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과거가 문을 두드릴 때
우리 정말 이렇게 끝내는 거야?
나 당신한테 아직 못한 말 있어.
도진은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봤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무슨 말인데.
왜 이제 와서.
다시는 연락하지 마.
어떤 말이든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껐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었다.
몇 걸음 걷다가 다시 꺼냈다.
자신도 모르게 화면을 켰다.
두 개의 메시지는 그대로였다.
도진은 낮게 욕을 삼켰다.
“왜 하필 지금이야.”
몇 년이었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니, 끝난 관계였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었고, 다시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가끔 연락이 왔다.
잘 지내?
술 한잔할래?
생일 축하해.
처음에는 몇 번 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한동안 조용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다시 연락이 왔다.
도진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과거는 과거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서연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서연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도진은 길가에 멈춰 섰다.
조금 전 서연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 스스로 지금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지를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도진은 피식 웃었다.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서연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나는 사람.
일하다가 잠깐 시간이 나면 목소리가 궁금한 사람.
맛있는 것을 보면 같이 먹고 싶은 사람.
다른 남자가 가까이 있다는 말만 들어도 괜히 심사가 뒤틀리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칠십이 된 자신의 옆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렵지.
도진은 담배를 꺼냈다.
입에 물었다가 다시 넣었다.
오늘은 안 피우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술만 안 마신다고 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피우고 싶지 않았다.
서연이 싫어하는 냄새가 자신의 옷에 밸 것 같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도진은 화면을 봤다.
서연.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렸다.
“어.”
“뭐 해?”
“집에 가는 중.”
“술 안 마셨지?”
도진이 웃었다.
“첫마디가 그거야?”
“중요하지.”
“안 마셨어.”
“진짜?”
“응.”
“잘했네.”
그 짧은 칭찬 하나가 기분 좋았다.
도진은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당신은 어디야?”
“나도 가는 중.”
“혼자?”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도진은 아차 싶었다.
서연이 웃었다.
“또 시작이다.”
“뭐가.”
“누구랑 있는지 확인하는 거.”
“그냥 물어본 거야.”
“혼자야.”
도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래.”
“좋아?”
“뭐가.”
“혼자라니까.”
도진은 웃었다.
“조금.”
“참나.”
서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 조금 전의 메시지가 더 불편해졌다.
말해야 할까.
아까 그 여자에게 또 연락이 왔다고.
서연은 숨기지 말라고 했다.
믿고 싶다고 했다.
도진은 입을 열었다.
“서연아.”
“응.”
“아까 그 사람이…”
그 순간 서연 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 씨!”
남자 목소리였다.
도진의 말이 멈췄다.
서연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잠깐만요.”
도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누구야?”
서연이 웃었다.
“촬영했던 분.”
“남자?”
“또 그게 중요해?”
“누군데.”
“스태프분이야. 내가 뭘 두고 왔나 봐.”
도진은 말이 없어졌다.
서연이 말했다.
“잠깐만.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냥 끊어.”
뚝.
도진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신이 생각해도 유치했다.
조금 전까지 서연에게 과거의 연락을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사람이 남자 목소리 하나에 또 삐쳤다.
도진은 다시 전화를 걸까 했다.
그때 서연에게 메시지가 왔다.
또 삐쳤어?
도진은 답하지 않았다.
곧이어 하나가 더 왔다.
도진아, 나 지금 웃고 있다.
도진의 입가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세 번째 메시지가 왔다.
당신 너무 티 나.
도진은 결국 답했다.
안 삐쳤어.
곧바로 서연에게 전화가 왔다.
도진은 받았다.
“왜.”
“안 삐친 사람이 왜 전화를 끊어?”
“통화 끝난 줄 알았어.”
“거짓말.”
“진짜야.”
“도진아.”
“왜.”
“귀엽다.”
도진의 얼굴이 굳었다.
“뭐?”
“귀엽다고.”
“나 안 귀여워.”
“질투하는 거 귀여워.”
“끊는다.”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놀리지 않을게.”
도진도 결국 웃었다.
그런데 서연이 물었다.
“아까 뭐 말하려고 했어?”
도진의 웃음이 사라졌다.
“뭐?”
“아까 그 사람이 어쩌고 했잖아.”
도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피할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오늘 식당에서 서연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
도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여자한테 또 연락 왔어.”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도진의 심장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뭐라고?”
서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우리 정말 이렇게 끝내는 거냐고.”
“그리고?”
“나한테 아직 못한 말이 있대.”
다시 침묵.
도진은 기다렸다.
차라리 서연이 화를 냈으면 편했을 것이다.
왜 계속 연락하냐고.
번호를 차단하라고.
다시는 받지 말라고.
그런데 서연은 한참 뒤 다른 것을 물었다.
“당신은 궁금해?”
도진이 멈칫했다.
“뭐가?”
“그 여자가 못한 말.”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도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연이 다시 물었다.
“궁금해?”
“모르겠어.”
“그건 당신이 알아야지.”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도진은 길가에 멈춰 섰다.
“서연아.”
“응.”
“당신 화났어?”
“조금.”
솔직한 대답이었다.
“근데 화나는 것보다 무서워.”
도진의 얼굴이 굳었다.
“뭐가?”
