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뒤집힌 휴대전화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19화. 뒤집힌 휴대전화

“왜 또 전화했어.”

유리창 너머 도진의 입 모양이 분명히 그렇게 움직였다.

서연은 물 잔을 들려다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다.

칠십이 되면 뭘 하고 싶으냐는 도진의 뜬금없는 질문에 둘은 먼 훗날을 이야기했다.

“당신 따라다녀야지.”

장난처럼 던진 그 한마디 때문에 서연은 혼자 가슴이 따뜻해졌었다.

그런데 지금 도진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다른 손은 허리에 올린 채 무언가를 듣고 있었다.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서연은 애써 시선을 거뒀다.

‘보지 말자.’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관계가 있다.

일 때문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굳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유리창 밖에 가 있었다.

도진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했다.

이번에는 입 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통화가 끝났다.

도진은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서연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손.

깊게 빨아들이는 숨.

고개를 숙인 채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도진이 머릿속에 복잡한 것이 있을 때 나오는 얼굴이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보낼까 했다.

누구야?

손가락이 멈췄다.

지웠다.

다시 적었다.

무슨 일 있어?

그것도 지웠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조금 전 도진에게 했던 말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상대의 세상을 좁혀 내 곁에 두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기 삶을 살아가도록 두면서도 나를 선택할 거라고 믿는 것.

그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은 참 잘했다.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전혀 쉽지 않았다.

몇 분 뒤 도진이 들어왔다.

“미안.”

“뭐가?”

“전화가 좀 길어졌네.”

서연은 도진을 바라봤다.

묻고 싶었다.

누구냐고.

왜 세 번이나 전화했느냐고.

왜 나가서 받아야 했느냐고.

그리고 왜 하필 “또” 전화했냐고 했느냐고.

그런데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괜찮아.”

도진이 자리에 앉았다.

뒤집어놓았던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더니 무음으로 바꿨다.

서연은 그 작은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일 때문이야?”

결국 물었다.

도진이 잠시 멈췄다.

“아니.”

“그럼?”

도진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는 사람이야.”

서연은 웃었다.

“세상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이지.”

도진이 서연을 봤다.

“왜?”

“그냥 궁금해서.”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야.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별일이 아니라면 그냥 말하면 될 텐데.

하지만 서연은 더 묻지 않았다.

“그래.”

짧게 대답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도진이 서연을 바라봤다.

“왜.”

“뭐가?”

“갑자기 말이 없잖아.”

서연은 피식 웃었다.

“당신도 참 웃긴다.”

“뭐가.”

“내가 남자랑 밥 한 번 먹었다는 얘기에는 얼굴이 세상 끝난 것처럼 되면서.”

도진이 눈을 피했다.

“그거랑 이거랑 같아?”

“뭐가 다른데?”

“그냥 아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누구냐고.”

도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 하나가 서연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다.

서연은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여자야?”

도진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연은 웃었다.

그런데 웃음에 온기가 없었다.

“여자구나.”

“서연아.”

“됐어.”

이번에는 서연이 그 말을 했다.

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 됐어.”

“말하기 싫은 것 같은데 굳이 물어보고 싶지 않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말하면 되잖아.”

도진은 한숨을 쉬었다.

서연은 그 한숨이 싫었다.

마치 자신이 피곤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됐어. 정말.”

서연은 가방을 챙겼다.

도진이 당황했다.

“어디 가?”

“집에.”

“갑자기 왜?”

서연은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도진 씨는 내가 모르는 남자하고 밥만 먹어도 누군지 궁금하고, 누가 나 좋다고 했다는 말에는 얼굴부터 달라지잖아.”

“그건…”

“그런데 나는 물어보면 안 돼?”

“안 된다고 안 했어.”

“그럼 말해.”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진이 서연의 손목을 잡았다.

“앉아.”

“놔.”

“앉아서 얘기하자.”

“뭘 얘기해.”

“당신 지금 오해하잖아.”

서연이 도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오해 안 하게 말해줘.”

도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서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기다렸다.

도진이 먼저 말할 때까지.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만나던 사람이야.”

서연의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여자친구?”

“예전에.”

“얼마나 예전?”

“몇 년 됐어.”

“그런데 지금도 전화해?”

“가끔.”

“왜?”

도진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냥 연락이 와.”

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연락이 오면 받는 거고?”

“계속 안 받으면 또 전화하니까.”

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차가워졌다.

자신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던 밤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전화는 못 받으면서.

자신에게는 잠들었다고 하면서.

예전에 만나던 여자의 전화는 세 번 울리자 결국 밖으로 나가 받았다.

사실 관계가 그것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논리보다 빨랐다.

서연이 조용히 물었다.

“아까 뭐라고 했어?”

“뭘?”

“왜 또 전화했냐고 했잖아.”

도진의 얼굴이 굳었다.

“봤어?”

“유리창인데 안 보이겠어?”

도진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 자꾸 연락이 와.”

“왜?”

“모르겠어.”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아?”

“서연아.”

“응.”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서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도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제일 믿기 어렵더라.”

“무슨 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보통 세 번씩 전화하지 않아.”

