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 누나?”
17화. 서연 누나를 아는 남자
“서연 누나?”
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서연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도진보다는 조금 어려 보였다.
남자는 도진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안 왔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를 바라봤다.
서연 누나.
그 네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누구지?
도진은 시계를 봤다.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서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일찍 와서 기다리고 싶었다.
지난번 서연이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말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진은 요즘 서연의 마음이 조금씩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먼저 와 있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도착하자마자 낯선 남자의 입에서 서연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도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연이었다.
나 거의 다 왔어.
도진은 짧게 답했다.
천천히 와.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나 와 있어.
곧바로 답장이 왔다.
벌써?
응.
서연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도진의 입가에도 잠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옆에 있던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 어디예요?”
도진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나 먼저 왔는데.”
잠시 후 남자가 웃었다.
“알았어요. 천천히 와요.”
전화를 끊은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도진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설마.
동명이인이겠지.
세상에 서연이라는 이름이 한둘인가.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은 이미 불편해져 있었다.
잠시 후 길 건너편에서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서연이었다.
베이지색 재킷에 흰 티셔츠, 편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 일할 때의 모습과 달랐다.
머리도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있었다.
서연이 도진을 발견했다.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도진의 얼굴도 풀렸다.
서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진짜 왔네?”
도진이 눈썹을 올렸다.
“그럼 안 올 줄 알았어?”
“조금.”
“사람을 뭘로 보고.”
“말만 하는 사람?”
도진이 헛웃음을 쳤다.
“그 얘기 또 하려고?”
서연이 웃었다.
“오늘은 안 할게.”
도진은 서연을 바라봤다.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오래 못 본 사람 같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뭐가 그냥이야.”
도진이 무심한 척 말했다.
“예뻐서.”
서연이 잠시 멈췄다.
“뭐 잘못 먹었어?”
“칭찬해도 난리네.”
“당신 입에서 갑자기 그런 말 나오니까 그렇지.”
둘은 웃었다.
며칠 동안 두 사람 사이를 누르던 묵직한 것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 자연스럽게 도진의 팔을 잡았다.
도진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서연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 순간이었다.
“누나!”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이 돌아봤다.
“어?”
조금 전 카페에 들어갔던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서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태수야!”
도진의 손에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서연 앞에 서자 반갑게 웃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네가 여기 웬일이야?”
“누나 오늘 촬영 있다고 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단톡방에 올라왔던데.”
“아.”
서연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도진은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태수라는 남자가 그제야 도진을 봤다.
“아, 안녕하세요.”
“네.”
도진의 대답은 짧았다.
서연이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봤다.
“인사해. 이쪽은 태수. 지난번 오디션 갔을 때 알게 된 사람이야.”
그리고 도진을 바라봤다.
잠시 멈칫했다.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남자친구?
친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서연이 망설이는 짧은 순간을 도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쪽은…”
태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남자친구?”
서연이 당황했다.
“뭐?”
“분위기가 딱 그런데.”
서연이 도진을 슬쩍 봤다.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표정이 묘했다.
싫지도 않은데 좋다고 말하지도 않는 얼굴.
서연은 결국 웃으며 말했다.
“응. 내가 좋아하는 사람.”
도진이 서연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확실히 놀란 표정이었다.
태수가 웃었다.
“역시.”
서연이 물었다.
“뭐가 역시야?”
“지난번에도 계속 휴대폰 보더니.”
“내가 언제.”
“엄청 봤거든요.”
서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도진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생겼다.
그런데 태수가 말을 이었다.
“누나 그날 인기 많았잖아.”
도진의 미소가 멈췄다.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야?”
“왜요. 그 형도 누나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도진의 시선이 서연에게 향했다.
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누가?”
도진이 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서연이 태수를 째려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태수가 웃었다.
“왜. 사실인데.”
“누가 그랬는데?”
도진이 다시 물었다.
태수는 눈치 없이 대답했다.
“그날 같이 밥 먹은 형이요. 누나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서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냥 처음 만난 사람들이랑 밥 먹은 거야.”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그 표정을 알았다.
질투.
도진은 질투할 때 오히려 말이 줄었다.
“도진아.”
“왜.”
“또 시작이야?”
“내가 뭘.”
“표정이 그렇잖아.”
“내 표정이 뭔데.”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질투하는 표정.”
도진은 고개를 돌렸다.
“아닌데.”
“맞는데.”
“아니라고.”
태수가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저 먼저 갈게요. 괜히 싸움 붙였네.”
서연이 태수의 팔을 툭 쳤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해.”
“촬영장에서 봐요.”
태수가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서연도 손을 흔들었다.
“그래. 이따 봐.”
도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태수가 멀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연이 도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왜?”
“뭐가.”
“기분 나빠?”
“아니.”
“거짓말.”
도진이 걸음을 옮겼다.
서연이 뒤따라갔다.
“도진아.”
“왜.”
