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높은 담장 안의 아이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2화. 높은 담장 안의 아이
1976년 봄.
서울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도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골목길이 녹으면서 흙탕물이 고였다. 집집마다 두꺼운 솜이불을 햇볕에 내다 널었고, 어머니들은 겨울옷을 털어 장롱 깊숙이 넣었다.
큰길에는 버스와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멀쩡하던 논밭에 공장이 들어섰고, 오래된 초가집들은 하나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김씨 집안의 높은 돌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 집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 김도현은 여섯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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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아.”
사랑채에서 할아버지 김만석이 불렀다.
“네, 할아버지.”
도현은 들고 있던 바카라을 덮고 달려갔다.
만석은 손자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읽었느냐?”
“어제 주신 바카라 다 읽었어요.”
“벌써?”
“네.”
만석은 바카라을 펼쳤다.
“그럼 이 글자가 무슨 뜻인지 말해 보아라.”
도현은 잠시 바라보더니 또박또박 대답했다.
만석은 무릎을 쳤다.
“허허, 우리 집안에 인물이 났구나.”
그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앞으로 큰사람이 되어야 한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집안의 이름을 빛내야지.”
“네.”
만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도현은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여섯 살 아이에게 집안의 이름이란 너무 크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저 할아버지가 웃으면 좋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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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은 김씨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집안 어른들은 그를 귀하게 여겼다.
명절이면 가장 좋은 옷을 입혔고, 친척들이 찾아오면 도현을 불러 인사를 시켰다.
“우리 집안 장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만석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어머니 윤정애는 도현을 볼 때마다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네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현이 태어난 뒤 집안의 관심은 모두 그에게 쏠렸다.
딸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칭찬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도현이 글자 하나를 읽으면 집안이 떠들썩했다.
그 불공평함은 어린 누나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상처는 조금씩 도현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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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였다.
도현은 마루 끝에 앉아 바카라을 읽고 있었다.
둘째 누나 명숙이 다가왔다.
“야, 김도현.”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응?”
“너는 좋겠다.”
“뭐가?”
“아들이라서.”
도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명숙은 비웃듯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귀한 대접을 받잖아.”
“나도 공부해.”
“그게 공부야?”
명숙은 도현의 손에서 바카라을 빼앗았다.
“이런 거 읽는다고 잘난 척하지 마.”
도현은 손을 내밀었다.
“누나, 돌려줘.”
“싫어.”
“할아버지가 주신 거야.”
그 말에 명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 할아버지야?”
그녀는 바카라을 마당에 던졌다.
바카라장이 흙바닥에 펼쳐졌다.
도현은 얼른 내려가 바카라을 주웠다.
명숙은 그런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곧 돌아섰다.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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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아버지 김태중이 집에 돌아왔다.
태중은 지방에서 며칠 동안 일을 보고 온 참이었다.
도현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태중은 아들을 번쩍 안아 올렸다.
“우리 도현이, 많이 컸구나.”
도현은 웃었다.
“아버지, 언제 또 가세요?”
“며칠 있다 가야지.”
“오래 계시면 안 돼요?”
태중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야 우리 도현이가 공부도 하고 좋은 옷도 입지.”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돈 안 벌어도 되는데.”
태중은 웃었다.
“허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냥 집에 계시면 안 돼요?”
태중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 아버지가 보고 싶었구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태중은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정애는 남편 앞에서 도현의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많이 먹어라.”
도현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듣기 어려운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이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매일 집에 계시면 좋겠다.
그러면 어머니도 자신에게 웃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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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아래 황씨 집안은 늘 시끌벅적했다.
황서윤은 여섯 살이 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아침이면 친구들을 찾아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박혜진, 이미영, 최성복.
아이들은 골목을 놀이터 삼아 하루를 보냈다.
비석치기를 하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돌멩이를 주워 공기놀이를 했다.
서윤은 놀이를 시작하면 언제나 앞장섰다.
“야, 이번에는 내가 술래야!”
성복이 투덜거렸다.
“너는 맨날 네 마음대로 해.”
서윤은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럼 네가 해!”
“진짜?”
“응. 대신 잘해야 해.”
아이들은 한바탕 웃었다.
서윤은 누구와도 쉽게 친해졌다.
그러나 불공평한 일은 참지 못했다.
힘센 아이가 약한 아이를 괴롭히면 반드시 끼어들었다.
“야! 그만해!”
“네가 뭔데?”
“친구잖아!”
그 말에 상대가 주춤하면 서윤은 더욱 당당해졌다.
작은 몸집에 동그란 얼굴.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성격만큼은 누구보다 야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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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윤은 골목 위쪽에서 도현을 만났다.
도현은 혼자 담장 아래 앉아 있었다.
