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일요일이었다.
16화. 그날, 다른 약속이 생겼다
도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서연은 일을 하다 잠깐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이번 주 일요일 어때?
짧은 문장이었다.
서연은 화면을 보는 순간 웃었다.
어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당신이 정해.
그리고 도진은 정말 날짜를 정해왔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대답했을 것이다.
좋아.
몇 시?
어디서 볼까?
그런데 서연은 한참 답을 하지 못했다.
하필 일요일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일요일이라는 말 하나에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도진을 만날 수 있다면 하루쯤 어떻게든 비워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서연에게 하루는 그냥 하루가 아니었다.
돈이었다.
생활이었다.
누군가에게 휴일은 쉬는 날이지만 서연에게 휴일은 일을 하지 못해 수입이 줄어드는 날이었다.
도진을 만날 때마다 그 현실이 마음 한쪽에 걸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돈을 계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현실은 사랑보다 먼저 계산기를 두드렸다.
서연은 한참 뒤 답했다.
일요일?
응.
몇 시?
내가 갈게. 당신 있는 쪽으로.
그 한마디에 서연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내가 갈게.
도진이 정말 자신의 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두 시간 가까운 거리.
환승도 해야 했다.
평소 같으면 서연이 중간쯤 나가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
와.
딱 두 글자만 보냈다.
도진에게서 바로 답이 왔다.
왜 이렇게 시큰둥해.
서연은 피식 웃었다.
좋아서 그래.
좋은데 왜 그래?
진짜 올지 아직 모르잖아.
잠시 답이 없었다.
그리고 도진의 메시지가 왔다.
이번에는 가.
서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이번에는.
그 말 속에는 도진도 알고 있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이 말만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사랑이 참 별것 아니었다.
사람 하나 온다는 말에 하루가 달라졌다.
그날 저녁부터 서연은 일요일을 생각했다.
무엇을 입을까.
어디를 갈까.
도진이 오면 뭘 먹을까.
그러다 스스로 웃었다.
“또 시작이네.”
마음이 다시 소녀처럼 들뜨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람의 마음은 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밤.
도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
“일 끝났어.”
“밥은?”
“대충.”
“대충 먹지 말랬잖아.”
서연은 웃었다.
“당신은?”
“나도 대충.”
“그러면서 누구한테 잔소리야.”
도진이 웃었다.
둘 사이에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이 흘렀다.
서연이 물었다.
“일요일 진짜 오는 거야?”
“또 묻네.”
“확인.”
“간다고 했잖아.”
“몇 시?”
“당신 몇 시가 좋아?”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점심 전에?”
“알았어.”
“늦으면 안 돼.”
“왜?”
“나 기다리는 거 싫어.”
도진이 잠시 조용해졌다.
“알아.”
그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알아.
정말 알고 있는 걸까.
서연이 얼마나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는지.
사실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시간도 기다릴 수 있었다.
두 시간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기다림이 무서워졌다.
사랑은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지만,
지나친 기다림은 사랑을 의심하게 했다.
“도진아.”
“응.”
“이번에는 나 기대해도 돼?”
도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웃으며 말했다.
“왜 대답이 없어?”
“기대해.”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알았어.”
전화를 끊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서연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다.
씻고 옷을 입고 정신없이 집을 나섰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지 않았다.
잠시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서연은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연 씨 맞으시죠?”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네.”
“지난번 카메라 테스트 보셨죠?”
서연의 걸음이 멈췄다.
“네.”
“이번에 촬영 건이 하나 있는데요.”
서연의 심장이 순간 뛰었다.
오디션.
며칠 전 도진 대신 선택했던 그 시간.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 서본 것만으로도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
“촬영이요?”
“네. 아직 최종 확정은 아니고요. 이미지가 잘 맞아서 한번 더 뵙고 싶어요.”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언제요?”
전화기 너머에서 날짜가 들려왔다.
순간 서연의 표정이 굳었다.
일요일.
도진이 오기로 한 바로 그날이었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 괜찮으세요?”
