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기다리는 사람
사랑은 언제나 타이밍이라고 했다.
서연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조금 늦어도 괜찮고, 조금 멀리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두 시간이 걸리면 두 시간을 가면 되고, 하루가 바쁘면 그 하루가 끝난 뒤 목소리라도 들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진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라는 것을.
한 사람이 뜨거울 때 다른 사람이 차갑고, 한 사람이 다가갈 때 다른 사람이 물러서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요즘 두 사람의 온도는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서연은 밤새 거의 잠들지 못했다.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화면을 켜고, 끄고.
몇 분 뒤 다시 켰다.
도진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전화를 한 번 더 해볼까 생각했다.
손가락이 도진의 이름 위에서 한참 머물렀다.
그러다 내려놓았다.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일이었다.
도진은 술을 좋아했다.
기분이 좋아도 마셨고 힘들어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신 날이면 가끔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처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걱정했다.
두 번째에는 기다렸다.
세 번째에는 서운했다.
네 번째에는 화가 났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마음 한쪽이 조금씩 무뎌졌다.
다음 날이 되면 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잠들었어.”
그 짧은 말 하나면 밤새 기다렸던 서연의 시간은 설명되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서연은 웃으며 넘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해도 계속 쌓이면 피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새벽이 깊어졌다.
서연은 결국 휴대전화를 들었다.
뭐 해??
문장을 보내놓고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대답은 없었다.
조금 뒤 다시 적었다.
머리도 아프고 맘도 아프네.
보내고 나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맘도 아프네.’
사실 그 말이 하고 싶었던 전부였다.
왜 연락을 안 받았느냐고 따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누구와 술을 마셨느냐고 묻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도진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짧은 진동이 울렸다.
서연은 벌떡 일어나 화면을 켰다.
도진이었다.
머리 아파.
단 네 글자.
서연은 한동안 그 네 글자를 바라봤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당신도 아프구나.”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은 분명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고 했다.
도진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서연의 마음이 왜 아픈지는 묻지 않았다.
예전의 도진이었다면 물었을까.
무슨 일 있어?
왜 마음이 아파?
내가 뭐 잘못했어?
서연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었다.
혼자 질문을 만들고, 혼자 답을 상상하고, 혼자 상처받는 것.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그만하라는 명령을 듣는 물건은 아니었다.
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도시는 푸른빛 속에 잠겨 있었다.
문득 전날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는 불꽃이었던 걸까.
서연은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
한 줄을 적었다.
지웠다.
다시 적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도진에게 보냈다.
‘우리는 불꽃이었던 걸까.’
잠깐 서로의 삶을 환하게 비추고 사라지는 인연.
그렇게 생각하자 서연은 가슴이 아팠다.
보내고 나서 후회했다.
너무 무거웠나.
이별하자는 말처럼 들리려나.
도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몇 분 뒤 다시 들었다.
자신이 쓴 소설의 한 장면을 이미지로 만들어 함께 보냈다.
말로 설명하지 못한 마음이 그 안에 있었다.
기다리는 여자.
휴대전화를 바라보는 여자.
도시의 밤.
그리고 멀리 떨어져 혼자 앉아 있는 남자.
어쩌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지금의 두 사람을 그린 그림인지도 몰랐다.
서연은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다리기로 했다.
십 분.
십오 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진이었다.
잠도 안 자고 또 먼 생각 ㅠ
서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또 뭔 생각.’
도진다운 말이었다.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게 받지 않는 사람.
감정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기 전에 슬쩍 농담을 던져버리는 사람.
어쩌면 그것이 도진이 살아온 방식인지도 몰랐다.
힘든 일을 술로 넘기고,
외로운 날에도 괜찮은 척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오히려 강한 척하는 사람.
서연은 예전에 도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기 싫어 강한 척했다고.
짜증이 나도 혼자 웃으면서 술로 달랬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안쓰러웠다.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계속 숨어버리면,
남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서연은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보고 싶다고 쓰고 싶었다.
