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골목에서 자랐다.
연원(淵源)
부제
서로의 집 안을 몰랐던 두 아이의 반세기
작품 소개
우리는 같은 골목에서 자랐다.
서로의 집 대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고,
누구네 집에 감나무가 있는지도 알았고,
어느 집에서 저녁이면 된장찌개 냄새가 나는지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로의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랐다.
황서윤은 김도현을 귀하게 자란 외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김도현은 황서윤을 걱정 없이 웃으며 자란 여자애라고 생각했다.
둘 다 틀렸다.
도현은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던 집안에서 어렵게 태어났다.
그를 낳은 여자는 아이의 얼굴을 가슴에 제대로 담기도 전에 떠났다.
집에는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 여자와 네 명의 누나가 있었다.
집안에서는 귀한 손자였지만
어린 도현에게 집은 가장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그런 도현을 품어주던 할아버지마저 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골목 끝에는 황서윤이 살았다.
서윤의 친가에도 오래된 이야기가 내려왔다.
고려가 무너진 뒤 살아남기 위해 왕 씨 성을 버리고 전 씨가 되어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는 조상들의 이야기.
그것이 사실인지 전설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린 서윤에게 중요한 것은 왕의 피가 아니었다.
오늘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싸우고 화해하고,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었다.
그 골목에는 두 아이만 살았던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도 있었고 부잣집도 있었다.
딸이라서 서러운 아이가 있었고
아들이라서 짐을 짊어진 아이도 있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과
살기 위해 결혼한 사람이 있었으며,
떠난 사람과 돌아온 사람,
돈을 번 사람과 잃은 사람,
자식을 품은 사람과 버린 사람,
그리고 평생 누군가를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자랐다.
골목은 사라졌고
집들은 허물어졌으며
사람들은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반세기가 흘렀다.
어느 날 김도현이 황서윤에게 말했다.
“야, 넌 그래도 편하게 살았잖아.”
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래된 친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도현.”
“왜.”
“넌 나를 하나도 모르는구나.”
그날부터 두 사람은
서로가 몰랐던 오십 년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이면서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 골목에서 시작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같은 곳에서 자랐으면서도
반세기가 지나서야 서로의 삶을 발견하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다.
작가의 말
사람은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살았고,
같은 길을 걸었고,
서로의 부모와 형제를 알고 있어도
정작 그 사람이 밤마다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도
내가 전혀 모르는 인생이 있었겠구나.
그리고 그 사람들 역시
나를 제대로 알지 못했겠구나.
그래서 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작품에는 제 기억에서 출발한 장면들이 있습니다.
제가 뛰어놀던 골목과 학교,
친구들과 가족,
웃었던 날과 울었던 날,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서전이 아닙니다.
기억 속 사람들은 새로운 이름을 얻고,
어떤 사건은 사라지고,
어떤 사건은 새롭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존재했던 한 사람에게
소설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황서윤과 김도현 역시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만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 형제와 친구,
동네 사람들과 학교 친구들,
잠시 스쳐 간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인생을 주고 싶습니다.
누구도 주인공의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자리에서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었을 테니까요.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지는 저도 모릅니다.
십 년을 지나고,
삼십 년을 지나고,
반세기를 건너갈 수도 있습니다.
사랑도 있을 것이고
미움도 있을 것입니다.
가난과 돈, 가족과 결혼,
성공과 실패, 탄생과 죽음도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끝에서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을 얼마나 알고 살아가는가.
왕의 후손이라 전해지는 사람도,
아무 이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결국 한 생을 살아내는 일 앞에서는
똑같이 울고 웃었을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제가 찾고 싶은 것은
귀한 혈통이 아니라
끝끝내 살아낸 사람들의 귀함입니다.
오래 걸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독자 여러분에게도 황서윤과 김도현이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한때 같은 골목에 살았던 사람처럼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골목의 첫 번째 대문을
이제 열어보겠습니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해시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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