“몇 시쯤인데요?”
“오후 한 시쯤 생각하고 있어요.”
서연은 지하철역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사람들이 양옆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오후 한 시.
도진은 점심 전에 오기로 했다.
두 사람은 그날 하루를 함께 보내려고 했다.
서연에게는 오랜만에 찾아온 도진과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자신에게 처음 찾아온 기회였다.
서연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가 조금 확인해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대신 오늘 안으로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서연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왜 꼭 그날이야.”
며칠 전에는 도진을 너무 보고 싶어서 다른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이제 도진이 정말 오겠다고 하니 다른 약속이 먼저 자신을 찾아왔다.
그것도 서연이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품었던 새로운 세계였다.
카메라.
연기.
모델.
누군가는 지금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도진이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말해야 할까.
일요일에 일이 생겼다고.
그러면 도진은 뭐라고 할까.
괜찮다고 할까.
아니면 역시 나를 볼 마음이 없었던 거냐며 서운해할까.
서연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
오디션이 끝난 뒤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다.
도진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서연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특히 그 자리에 남자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말투가 조금 달라졌었다.
서연은 웃었다.
“또 질투하려나.”
그러다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상했다.
예전의 서연이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면 약속을 지키면 됐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도진을 만나기 전의 자신에게도 삶이 있었고,
도진을 만난 후에도 자신의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사랑 때문에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어렵게 자신을 향해 움직이려는 도진의 마음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연은 일을 시작하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도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일요일 뭐 먹고 싶어?
서연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렸다.
도진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서연은 답했다.
맛있는 거.
뭐가 맛있는 건데.
당신이 사주는 거.
도진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리고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해놔.
서연은 한동안 답하지 못했다.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
도진아.
응.
나 일요일에 일이 하나 생길 수도 있어.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서연은 화면을 바라봤다.
일 분.
이 분.
삼 분.
평소라면 별것 아닌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답이 왔다.
무슨 일?
지난번 오디션 본 데서 연락 왔어.
이번에는 답이 더 늦었다.
서연은 덧붙였다.
촬영 얘기가 있대.
언제?
일요일 오후.
도진에게서 한동안 답이 없었다.
서연은 괜히 초조해졌다.
‘역시 서운한가.’
조금 뒤 메시지가 왔다.
가야지.
서연은 눈을 크게 떴다.
뭐?
좋은 기회면 가야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서연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괜찮아?
뭐가.
당신 오기로 했잖아.
도진의 답은 짧았다.
나도 가면 되지.
서연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무슨 말이야?
오전에 만나자.
그리고?
밥 먹고 당신 촬영 가.
그럼 당신은?
도진의 답장이 왔다.
기다리지 뭐.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다리지 뭐.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별것 아닌 말인데.
정말 별것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도진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다.
끝나면 다시 만나면 되잖아.
서연은 웃었다.
당신 기다리는 거 싫어하잖아.
이번에는 기다려볼게.
왜?
답은 한동안 오지 않았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 했다.
그때 화면이 켜졌다.
보고 싶으니까.
서연의 손이 멈췄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보고 싶으니까.
거창한 사랑 고백도 아니었다.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서연은 알 것 같았다.
사랑의 온도라는 것은 언제나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위해 조금 기다리는 것.
상대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것.
자신 때문에 꿈을 포기하게 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있는 것.
그런 것들이 모여 온도가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서연은 천천히 답장을 썼다.
그럼 기다려.
보내고 나서 한 문장을 더 적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한테 갈게.
도진에게서 바로 답이 왔다.
어디로?
서연은 웃었다.
당신 기다리고 있는 데로.
휴대전화를 가슴에 안았다.
며칠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시간보다 훨씬 먼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가까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몇 킬로미터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서연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마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일요일,
도진은 정말로 약속한 시간보다 먼저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서연을 기다리던 그의 눈앞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 남자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그 남자는 서연의 이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불렀다.
“서연 누나?”
도진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1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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