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보내지 못한 한마디
도진은 결국 그 말을 보내지 못했다.
보고 싶어.
고작 네 글자였다.
그런데 그 네 글자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무거웠다.
도진은 휴대전화 화면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문장을 지웠다.
다시 썼다.
보고 싶다.
이번에는 끝에 마침표까지 찍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또 지웠다.
“미쳤나.”
도진은 혼잣말을 하며 휴대전화를 바카라상 위에 엎어놓았다.
사무실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
누군가는 커피를 타고 있었고, 누군가는 전날 끝내지 못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도진에게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전화가 오고, 사람을 만나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 이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일에 파묻히는 순간 다른 생각은 사라졌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잠깐 틈이 생길 때마다 서연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불꽃이었던 걸까.
도진은 그 문장이 싫었다.
정확히는 무서웠다.
서연이 자신과의 시간을 이미 과거형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었던.’
그 한 글자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도진은 담배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평소 같으면 조금 진정됐을 텐데 오늘은 담배 맛도 쓰기만 했다.
“별생각을 다 하네, 정말.”
그렇게 말했지만 자신도 알고 있었다.
별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고,
연락을 미뤘고,
술을 마신 날이면 잠들었다는 한마디로 넘어갔다.
서연은 그때마다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면 괜찮은 게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말하지 않는다고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진은 담배를 비벼 껐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순간 서연인가 싶어 급히 화면을 봤다.
업무 전화였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여보세요.”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단단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전혀 단단하지 않았다.
그 시각 서연은 일을 하고 있었다.
몸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자꾸 다른 곳으로 갔다.
도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서연은 일부러 휴대전화를 보지 않으려 했다.
십 분쯤 지나면 궁금했고,
삼십 분이 지나면 괜히 가방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보지 말자면서 또 보네.”
휴대전화를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서연은 화면을 끄고 다시 일했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보냈을 것이다.
밥 먹었어?
뭐 해?
바빠?
그런 말 하나면 다시 대화가 시작됐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하지 않았다.
밀고 당기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자존심 때문도 아니었다.
서연은 알고 싶었다.
자신이 가만히 있어도 도진이 자신을 찾는 사람인지.
그동안 두 사람의 관계가 누군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오후가 되었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조용했다.
서연의 마음도 조금씩 조용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더 초조해질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담담해졌다.
사람은 너무 오래 문 앞에 서 있으면 결국 돌아서게 되는 모양이었다.
서연은 문득 자신이 도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잠깐이라도 내게 와.
그날 자신은 정말 도진이 오기를 바랐다.
두 시간이 걸려도.
한 시간밖에 같이 있지 못해도.
그냥 자신을 보기 위해 움직여주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도진에게는 일이 있었고 자신의 생활이 있었다.
서연 역시 그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늘 이해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무리해서라도 보고 싶은 날이 있었다.
서연에게 그날이 그랬다.
도진에게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차이가 서연을 아프게 했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연의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급히 화면을 보았다.
도진이었다.
뭐 해.
서연은 웃음이 나왔다.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겨우 두 글자였다.
뭐 해.
참 도진다운 말이었다.
서연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몇 분이 지났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바빠?
서연은 이번에는 화면을 조금 오래 바라봤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자신을 찾기는 하는구나.
그러면서 동시에 서운했다.
그것밖에 못 하나.
사람의 마음은 참 욕심이 많았다.
연락이 없을 때는 한마디만 와도 좋겠다 싶더니,
막상 한마디가 오니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서연은 천천히 답장을 썼다.
일해.
보내고 나니 너무 차가운가 싶었다.
하지만 고치지 않았다.
잠시 뒤 도진에게서 답이 왔다.
많이 바빠?
조금.
오늘 늦게 끝나?
응.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허탈했다.
이게 뭐지.
보고 싶다는 말도 없고,
아침에 보낸 이야기에 대한 말도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날씨 이야기라도 할 기세였다.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십여 분 뒤 다시 메시지가 왔다.
밥은 먹고 일해.
서연은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참나.”
그게 도진이었다.
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밥은 먹으라고 하는 사람.
보고 싶다고는 못하면서 뭐 하느냐고 묻는 사람.
걱정된다고는 못하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
서연은 그런 도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좋아했고,
그래서 힘들었다.
그날 밤.
서연은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 종일 서 있었던 다리가 묵직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천천히 걸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진이었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서연은 화면을 바라봤다.
받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어?”
“응.”
“힘들었겠다.”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진도 잠시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예전에는 침묵조차 편했다.
아무 말 없이 숨소리만 들어도 좋았다.
그런데 오늘의 침묵은 달랐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 말도 못 하는 침묵이었다.
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생각?”
“아침에.”
도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서연은 알았다.
불꽃 이야기였다.
“그냥.”
“그냥이 어딨 어.”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다시 침묵.
도진이 낮게 말했다.
“나 때문에?”
서연은 웃었다.
“그럼 누구 때문에 그러겠어.”
전화기 너머로 도진의 숨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도진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 뒤 말했다.
“당신 요즘 나한테서 자꾸 멀어지는 것 같아.”
서연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도진이 먼저 해버렸다.
“내가?”
