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내 삶이 넓어지는 순간
다음 작품에 정식으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서연은 휴대전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한 번 읽고,
다시 읽었다.
잘못 읽었나 싶어 세 번째로 읽었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졌다.
지난번 카메라 앞에 섰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다음 연락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쉬는 날이 생겼고, 우연히 지원했던 곳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한번 가본 것뿐이었다.
카메라 앞에 서보고 싶었다.
아직 자신에게 새로운 얼굴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었다기보다 자신이 아직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다음 문이 열리고 있었다.
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무슨 작품인가요?
메시지를 보냈다.
답은 금방 왔다.
짧은 영상 광고와 드라마 단역 후보로 함께 검토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미팅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연의 눈이 커졌다.
드라마.
단역.
그 단어가 이상하게 낯설고 설렜다.
쉰을 훌쩍 넘긴 자신의 삶에 이런 단어가 들어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동안 서연의 하루를 채운 단어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출근.
퇴근.
설거지.
청소.
월급.
생활비.
피곤하다.
또 출근.
그 사이에 아주 가끔,
보고 싶어.
라는 말이 들어왔다.
도진을 만나면서였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단어 하나가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촬영.
서연은 웃었다.
“내 인생 참 희한하네.”
그 순간 도진이 생각났다.
말해주고 싶었다.
제일 먼저.
휴대전화에서 도진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가 두 번 가기도 전에 도진이 받았다.
“왜 아직 안 자?”
서연이 웃었다.
“당신도 안 자잖아.”
“난 원래 늦게 자.”
“나 좋은 일 생겼어.”
도진의 목소리가 바로 달라졌다.
“뭔데?”
“맞혀봐.”
“돈 주웠어?”
“참나.”
“로또?”
“끊는다.”
“알았어. 뭔데?”
서연은 잠깐 뜸을 들였다.
“촬영했던 데서 연락 왔어.”
“뭐래?”
“다음 작품 같이 하고 싶대.”
도진이 잠시 말이 없었다.
서연은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진짜?”
“응.”
“잘됐네.”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목소리에는 웃음이 있었다.
서연도 웃었다.
“드라마 단역 이야기도 있대.”
“배우 되는 거야?”
“아직 몰라.”
“나중에 사인 받아놔야겠네.”
“지금 받아놔. 나중엔 비싸.”
도진이 웃었다.
“벌써 연예인 다 됐네.”
서연은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근데 조금 무섭다.”
“뭐가?”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도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해.”
“뭘?”
“하고 싶으면 해.”
서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나 잘할 것 같아?”
“그건 모르지.”
“뭐야.”
도진이 웃었다.
“안 해봤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응원이라는 걸 모르니?”
“대신.”
도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은 해보고 후회하는 사람이잖아.”
서연은 조용해졌다.
그 말이 맞았다.
힘들어도 해봤고,
무서워도 움직였다.
실패하더라도 직접 부딪쳐봐야 마음이 끝나는 사람이었다.
“해봐.”
도진이 다시 말했다.
“안 되면 또 다른 거 하면 되잖아.”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도진아.”
“응.”
“당신 가끔 멋있는 말 한다.”
“가끔?”
“아주 가끔.”
“끊어.”
둘은 동시에 웃었다.
서연은 마음이 놓였다.
사실 조금 걱정했었다.
도진이 싫어하면 어떡하지.
촬영장에 남자들이 있는 것을 신경 쓰면 어떡하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또 불편해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도진은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연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때 도진이 물었다.
“미팅은 언제인데?”
“아직 정확하게 안 잡혔어.”
“멀어?”
“아마 서울일 것 같아.”
“혼자 가?”
서연이 웃었다.
“봐. 시작했다.”
“뭘.”
“질투.”
“아니거든.”
“방금 혼자 가냐고 물었잖아.”
“그냥 물어본 거야.”
“당신의 ‘그냥’은 이제 안 믿어.”
도진이 웃었다.
“알았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연은 문득 물었다.
“도진아.”
“응.”
“내가 정말 바빠지면 어떡할 거야?”
“지금도 바쁘잖아.”
“그거 말고. 촬영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도진은 잠시 생각했다.
“기다려야지.”
서연의 가슴이 살짝 움직였다.
“또 기다려?”
“당신이 나 기다린 것만큼은 기다려봐야지.”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대신 남자 배우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말고.”
서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나올 줄 알았다.”
“웃지 마. 진지해.”
“배우도 아닌데 벌써 남자 배우 걱정이야?”