“내가 연락한 게 아니잖아.”

“알아.”

“그런데 왜 나한테 그래.”

서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당신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지금 그러고 있잖아.”

“나는 그냥 묻는 거야.”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도진이 자신에게 왔고,

기다려줬고,

손을 잡았고,

서로의 먼 미래까지 장난처럼 이야기했다.

그 좋은 하루를 모르는 여자 하나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더 싫은 것이 있었다.

모른 척하는 것.

마음이 불편한데 괜찮은 척하는 것.

그렇게 하나씩 쌓아두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식어버리는 것.

서연은 목소리를 낮췄다.

“도진아.”

“응.”

“나 싸우자는 거 아니야.”

도진도 조금 진정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한테 과거가 없다고 생각해?”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살아온 시간이 있고 당신도 있잖아.”

“알아.”

“예전에 누굴 만났다는 게 싫은 게 아니야.”

“그럼?”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

도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물었을 때 그냥 처음부터 말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어.”

“괜히 당신 신경 쓰일까 봐.”

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숨기면 더 신경 쓰이지.”

도진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

“당신이 나한테 원하는 만큼 나한테도 해줘.”

도진이 서연을 바라봤다.

“당신은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싶어 하잖아.”

“응.”

“그러면 나도 물어볼 수 있어야지.”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서연은 그 대답이 의외였다.

“뭐가 그렇게 쉽게 맞아?”

도진이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니까.”

조금 전까지 날카로웠던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

도진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연 앞에서 화면을 켰다.

“볼래?”

서연이 화면을 보지 않고 도진을 바라봤다.

“뭘?”

“통화 내역이든 메시지든.”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그거 보려고 물어본 거 아니야.”

“그럼?”

서연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 말을 믿고 싶은 거야.”

도진의 손이 멈췄다.

“휴대전화 검사해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안심하고, 뭐 하나 나오면 싸우고. 그런 관계 싫어.”

도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서연이 말했다.

“나는 당신 경찰 아니야.”

도진이 웃었다.

“무서운 경찰 같은데.”

서연도 피식 웃었다.

“농담하지 마.”

“알았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 침묵은 아까와 조금 달랐다.

도망치는 침묵이 아니라 서로 생각하는 침묵이었다.

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서연은 그를 바라봤다.

“뭐가?”

“처음부터 말 안 한 거.”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진은 한참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뭐.”

“내가 당신한테 너무 내 기준만 들이댄 것 같아서.”

서연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알면 됐어.”

“그렇게 쉽게 끝나?”

“그럼 무릎 꿇어?”

도진이 웃었다.

“그건 싫은데.”

“그러니까 잘해.”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서연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은 이미 많이 식어 있었다.

도진이 물었다.

“더 시킬까?”

“됐어.”

“또 됐어?”

서연이 웃었다.

“이건 진짜 됐어.”

둘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서연의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가시 하나가 남아 있었다.

예전에 만나던 여자.

몇 년이 지났는데도 가끔 연락하는 사람.

그리고 오늘은 세 번이나 전화한 사람.

도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서연은 믿고 싶었다.

사랑을 계속하려면 어느 순간에는 믿어야 했다.

모든 것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까.

식당을 나왔을 때 밤공기가 차가웠다.

도진이 자연스럽게 서연의 손을 잡았다.

서연은 이번에는 손을 빼지 않았다.

한참 걷다가 도진이 말했다.

“서연아.”

“응.”

“아까 그 여자.”

서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할게.”

서연이 도진을 바라봤다.

“나 때문에?”

“응.”

서연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도진이 의아한 얼굴로 봤다.

“왜?”

“내가 시켜서 하지 마.”

“그럼 계속 연락받아?”

“그것도 당신이 정해.”

도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서연은 그의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당신 관계잖아.”

“그래도 당신이 싫다며.”

“싫지.”

“그런데?”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도진을 바라봤다.

“나는 당신이 나 때문에 무언가를 정리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잠시 숨을 골랐다.

“당신 스스로 지금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지를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연은 다시 걸었다.

도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뒤따라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서연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날 두 사람은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걸었다.

사랑에는 과거도 따라왔다.

서로 만나기 전의 시간.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문을 두드리는 사람.

지워지지 않은 기억.

그 모든 것을 없애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지금 누구의 전화를 기다리는지.

지금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누구에게 돌아가고 싶은지.

헤어지기 전 도진이 서연을 바라봤다.

“도착하면 전화해.”

서연이 웃었다.

“안 자고?”

도진도 웃었다.

“안 자고 기다릴게.”

“술도?”

“오늘 안 마신다고 했잖아.”

“믿어볼게.”

서연이 돌아섰다.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봤다.

도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서연이 손을 흔들었다.

도진도 손을 들었다.

그리고 서연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도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아까 전화했던 번호가 다시 떠 있었다.

부재중 전화 한 통.

그리고 메시지 하나.

도진은 메시지를 열었다.

짧은 문장이었다.

우리 정말 이렇게 끝내는 거야?

도진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답장을 쓰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려던 순간,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당신한테 아직 못한 말 있어.

도진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날 밤,

서연에게는 말하지 못한 도진의 과거가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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