“응.”
“도진 씨가 먼저 멀어진 건 아니고?”
이번에는 도진이 대답하지 못했다.
서연은 천천히 다시 걸었다.
“나도 느꼈어.”
“뭘?”
“우리 둘 다 조금씩 뒤로 가고 있는 거.”
도진은 말이 없었다.
“당신이 한 발 물러나면 나도 한 발 물러나고. 내가 연락 안 하면 당신도 안 하고.”
“난 그런 거 아닌데.”
“그럼 뭔데?”
도진의 대답이 늦어졌다.
서연은 더 묻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재촉했을 것이다.
말해봐.
왜 그래.
나 아직 좋아해?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참 뒤 도진이 말했다.
“겁났나 봐.”
서연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뭐가?”
“당신 마음이.”
서연은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차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 마음이 왜?”
도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커 보여서.”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도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좋았어. 그냥 당신이 좋았어. 만나면 좋고, 전화하면 좋고, 술 마시면서 얘기하면 좋고.”
“지금은?”
서연이 물었다.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짧은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지금은 안 좋아?”
서연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작아졌다.
도진이 한숨처럼 말했다.
“더 좋아져서 문제지.”
서연은 눈을 감았다.
가슴 어딘가가 순간 뜨거워졌다.
하지만 바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도망가?”
도진은 웃었다.
아주 짧고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러게.”
“술 마시고 연락 안 하고, 잠들었다고 하고.”
“미안해.”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도진에게서 그 말을 처음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안해.
별것 아닌 세 글자였는데 마음 한쪽이 풀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서연은 조용히 말했다.
“도진아.”
“응.”
“나는 당신한테 매일 나만 바라보라고 하는 거 아니야.”
“알아.”
“일하는 것도 이해하고, 힘든 것도 알아. 술 좋아하는 것도 알고.”
“응.”
“근데 사라지지는 마.”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서연은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게 제일 싫어. 연락 안 되는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신은 모르잖아.”
“알 것 같아.”
“아니. 몰라.”
서연은 처음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괜찮은 척해서 그렇지 나도 많이 흔들려.”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겁나.”
“뭐가?”
“당신을 너무 좋아하게 된 게.”
도진의 숨소리가 잠깐 멈췄다.
서연은 웃었다.
“나 원래 이런 여자 아닌데.”
“어떤 여자?”
“남자 전화 기다리고, 질투하는지 확인하고, 보고 싶어서 하루 종일 마음 쓰는 여자.”
도진이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따뜻한 웃음이었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됐네.”
“그러니까 바카라임져.”
말하고 나서 서연이 먼저 웃었다.
도진도 따라 웃었다.
오랜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웃음이 흐르는 것이.
그 짧은 순간만큼은 며칠 동안 쌓여 있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도진이 말했다.
“서연아.”
“응.”
“나 당신 보고 싶어.”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으니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도진이 다시 말했다.
“진짜 보고 싶어.”
서연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럼 와.”
도진이 조용해졌다.
서연은 더 말하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은 충분히 들었다.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말이 아니라 움직임.
도진이 물었다.
“언제?”
서연은 웃었다.
“그것까지 내가 정해줘야 해?”
“당신 바쁘잖아.”
“도진 씨도 바쁘잖아.”
“그러니까.”
서연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정해.”
“내가?”
“응.”
“왜?”
서연은 천천히 대답했다.
“나도 한번 기다려보고 싶어.”
“뭘?”
“당신이 나한테 오는 날.”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서연은 재촉하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났다.
그리고 도진이 말했다.
“알았어.”
“뭘 알았는데?”
“이번에는 내가 갈게.”
서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선가 이미 들어본 것 같은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몰랐다.
서연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말만 하지 말고.”
도진이 웃었다.
“알았어.”
“나 이제 말 잘 안 믿어.”
“그럼 뭘 믿는데?”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는 거.”
도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앞에 진짜 서 있는 거.”
이번에는 도진의 대답이 빨랐다.
“그래.”
서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언제 올 건지.
정말 올 건지.
약속할 수 있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기로 했다.
사랑은 때로 확인하는 순간보다 기다리는 순간에 더 선명해지는 것이니까.
통화를 끝낸 뒤 서연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며칠 동안 꽉 막혀 있던 가슴이 조금 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연은 알고 있었다.
오늘 들은 말 하나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법.
서운함을 말하는 법.
상대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견디는 법.
그리고 가끔은 정말로 두 시간의 거리를 건너가는 법.
서연은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에는 휴대전화를 베개 옆에 두지 않았다.
충전기에 꽂아놓고 멀찍이 누웠다.
이상하게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한편,
통화를 끝낸 도진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카라상 위에는 마시다 남은 술잔이 있었다.
도진은 술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열었다.
달력을 켰다.
이번 주.
다음 주.
손가락이 날짜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갈 수 있는 날을 찾았다.
한참 뒤,
도진의 손가락이 어느 하루에서 멈췄다.
그는 그 날짜를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보고 싶다는 말만으로는 안 된다고.
이번에는 정말 가야 한다고.
하지만 도진은 아직 몰랐다.
그가 고른 바로 그날,
서연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1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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