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화. 아들을 얻은 집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화. 아들을 얻은 집



1970년 1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서울의 변두리 마을에는 밤새 눈이 내렸다. 새벽이면 집집마다 연탄불을 살리느라 부산했고, 굴뚝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골목길은 얼어붙었다.

아이들은 양동이를 들고 공동수도 앞으로 모여들었고, 어른들은 미끄러운 비탈길에 연탄재를 뿌렸다.

나라에서는 잘살아 보자는 구호가 연일 흘러나왔지만, 사람들의 살림은 아직 넉넉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공장으로 떠났고, 누군가는 논밭을 팔아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전쟁이 끝난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의 상처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런 마을에 유난히 큰 기와집이 하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김 참봉 댁이라고 불렀다.

검은 대문과 높은 돌담.

안채와 사랑채, 별채까지 갖춘 넓은 집이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서 있었다.

겨울이 되면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지만,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집안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라 왕실의 후예라고 믿었다.

집안 어른들은 대대로 내려온 족보를 귀하게 여겼고, 제삿날이면 조상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불렀다.

그 혈통이 실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누구도 분명하게 증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 씨 집안에서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가문이란 재산보다 귀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반드시 아들의 몫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한 아이의 운명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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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석은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땅을 사들이며 재산을 모았고,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면서도 집안의 기반을 지켜냈다고 자부했다.

그에게는 외아들 김태중이 있었다.

태중은 아버지와 달리 말수가 적고 온순한 성품이었다.

집안의 사업과 토지 관리에 관여했지만, 지방에 내려가거나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많아 집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다.

그의 아내 윤정애는 네 딸을 낳았다.

첫째 명희.

둘째 명숙.

셋째 명자.

넷째 명옥.

딸들은 저마다 총명했고 건강했다.

그러나 만석은 손녀가 태어날 때마다 웃지 않았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는 다음을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운이 없었다고 했다.

셋째가 태어났을 때는 며느리에게 한숨을 쉬었다.

넷째가 태어났을 때는 사흘 동안 안채에 들지 않았다.

그 집안에서 딸 넷은 기쁨이 아니라 아들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처럼 취급되었다.

정애는 그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자신의 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아버지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용기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원에게서 더는 아이를 낳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밤 정애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어요?”

태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딸이 넷이나 있잖아요.”

“아버지 뜻을 알잖소.”

“딸들은 자식이 아닙니까?”

태중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애는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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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 김 씨 집안에 낯선 여자가 들어왔다.

스물넷의 한연화였다.

연화는 충청도 산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살아왔다.

어린 나이부터 남의 집 일을 했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도 했다.

그녀는 가난했지만 자존심이 없는 여자는 아니었다.

다만 가난은 때때로 사람에게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먼 친척의 소개로 김 씨 집안에 오게 되었을 때 연화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큰집의 살림을 돕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며칠 뒤 그녀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김 씨 집안은 아들을 낳아줄 여자를 찾고 있었다.

씨받이.

연화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소개한 여자가 말했다.

“그 집안에서 키우지.”

“저는요?”

“너는 돈을 받고 돌아오는 거야.”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못 하겠어요.”

그러나 며칠 뒤 고향에서 소식이 왔다.

어머니의 병이 깊어졌다는 것이었다.

동생들은 학교를 그만둘 처지였다.

연화는 밤새 울었다.

그리고 결국 김 씨 집안에 남았다.

그 선택을 훗날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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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월.

한연화가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김 씨 집안은 술렁였다.

“아들입니다!”

산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만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아들이냐?”

“예. 건강한 사내아이입니다.”

만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조상님들이 우리 집안을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날 김 씨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친척들에게 소식이 전해졌고,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만석은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김도현.

도현이라는 이름에는 집안을 반듯하게 이어가라는 노인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아이는 몸이 작고 말랐다.

그러나 손가락이 길었고 눈매가 또렷했다.

만석은 손자의 작은 손을 붙잡고 웃었다.

“귀한 놈이다.”

그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우리 집안의 귀한 아들이야.”

그러나 그날 아무도 아이를 낳은 여자의 마음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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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화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작고 따뜻했다.

연화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도현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아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밤새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가 울면 젖을 물렸고, 잠들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손가락.

얇은 눈꺼풀.

가느다란 발목.

그 모든 것을 기억하려 했다.

사흘 뒤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말이 전해졌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있게 해 주세요.”

