼 규칙 만들까?”

“무슨 규칙?”

“우리 연애 규칙.”

태헌이 크게 웃었다.

“연애에도 규칙이 있어?”

“있어야지.”

“말해봐.”

해원이 손가락을 하나 폈다.

“첫째. 연락 안 된다고 계속 전화하지 않기.”

“잠깐.”

“왜?”

“몇 번부터 계속이야?”

“두 번.”

“너무 적은데.”

“그럼 세 번.”

“다섯 번.”

“세 번.”

“네 번.”

“강태헌.”

“알았어. 세 번.”

해원은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둘째. 각자 여행 가고 싶으면 간섭하지 않기.”

태헌이 잠시 조용해졌다.

“혼자?”

“혼자 갈 수도 있고 친구랑 갈 수도 있고.”

“남자랑도?”

해원이 웃었다.

“왜? 벌써 질투해?”

“규칙 다시 만들자.”

“싫어.”

“그건 중요한데.”

“그럼 너는 여자랑 여행 못 가?”

“난 안 가.”

“왜?”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해원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태헌이 말했다.

“그리고 나도 네가 다른 남자랑 단둘이 여행 가는 건 싫어.”

목소리는 차분했다.

금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자기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해원은 잠시 생각했다.

“알았어.”

“뭐가?”

“나도 안 갈게.”

“진짜?”

“응.”

태헌이 웃었다.

“연애 좋네.”

“뭐가 좋아.”

“윤해원이 나 때문에 뭘 하나 포기해 주잖아.”

해원이 바로 말했다.

“포기 아니야.”

“그럼?”

“선택이지.”

태헌이 조용해졌다.

해원이 덧붙였다.

“내가 선택한 거야.”

잠시 후 태헌이 낮게 말했다.

“그 말 좋다.”

해원도 웃었다.

사랑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생각하면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다고 생각하면 달랐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혹은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내가 기꺼이 고르는 것.

그게 지금의 해원에게는 더 맞았다.

“셋째.”

해원이 말했다.

“싸우고 잠수 타지 않기.”

이번에는 태헌이 바로 말했다.

“그건 무조건.”

“화나도?”

“응.”

“진짜 보기 싫어도?”

“그럴수록 얘기해야지.”

해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태헌이 물었다.

“왜?”

“그냥.”

“또 그냥.”

해원은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예전에는 싸우면 말을 안 했어.”

“왜?”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혼자 정리했어?”

“응.”

“사람도?”

해원의 손이 멈췄다.

“응.”

태헌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나한테는 그러지 마.”

해원의 가슴이 묘하게 저렸다.

“어떻게.”

“혼자 끝내지 마.”

태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한테 화나면 욕을 해도 되고.”

“욕해도 돼?”

“적당히.”

해원이 웃었다.

“싫으면 싫다고 하고.”

“응.”

“그만 만나고 싶으면 그것도 말해.”

해원의 웃음이 사라졌다.

태헌은 계속 말했다.

“근데 혼자 마음 정리하고 어느 날 없어지지는 마.”

그 말에는 장난이 없었다.

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어쩌면 헤어짐 자체가 아닐지도 몰랐다.

아무 설명 없이 혼자 남겨지는 것.

어제까지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

그런 경험은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흉터가 되었다.

“알았어.”

해원이 말했다.

“약속?”

“응.”

“말로 해.”

해원이 피식 웃었다.

“약속.”

태헌이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리고 넷째.”

“또 있어?”

“많아.”

“계약서 쓰자 그냥.”

“쓸까?”

“공증도 받아.”

둘이 동시에 웃었다.

“넷째는 뭔데?”

“아프면 말하기.”

태헌이 조용해졌다.

해원이 말했다.

“너도.”

“나는 잘 말해.”

“거짓말.”

“왜?”

“남자는 더 안 하더라.”

“그건 남자마다 다르지.”

“어쨌든 아프면 말해.”

“알았어.”

“힘들어도.”

“응.”

“외로워도.”

태헌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것도 말해야 해?”

“응.”

“왜?”

해원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가 가줄 수도 있잖아.”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해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꼭 간다는 건 아니고.”

태헌이 낮게 웃었다.

“늦었어.”

“뭐가.”

“이미 들었어.”

“잊어.”

“싫어.”

“강태헌.”

“외로우면 말할게.”

“말하지 마.”

“윤해원이 온다며.”

“안 가.”

“가줄 수도 있다며.”

“취소.”

“취소 안 돼.”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태헌은 일을 했고,

해원도 자신의 하루를 살았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모든 시간을 서로에게 주지는 않았다.

오후 두 시쯤.

태헌에게 메시지가 왔다.

‘뭐 해?’

해원은 한 시간 뒤에 봤다.

예전 같으면 늦게 봤다는 설명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답했다.

‘일해.’

‘바빠?’

‘응.’

‘끝나고 연락해.’

그게 전부였다.

왜 이제 봤어.

누구랑 있었어.

왜 답이 없어.

그런 말은 없었다.

해원은 그 짧은 대화를 한참 바라봤다.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시간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자유를 주면서도 마음은 놓치지 않는 것.

어쩌면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일이 끝났다.

해원은 차에 올라타며 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받지 않았다.

두 번.

받지 않았다.

해원은 세 번째 전화를 걸려다가 멈췄다.

아침에 만든 규칙이 떠올랐다.

연락 안 된다고 계속 전화하지 않기.

세 번까지.

“두 번 했으니까.”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했다.

태헌은 평소 전화를 잘 받았다.

10분.

20분.

30분.

연락이 없었다.

해원은 운전하면서 자꾸 휴대전화를 봤다.

“별일 없겠지.”

한 시간이 지났다.

집에 도착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해원은 결국 세 번째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지 않았다.

해원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침에는 연애에도 규칙이 필요하다며 웃었다.

그런데 막상 연락이 닿지 않자 규칙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해원은 메시지를 보냈다.

‘태헌아.’

답이 없었다.

다시.

‘어디야?’

여전히 읽지 않았다.

해원은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다.

10시 58분.

11시 07분.

11시 16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태헌.

해원은 거의 낚아채듯 받았다.

“야!”

전화기 넘어가 잠시 조용했다.

“해원아.”

목소리가 이상했다.

해원의 표정이 굳었다.

“너 어디야?”

“병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

“놀라지 마.”

“무슨 일이야?”

태헌이 잠시 숨을 골랐다.

“사고가 좀 났어.”

해원은 그대로 굳었다.

“어디 병원인데?”

“괜찮아. 크게 안 다쳤어.”

“어디냐고.”

태헌이 병원 이름을 말했다.

해원은 이미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고 있었다.

“해원아.”

“왜.”

“지금 오려고?”

“응.”

“늦었어.”

“그래서?”

“내일 와.”

해원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아까 우리 규칙 만들었지?”

“응.”

“아프면 말하기.”

“응.”

“힘들면 말하기.”

“응.”

해원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외로우면 내가 가줄 수도 있다고 했잖아.”

태헌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원이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그냥 갈게.”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해원은 알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보고 싶어서 달려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아프다는 한마디에

내 하루의 방향이 아무 망설임 없이 바뀌는 것.

몇 년 전 제주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윤해원에게 강태헌이 달려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해원이 가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자신보다 한 살 어린,

그러나 어느새 너무 소중해져 버린 사람에게.

2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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