“미리 하는 거지.”
“그럼 나 안 할까?”
도진이 바로 말했다.
“아니.”
서연이 잠시 멈췄다.
도진은 이번에는 장난기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하지 말지는 마.”
그 말이 서연의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나 때문에 하지 말지는 마.
어쩌면 두 사람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붙잡는 대신 각자의 삶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서연은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뭐가.”
“그냥.”
“당신도 그냥이라는 말 쓰네.”
“내 그냥은 진짜 그냥이야.”
“거짓말.”
또 웃었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전화를 끊고 서연은 쉽게 잠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현실은 기다렸다는 듯 서연을 붙잡았다.
미팅 일정이 도착했다.
평일 오후 두 시.
서연은 메시지를 보는 순간 한숨부터 나왔다.
그 시간은 일을 해야 했다.
촬영을 계속하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
오디션.
미팅.
촬영.
그때마다 일을 빼야 했다.
그리고 일을 빼는 만큼 돈은 줄어든다.
서연에게 하루의 수입은 작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하루 쉬는 것은 휴식이지만,
서연에게 하루 쉬는 것은 숫자가 빠지는 일이었다.
통장에 찍히지 않을 돈.
그래서 고민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꿈과 생활.
젊었을 때는 꿈을 좇으라는 말을 쉽게 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꿈에는 비용이 붙었다.
서연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하루를 빼면 얼마.
촬영 때문에 이틀을 빼면 얼마.
교통비.
식비.
그리고 실제 출연료가 얼마가 될지도 몰랐다.
한참 숫자를 보다가 계산기를 껐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웃음이 났다.
아직 출연이 결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 손익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도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좋은 아침.
서연은 사진 한 장을 찍어 보냈다.
계산기 화면이었다.
곧바로 전화가 왔다.
“뭐야?”
“현실.”
“무슨 현실.”
“미팅 가려면 일을 빼야 해.”
도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 중.”
“얼마나 손해야?”
서연이 금액을 말했다.
도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가.”
“쉽게 말한다.”
“그럼 안 갈 거야?”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진이 말했다.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이해하는데.”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 얼굴은 이미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을 것 같은데.”
서연은 피식 웃었다.
“전화인데 내 얼굴이 보여?”
“보여.”
“뭐가 보여.”
“당신 성격이.”
서연은 웃었다.
맞았다.
가고 싶었다.
아주 많이.
도진이 말했다.
“하루 돈은 다시 벌 수 있잖아.”
서연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당신이 줄래?”
도진도 웃었다.
“얼마인데.”
서연은 순간 말을 멈췄다.
농담이었다.
그런데 도진은 다시 물었다.
“얼마야?”
“됐어.”
“말해봐.”
“싫어.”
“왜?”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내가 선택한 일이잖아.”
도진은 조용히 들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가는 거면 내가 감당해야지.”
“그래도.”
“도진아.”
“응.”
“나한테 돈 주려고 하지 마.”
도진이 말이 없어졌다.
서연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대신 응원해줘.”
잠시 후 도진이 말했다.
“알았어.”
“뭘?”
“가서 잘하고 와.”
서연은 웃었다.
“그거면 돼.”
전화를 끊은 뒤 서연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
미팅 참석하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느낌.
서연은 알지 못했다.
그 선택이 단순히 촬영 한 번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며칠 뒤.
서연은 약속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머리를 한번 정리했다.
“황서연, 떨지 마.”
혼잣말을 하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띵.
문이 열렸다.
서연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닫히려던 문 사이로 한 남자가 급히 손을 넣었다.
“잠시만요.”
문이 다시 열렸다.
남자가 들어왔다.
서연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표정이 굳었다.
남자 역시 서연을 알아봤다.
지난 촬영장에서 연락처를 물으려 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서연 씨?”
서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반갑게 웃었다.
“여기 웬일이에요?”
“미팅이 있어서요.”
남자의 눈이 커졌다.
“혹시 7층?”
서연도 그를 바라봤다.
“네.”
남자가 웃었다.
“저도 7층인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 안에 두 사람만 남았다.
남자가 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우연치고는 계속 겹치네요.”
서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진이었다.
서연은 화면을 바라봤다.
남자는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전화는 계속 울렸다.
서연은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도진아.”
그 순간 남자가 서연을 보며 말했다.
“서연 씨, 7층 맞죠?”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아차.
그리고 예상대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서연은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봤다.
3.
4.
5.
7층까지는 아직 두 층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벌써,
도진의 질투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21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