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7화. 침묵에도 상처가 남는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7화. 침묵에도 상처가 남는다


1979년 6월.


서울의 여름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큰길에는 시내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고, 논밭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 벽돌집이 하나둘 들어섰다. 마을 어귀 전파사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왔고,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연속극을 보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씨 집안의 높은 돌담 안에서는 오래된 질서가 여전히 사람들의 삶을 붙잡고 있었다.


아들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귀하게 태어난 아이.


딸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나누어 받아야 했던 네 자매.


그리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자신의 자리를 의심받았던 여자.


그들은 한집에 살았지만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김도현은 아침부터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오른쪽 뺨에 남은 붉은 자국 때문이었다.


며칠 전 깨진 찻잔을 두고 어머니 윤정애에게 맞았던 자리였다.


자국은 거의 사라졌지만 손으로 누르면 아직 조금 아팠다.


도현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첫째 누나 명희였다.


“도현아.”


“네.”


명희는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 아프니?”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말?”


“네.”


명희는 한참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찻잔을 깨뜨린 사람이 도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숙이 동생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도.


그러나 그날 명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분노가 두려웠고, 명숙과 다투는 것도 지겨웠다.


무엇보다 집안의 오래된 갈등에 다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명희는 그날 이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현아.”


“네.”


“그날 일은…”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명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안 그랬다는 거 알아.”


도현의 눈이 커졌다.


“누나도 알아요?”


명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현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명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아팠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


명희는 스스로에게도 그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집안일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도현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다는 것.


그것은 뺨을 맞았던 일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명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명희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정말 괜찮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명희는 처음으로 동생이 자신들과 얼마나 멀어졌는지 느꼈다.


그날 아침 김씨 집안의 식탁은 조용했다.


정애는 밥을 먹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명숙은 새로 산 머리핀을 만지작거렸고, 명자는 학교 친구에게 빌린 잡지를 읽고 있었다.


명옥은 도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막내 명옥은 요즘 들어 동생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찻잔을 깨뜨린 사람이 명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명옥은 밤마다 같은 장면을 떠올렸다.


마루에 떨어져 깨진 찻잔.


명숙이 놀라 주위를 살피던 모습.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도현이 어머니에게 뺨을 맞던 순간.


명옥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엄마.”


정애가 고개를 들었다.


“왜?”


명옥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에요.”


명숙이 옆에서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해.”


명옥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녀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집에서는 누구나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늘 가장 약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학교에 도착한 도현은 평소처럼 교실 맨 앞줄에 앉았다.


이영숙 선생님은 그날 국어 시간에 글짓기 숙제를 내주었다.


주제는 ‘우리 가족’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공바카라을 펼쳤다.


아버지가 장난감을 사주었다는 이야기.


어머니가 도시락에 달걀말이를 넣어주었다는 이야기.


형과 싸웠다가 화해했다는 이야기.


교실에는 연필 긁는 소리가 가득했다.


도현은 공바카라을 펼쳐놓고 한참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우리 가족.


그는 그 네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라면 쓸 이야기가 많았다.


감나무 아래에서 바카라을 읽던 일.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던 일.


옛날이야기를 듣다가 잠들던 일.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버지는 늘 집에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표정이 굳었다.


누나들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웃었고, 자신이 나타나면 말소리를 낮추었다.


도현은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습니다.’


잠시 멈추었다.


‘감나무는 봄이면 잎이 나고 가을이면 감이 열립니다.’


또 한참을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그 감나무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다음 문장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서는 체육 수업을 하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공바카라에 적었다.


‘우리 집 감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이영숙은 아이들의 공바카라을 걷어 읽었다.


대부분 가족과 함께한 즐거운 추억이었다.


그러나 도현의 글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우리 집 감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영숙은 한참 공바카라을 내려다보았다.


도현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말을 잘 듣고, 숙제를 빠뜨리지 않고, 친구들과 크게 다투는 일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때때로 자신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글로 쓴다는 사실을.


그날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은 도현을 불렀다.


“도현아.”


“네.”


“글 잘 읽었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나무가 참 오래됐나 보구나.”


“네.”


“할아버지가 심으셨어?”


“증조할아버지가 심으셨대요.”


“그렇구나.”


선생님은 잠시 망설였다.


“도현아,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니?”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서는 누구랑 이야기를 많이 하니?”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뒤 도현이 말했다.


“바카라이랑요.”


이영숙은 순간 말을 잃었다.


“바카라이랑?”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카라을 읽으면 다른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요.”


선생님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너무 어른스러워서 마음이 아팠다.


“도현아.”


“네.”


“사람은 혼자서 모든 걸 견딜 필요는 없어.”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혼자 견디지 않으면 누가 대신 견뎌준다는 것일까.


도현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같은 시각.


황서윤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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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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