“질투해?”
“안 한다니까.”
서연이 웃었다.
“귀까지 빨개졌는데.”
도진이 걸음을 멈췄다.
“당신은 남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
서연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남자가 많아.”
“갈 때마다 하나씩 생기잖아.”
“뭐가 생겨.”
“아까도 서연 누나, 서연 누나.”
도진이 태수의 말투를 흉내 냈다.
서연은 배를 잡고 웃었다.
“당신 지금 진짜 웃겨.”
“난 하나도 안 웃겨.”
“태수는 그냥 아는 동생이야.”
“아는 동생.”
“응.”
“남자들은 다 아는 오빠고 아는 동생이지.”
서연이 도진의 팔을 잡았다.
“그럼 당신은?”
도진이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뭐.”
“당신도 아는 오빠 해줄까?”
도진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 마.”
서연은 또 웃었다.
“왜?”
“싫어.”
“그럼 뭐 할 건데?”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일부러 한 걸음 앞서 걸었다.
“대답 안 하면 아는 오빠다.”
도진이 서연의 손목을 잡았다.
서연이 돌아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진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거 싫어.”
“그럼?”
“당신 남자.”
서연의 웃음이 멈췄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갔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멀리 신호등이 바뀌었다.
그런데 서연에게는 그 순간 도진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당신 남자.
서연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언제부터?”
도진이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
“그게 뭐야.”
“그냥 어느 순간부터.”
“어느 순간?”
도진은 서연의 손목을 놓고 대신 손을 잡았다.
“당신 주변에 다른 남자 있는 게 싫어졌을 때부터.”
서연은 웃었다.
“그건 질투잖아.”
“그래. 질투.”
도진이 처음으로 순순히 인정했다.
서연은 조금 놀랐다.
“웬일이야. 인정도 하고.”
“싫은 걸 어떡해.”
“내 주변에 남자가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응.”
서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도진아.”
“응.”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도진이 서연을 바라봤다.
서연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살짝 흔들었다.
“내가 누구 손을 잡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연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걸었다.
점심을 먹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로 웃었다.
도진은 서연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반찬을 앞으로 밀어주기도 했다.
“이거 먹어.”
“나 배불러.”
“아까 맛있다며.”
“당신 먹어.”
“난 됐어.”
서연이 웃었다.
“왜 자꾸 나만 먹여.”
도진이 무심하게 말했다.
“잘 먹는 거 보면 좋으니까.”
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런 말들이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별것 아닌 순간에 툭 떨어지는 마음.
서연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도진에게 바랐던 것은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손을 잡고,
조금 질투하고,
다시 웃는 하루.
식사를 마치자 촬영 시간이 가까워졌다.
서연이 시계를 봤다.
“나 이제 가야겠다.”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디를?”
“데려다줘야지.”
“당신 그냥 여기 있어.”
“싫어.”
“왜?”
“어떤 놈들이 있는지 봐야지.”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또 시작이네.”
“뭐가.”
“질투.”
도진이 먼저 걸었다.
“빨리 와.”
서연은 그의 뒤를 바라봤다.
넓은 어깨.
조금 빠른 걸음.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남자.
서연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따라갔다.
촬영장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서연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릴 거야?”
“응.”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기다린다며.”
서연의 가슴이 순간 먹먹해졌다.
며칠 전까지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도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은 도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진짜 기다려?”
“응.”
“술 마시러 가는 거 아니고?”
도진이 웃었다.
“오늘은 안 마셔.”
“왜?”
“당신 기다려야 하니까.”
서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도진의 손을 잡았다.
“갔다 올게.”
“잘하고 와.”
서연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도진이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연은 손을 흔들었다.
도진도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서연은 생각했다.
불꽃이 아니어도 좋다고.
이렇게 한 사람이 들어갈 때까지 바라봐주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랑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촬영장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서연의 걸음이 멈췄다.
안쪽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난번 오디션 날 함께 점심을 먹었던 남자였다.
그가 서연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서연 씨.”
서연도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서연에게 다가왔다.
“또 만나네요.”
“그러게요.”
“지난번에 연락처 못 물어봐서 아쉬웠는데.”
서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남자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건물 밖을 생각했다.
그곳에는 지금,
두 시간을 건너와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가 있었다.
서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약속 있으세요?”
“네.”
“누구랑?”
서연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제 남자요.”
그 말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처음이었다.
도진을 그렇게 부른 것이.
제 남자.
그리고 건물 밖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도진이 커피 두 잔을 앞에 놓고 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잔은 자신의 것.
다른 한 잔은,
서연이 돌아왔을 때 건네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두 잔의 커피가 모두 식기 전에
도진은 예상하지 못한 장면 하나를 보게 된다.
촬영장을 먼저 빠져나온 한 남자가 도진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서연 씨 기다리세요?”
도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요.”
남자가 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서연 씨한테 할 말이 있는데.”
도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17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