손에는 바카라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서윤은 반갑게 다가갔다.
“도현 오빠!”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
“뭐 해?”
“바카라 읽어.”
“무슨 바카라?”
도현은 바카라 표지를 보여주었다.
서윤은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재미없겠다.”
“재미있어.”
“그럼 나도 읽어줘.”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바카라을 펼쳤다.
서윤은 그의 옆에 앉았다.
도현이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만히 듣던 서윤이 곧 질문을 쏟아냈다.
“그 사람은 왜 거기 갔어?”
“그건 뒤에 나와.”
“그럼 나쁜 사람이야?”
“아직 몰라.”
“근데 왜 도망가?”
도현은 바카라을 덮었다.
“너는 질문이 너무 많아.”
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궁금하니까 물어보지.”
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서윤은 까르르 웃었다.
“오빠는 맨날 화난 사람 같아.”
“나 화 안 났어.”
“그럼 웃어봐.”
“싫어.”
“한 번만.”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서윤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웃으면 더 잘생겼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도현의 귀가 붉어졌다.
서윤은 그 모습을 보고 또 웃었다.
도현은 어쩔 수 없이 입가를 조금 움직였다.
그날 두 아이는 해가 기울 때까지 담장 아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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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서윤은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 전옥분이 마당에서 콩을 고르고 있었다.
“할머니!”
“왜 그러냐?”
“김도현 오빠는 왜 맨날 혼자 있어?”
옥분은 손을 멈추었다.
“그 애를 또 만났느냐?”
“응.”
“뭐 하고 놀았어?”
“바카라 읽었어.”
“바카라?”
“응. 근데 재미없었어.”
옥분은 웃었다.
“그럼 왜 같이 있었어?”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냥.”
“그냥?”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옥분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서윤아.”
“응?”
“세상에는 혼자 있는 게 좋아서 혼자 있는 사람도 있지만, 함께 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단다.”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옥분은 잠시 생각했다.
“마음이 아파서 그럴 수도 있지.”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같이 놀아주면 안 아파?”
옥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은 덜 아프겠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도 놀아줘야겠다.”
옥분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걱정이 남아 있었다.
김씨 집안은 오래전부터 말이 많은 집이었다.
높은 담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옥분은 세상을 오래 살아온 사람이었다.
겉으로 번듯한 집이라고 그 안까지 평안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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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김만석은 감기에 걸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기침이 오래갔고, 밤이면 숨이 차올랐다.
의원이 몇 차례 다녀갔다.
만석은 손자를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도현아.”
“네, 할아버지.”
“이리 와 앉아라.”
도현은 할아버지 곁에 앉았다.
만석은 손자의 작은 손을 잡았다.
“너는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네.”
“누구에게도 지지 말고.”
“네.”
“그리고…”
만석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노인은 손자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사람을 너무 믿지는 마라.”
도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만석은 다시 말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서도 안 된다.”
도현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섯 살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만은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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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김만석은 박노식을 불렀다.
“노식이.”
“예, 영감님.”
“도현이가 잘 자라고 있는가?”
노식은 잠시 망설였다.
“총명한 아이입니다.”
“그건 나도 아네.”
만석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야.”
노식은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가 행복한가?”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노식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만석은 그 침묵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 아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구먼.”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문을 잇겠다고…”
만석은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앞에 오래전 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연화.
아이를 낳고 울던 젊은 여자.
품에서 아기를 빼앗기던 날, 마지막으로 아이의 얼굴을 보여달라고 애원하던 여자.
만석은 눈을 감았다.
“그 여자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노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영감님…”
“연화 말일세.”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만석은 한참 침묵했다.
“그 아이가 언젠가 제 어미를 찾겠다고 하면…”
노식은 숨을 죽였다.
“그때는 어찌해야 할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밖에서는 겨울바람이 불었다.
오래된 감나무 가지가 창문을 스쳤다.
만석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가문의 비밀이 훗날 손자의 인생을 얼마나 깊이 흔들어 놓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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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도현은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만석은 누운 채 손자를 바라보았다.
“왔느냐.”
도현은 작은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바카라 읽어드릴까요?”
만석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도현은 바카라을 펼쳤다.
그리고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만석은 손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만큼은 가문도, 재산도, 오래된 족보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곁에서 바카라을 읽어주는 어린 손자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사람은 때로 가장 소중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날 이후 김만석의 병세는 조금씩 깊어졌다.
그리고 두 해 뒤, 도현이 여덟 살이 되던 해.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도현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던 마지막 울타리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높은 담장 안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은 1976년 겨울이었다.
김도현은 여섯 살이었다.
황서윤도 여섯 살이었다.
두 아이는 여전히 같은 골목에서 자라고 있었다.
서로의 집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 채.
감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