그러나 약속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김 씨 집안은 아이를 정식으로 집안에 들이고, 윤정애가 낳은 아들처럼 키울 계획이었다.

연화는 아이를 안고 울었다.

“한 번만 더 젖을 먹이게 해 주세요.”

그녀의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이는 다른 여자의 품으로 옮겨졌다.

연화는 빈 팔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따뜻했던 자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가난해서 돈을 받기로 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사람은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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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석은 손자의 출생에 관한 일을 철저하게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그 여자가 다시는 이 집안에 나타나서는 안 된다.”

박노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님, 그래도 아이 어미인데…”

만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현이 어미는 윤정애야.”

노식은 입을 다물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제 뿌리를 의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예.”

“그 여자의 이름도, 고향도, 어디로 갔는지도 아이에게 알려져서는 안 돼.”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그날부터 김 씨 집안에서는 한연화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도 극히 적었다.

그녀와 아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은 하나씩 끊어졌다.

김 씨 집안은 그것을 가문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 도현은 그 일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은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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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애는 갓난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작고 연약한 생명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불쌍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겪었던 모욕이 떠올랐다.

딸 넷을 낳았다는 이유로 받은 냉대.

남편과 다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집안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그녀는 아이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정애는 아이를 안고 한참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참 복도 많구나.”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이 집의 모든 것이 네 것이 되었으니.”

그 말에는 축복보다 서러움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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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2월.

골목 아래 황 씨 집안에서도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황서윤이었다.

그 집은 김 씨 집안처럼 큰 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식구가 많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작은 마당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었고, 부엌에서는 늘 밥 짓는 냄새가 났다.

겨울이면 방마다 아랫목을 차지하려는 아이들로 소란스러웠다.

서윤이 태어난 날에도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아이고, 예쁘기도 하지.”

할머니 전옥분이 손녀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볼이 통통했고 얼굴이 동그스름했다.

작은 코와 도톰한 입술이 유난히 귀여웠다.

옥분은 손녀의 볼을 살짝 만졌다.

“우리 집에 복덩이가 왔구나.”

어머니 이정순은 지친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 여자아이라 서운하지 않으세요?”

옥분은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서운할 게 뭐 있느냐.”

그리고 손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아들이든 딸이든 제 복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지.”

옥분은 아이를 안고 오래도록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같은 골목 위쪽에서 열한 달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가 전혀 다른 운명을 안고 자라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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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서윤의 할머니 전옥분에게도 오래된 집안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의 친정은 깊은 산골에 자리한 전 씨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종종 조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려가 망한 뒤 왕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그 가운데 일부가 성을 바꾸어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전 씨 집안 역시 그 후손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옥분의 아버지는 늘 말했다.

“사람은 뿌리를 잊으면 안 된다.”

옥분은 그 말을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았다.

그런데 그녀가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조금 달랐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었다.

가문이 높다고 모두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고, 가난하다고 모두 초라한 사람도 아니었다.

옥분은 갓 태어난 손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서윤아.”

아이가 작은 입을 움직였다.

“너는 누구의 후손이라는 이름보다 네 이름으로 잘 살아라.”

그 말은 축복이었다.

그리고 훗날 서윤이 수많은 고비를 넘길 때마다 마음속에서 되살아날 오래된 가르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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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1973년.

김도현은 세 살을 지나 네 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른 체형은 여전했다.

그러나 눈빛은 더욱 또렷해졌다.

아이는 말을 빨리 배웠고, 한 번 들은 것은 좀처럼 잊지 않았다.

숫자에도 관심이 많았다.

할아버지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가르쳐 주면 금세 따라 했다.

만석은 손자를 볼 때마다 기뻐했다.

“이놈은 머리가 좋구나.”

그는 도현을 무릎에 앉히고 한자를 가르쳤다.

“이건 하늘 천이다.”

“하늘 천.”

“이건 땅 지.”

“땅 지.”

도현은 작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 그렸다.

만석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도현이는 크게 될 놈이야.”

그 말에 도현은 웃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없는 곳에서는 달랐다.

누나들은 어린 동생을 반기지 않았다.

도현이 태어난 뒤 집안의 관심이 모두 그에게 쏠렸기 때문이다.

새 옷도 도현의 것이 먼저 마련되었고, 좋은 음식도 도현 앞으로 갔다.

명절이면 어른들은 손녀들보다 도현을 먼저 찾았다.