“당신 마음에 아직 끝나지 않은 게 있을까 봐.”
도진은 바로 대답했다.
“없어.”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
“없다고.”
“도진아.”
서연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나한테 대답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한테 대답해 봐.”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내일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싶어?”
“아니.”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도진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조금은 궁금하지.”
서연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진이 말을 이었다.
“사람이니까 궁금한 거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은 아니야.”
“알아.”
“진짜야.”
“알았다니까.”
그런데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도진은 그것을 느꼈다.
“당신 또 혼자 이상한 생각하지 마.”
서연이 웃었다.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것도 관리하려고 해?”
“그런 뜻 아니잖아.”
“알아.”
잠시 침묵.
서연이 말했다.
“그럼 들어봐.”
“뭘?”
“그 사람이 못한 말.”
도진은 놀랐다.
“뭐?”
“궁금하다며.”
“당신 괜찮겠어?”
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안 괜찮겠지.”
“그런데 왜.”
“그래도 듣고 와.”
도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연은 천천히 말했다.
“과거에 문 하나가 열려 있으면 계속 바람이 들어오잖아.”
도진은 조용히 들었다.
“그 문을 닫든, 다시 들어가든 당신이 해야 해.”
“다시 들어갈 생각 없어.”
“그러면 더 쉽네.”
서연은 애써 웃었다.
“제대로 닫고 와.”
도진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서연은 강한 여자였다.
그런데 도진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서연의 강함이 상처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상대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서연아.”
“응.”
“싫다고 해.”
“뭘?”
“만나지 말라고.”
서연은 눈을 감았다.
사실 그러고 싶었다.
만나지 마.
전화도 받지 마.
번호 지워.
나만 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평생 궁금할 것 같았다.
도진이 자신의 말 때문에 과거의 문을 닫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스스로 닫은 것인지.
서연은 천천히 대답했다.
“싫어.”
“뭐가.”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거.”
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당신은?”
“나?”
“내가 만나고 오면.”
서연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겠어.”
처음으로 솔직한 두려움이 나왔다.
“어쩌면 나도 조금 멀어질지 모르지.”
도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럼 만나지 말라는 거잖아.”
“아니.”
서연이 말했다.
“그것까지 포함해서 당신 선택이라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도진은 그제야 알았다.
자유롭게 선택하라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붙잡는 것보다 어려웠다.
금지하는 것보다 무서웠다.
상대가 자신을 믿고 문을 열어놓은 채 기다리는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도진이 말했다.
“응.”
“그리고.”
“뭐?”
도진은 잠시 망설였다.
“나 그 사람 안 만날 거야.”
서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아니.”
도진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니니까.”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정말?”
“응.”
“못한 말이 궁금하다며.”
“궁금한 것과 만나고 싶은 건 다르잖아.”
도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내가 지금 듣고 싶은 말은 그 사람 말이 아니야.”
“그럼?”
도진이 웃었다.
“당신 말.”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진이 물었다.
“왜 말 없어?”
“생각 중.”
“또 무슨 생각.”
서연은 피식 웃었다.
며칠 전 자신이 불꽃 이야기를 했을 때 도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잠도 안 자고 또 뭔 생각.
그때는 그 말이 서운했다.
지금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서연이 말했다.
“우리 불꽃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도진은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뭐였으면 좋겠는데?”
서연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등불.”
“등불?”
“응.”
“왜?”
“불꽃은 너무 빨리 사라지잖아.”
서연은 웃었다.
“조금 덜 뜨거워도 오래 켜져 있는 거.”
도진도 웃었다.
“그럼 등불 하자.”
“그게 마음대로 돼?”
“하면 되지.”
“뭘 어떻게?”
도진은 잠시 생각했다.
“안 사라지면 되잖아.”
서연의 걸음이 멈췄다.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안 사라지면 되잖아.
어쩌면 서연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사라지지 않겠다는 말.
서연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날 밤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오늘 먹었던 음식.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
도진이 얼마나 질투쟁이인지.
서연이 얼마나 생각이 많은지.
그리고 서로 잠들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잘 자.”
“당신도.”
“내일 전화해.”
“당신이 해.”
“알았어.”
전화를 끊은 도진은 한동안 어두운 방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그 여자에게 온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우리 정말 이렇게 끝내는 거야?
나 당신한테 아직 못한 말 있어.
도진은 이번에는 답장을 썼다.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우리 관계는 오래전에 끝났어. 못한 말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잘 지내.
전송.
잠시 후 메시지 옆에 숫자 하나가 사라졌다.
읽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도진은 연락처를 한동안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과거가 정말 끝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시각.
서연 역시 잠들지 않고 있었다.
도진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랐다.
안 사라지면 되잖아.
서연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웃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늦은 시간이었다.
서연은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전화는 끊겼다.
그리고 곧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서연 씨 맞으시죠?
지난번 촬영 관계자입니다.
서연은 몸을 일으켰다.
이어진 두 번째 메시지를 읽는 순간 눈이 커졌다.
다음 작품에 정식으로 함께하고 싶습니다.
서연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직 알지 못했다.
그 한 통의 연락이
도진과 자신의 거리를 다시 한번 크게 흔들어놓게 될 것이라는 것을.
20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