당신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투정도 부리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묻고 싶었다.
우리 아직 사랑하는 거 맞아?
하지만 어느 것도 보내지 않았다.
도진에게 답을 받아야만 자신의 마음이 정해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때 문득 지난 일요일이 떠올랐다.
오디션이 있던 날.
사실 서연에게 그날은 도진을 만날 수도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다른 약속을 잡았다.
카메라 앞에 서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휴대전화는 무음이었다.
도진의 전화가 왔지만 받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은,
정말 아주 조금은,
도진이 자신을 궁금해했으면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뭐 하고 있지?’
‘왜 전화 안 받지?’
‘누구랑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을 도진도 한 번쯤 해봤으면 했다.
서연은 그날 도진에게 말했다.
“잠깐이라도 내게 와.”
그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다.
시험이었다.
나를 보고 싶다면 움직여봐.
나만 당신을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줘.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오지 않았다.
서연은 이해했다.
일이 있었고 사정이 있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마음에는 작은 점 하나가 남았다.
그 점이 며칠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서연은 처음으로 인정했다.
자신도 도진을 떠보고 있었다.
도진이 연락하지 않으면 자신도 연락을 줄였고,
도진이 한 걸음 물러나면 자신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생각했다.
‘나를 잡아.’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도진도 비슷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시험하고 있었다.
누가 더 보고 싶은지.
누가 먼저 전화하는지.
누가 먼저 찾아오는지.
누가 더 오래 기다리는지.
사랑이 어느 순간 시험지가 되어 있었다.
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나이에 연애가 왜 이렇게 어려워.”
혼잣말이 방 안에 떨어졌다.
젊었을 때보다 쉬울 줄 알았다.
살 만큼 살았고,
사람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이제는 감정 하나쯤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이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화 한 통에 기분이 좋아지고,
짧은 답장 하나에 서운하고,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뛰었다.
서연은 웃었다.
그리고 조금 슬펐다.
도진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잠깐 설레다 지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친 삶 한가운데 우연히 불어온 바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연은 아주 먼 미래까지 가버렸다.
칠십이 넘은 자신을 상상했다.
그 옆에는 도진이 있었다.
둘이 천천히 걸었다.
예전처럼 빠르게 걷지 못해도 괜찮았다.
손을 잡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고,
도진이 술을 마시면 서연은 옆에서 잔소리했다.
“이제 나이 생각 좀 해.”
그러면 도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옆에 있잖아.”
서연은 그런 장면을 정말로 상상했다.
그것이 가장 아팠다.
자신에게 도진은 잠깐의 사람이 아니었는데,
혹시 도진에게 자신은 잠깐이었을까 봐.
서연은 다시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답장을 기다리는 화면은 조용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오늘 당장 답을 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랑은 대답 하나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니까.
보고 싶다는 백 번의 말보다 한번 움직이는 것이 중요했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서연이 원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았다.
매일 만나자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 종일 전화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삶이 힘들어졌을 때 사라지지 않는 사람.
서운하면 침묵하는 대신 말해주는 사람.
보고 싶으면 가끔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사랑의 온도가 조금 내려가더라도,
꺼지지는 않는 사람.
그 정도였다.
서연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들어왔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연은 다시 자신의 하루로 돌아가야 했다.
도진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삶의 전부가 아니라 삶 속에 함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잠깐 멈췄다.
도진에게서 연락이 오면 기쁠 것이다.
오지 않으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웃음이 났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진아.”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문을 열었다.
아침 햇살이 복도 끝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서연은 그 빛을 향해 걸었다.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시각,
밤새 머리가 아프다며 짧은 말만 남겼던 도진 역시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우고 있었다.
보고 싶어.
하지만 그는 결국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보내지 못한 한마디가 남았다.
다음에 누가 먼저 그 한마디를 꺼내느냐에 따라,
불꽃은 꺼질 수도,
비로소 오래 타는 불이 될 수도 있었다.
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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