“우리 집안 장손 어디 있느냐?”

누나들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상했다.

그들 역시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딸들의 서운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 쌓인 감정은 조금씩 어린 도현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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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여름.

도현이 다섯 살을 지나던 해였다.

아버지 김태중은 사업 때문에 지방을 오가는 일이 잦았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도현을 불렀다.

“우리 아들, 공부 잘하고 있느냐?”

“네.”

“엄마 말씀 잘 듣고?”

“네.”

“누나들하고도 사이좋게 지내지?”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우리 아들은 착하구나.”

그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다시 집을 떠났다.

도현은 아버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가 자신을 차갑게 바라본다는 것.

누나들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집 안이 무섭다는 것.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아버지가 실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도현은 말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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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황서윤은 다섯 살이었다.

서윤은 골목에서 가장 말이 많은 아이 가운데 하나였다.

동그란 얼굴에 웃음이 많았고, 누구를 만나든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른들은 서윤을 귀여워했다.

“아이고, 저 집 딸은 참 싹싹해.”

그러나 서윤에게도 고집이 있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가 온 뒤 골목에 물웅덩이가 생기면 어른들이 말려도 뛰어들었다.

치마가 젖고 신발에 흙탕물이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머니 이정순은 하루에도 몇 번씩 딸을 불렀다.

“황서윤!”

“네!”

“또 어디 갔어?”

“여기요!”

“여기가 어디야?”

“골목이요!”

그 말에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윤은 왜 어른들이 웃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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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날이었다.

김 씨 집안의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담장 밖으로 뻗은 가지에도 주황빛 감이 매달려 있었다.

서윤은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와, 맛있겠다.”

그때 담장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따면 안 돼.”

서윤은 깜짝 놀랐다.

“누구야?”

잠시 뒤 검은 대문이 조금 열렸다.

마른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김도현이었다.

서윤은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 여기 살아?”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저 감 네 거야?”

“우리 집 거야.”

서윤은 다시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만 주면 안 돼?”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

“할아버지가 허락해야 해.”

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너희 할아버지 무서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아이를 바라보다 물었다.

“너 이름 뭐야?”

“김도현.”

“나는 황서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서윤의 눈이 커졌다.

“나 알아?”

“응.”

“어떻게?”

도현은 골목 아래를 가리켰다.

“맨날 시끄럽게 떠들잖아.”

서윤은 잠시 입을 벌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너 말도 잘하네!”

도현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서윤은 다시 물었다.

“너 몇 살이야?”

“다섯 살.”

“나도 다섯 살인데!”

도현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1월생이야.”

“나는 12월생.”

서윤은 손가락을 꼽았다.

그러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네가 오빠네!”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씩 웃었다.

“도현 오빠!”

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두 아이는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높은 담장 안에서 자란 아이와 골목 아래 시끌벅적한 집에서 자란 아이.

한 아이는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였지만 사랑이 부족했고, 다른 아이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서로의 집 안을 몰랐다.

그리고 그 차이가 훗날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두 사람의 삶을 갈라놓을지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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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김만석은 손자를 불렀다.

“도현아.”

“네, 할아버지.”

“오늘 골목에서 누구랑 이야기했느냐?”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황서윤이요.”

만석은 웃었다.

“황 씨 집안 손녀 말이구나.”

“네.”

“어떠냐?”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끄러워요.”

만석은 크게 웃었다.

“허허, 그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런데?”

도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재미있어요.”

만석은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아이는 웃고 있었다.

만석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 아이가 앞으로도 저렇게 웃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노인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손자가 얼마나 긴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

아버지가 집을 비운 날마다 어떤 고통을 견디게 될지.

그리고 그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바카라상 앞에 앉아 공부하게 될지.

훗날 김도현은 학교에서 늘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이 된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일을 전전한다.

젊은 나이에 결혼하지만 자신의 출생을 둘러싼 편견으로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다.

프로그래머가 되어 회사를 일으키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이었다.

1975년 가을.

김도현은 다섯 살이었다.

황서윤도 다섯 살이었다.

두 아이가 사는 집 사이에는 좁은 골목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골목 위로 감나무 가지가 길게 뻗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감나무 잎이 흔들렸다.

아무도 몰랐다.

그날 나눈 짧은 인사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지나서도 두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게 되리라는 것을.

한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돌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수많은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서로 다른 삶.

서로 다른 상처.

그러나 시작은 같은 골목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연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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