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사랑에도 온도가 있다
사람의 마음에도 온도가 있다면 몇 도쯤 될까.
서연은 한때 도진과 자신의 마음이 비슷한 온도라고 생각했다.
뜨거웠다.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서로를 찾았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목소리도 서로의 것이었다.
별것 아닌 사진 한 장에도 대화가 길어졌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퇴근은 몇 시에 하는지.
오늘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이 이상하리만큼 재미있었다.
도진은 자주 말했다.
“보고 싶어요.”
서연도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을 숨기지 않았다.
“나도.”
그 두 글자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서연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휴대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기다릴 틈도 없이 울리던 전화였다.
이제는 화면을 한번 켰다가 끄고, 다시 켰다가 끄게 되었다.
‘바쁜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도진은 바쁜 사람이었다.
한 가지 일을 오래 해왔고, 현장에서 바카라임져야 할 사람도 많았다.
서연은 그런 도진을 좋아했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남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남자.
그래서 연락이 조금 늦어도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락의 횟수가 아니었다.
온도였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
예전에는 짧은 한마디에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대화가 자꾸 중간에서 끊겼다.
서연도 조금씩 달라졌다.
먼저 연락하려다 멈췄고,
보고 싶다는 말을 쓰다가 지웠다.
‘나만 그러는 건가?’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했다.
사랑할 때는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으면서도, 상대가 자신보다 덜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겁쟁이가 된다.
서연도 그랬다.
한 걸음 더 가고 싶은데 발끝이 먼저 멈췄다.
그러던 일요일이었다.
서연에게 모처럼 시간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생긴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것이었다.
평소라면 일을 했을 날이었다.
하루를 쉬면 그만큼 수입이 줄었다.
서연에게 휴일은 달력의 빨간 숫자가 아니었다.
돈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약속을 잡았다.
오래전 별생각 없이 지원했던 카메라 테스트였다.
연락을 받았을 때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가겠다고 했다.
새로운 일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날을 도진만 기다리며 보내고 싶지 않았다.
도진이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오히려 다른 약속을 만들었다.
서연은 그런 자기 마음이 우스웠다.
‘보고 싶으면 그냥 보고 싶다고 하면 되지.’
그런데 이미 말했다.
한 번도 아니었다.
이제는 도진이 움직여주기를 바랐다.
카메라 테스트가 끝났다.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이 웃었고, 또 누군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차까지 마셨다.
두 시간.
세 시간.
서연의 휴대전화는 가방 안에서 조용했다.
정확히는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서연이 무음으로 해두었다.
뒤늦게 화면을 확인했을 때 도진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서연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전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잠시 그대로 있었다.
도진이라면 어떻게 할까.
자신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궁금할까.
보고 싶어 할까.
혹시 조금은 질투할까.
서연은 스스로에게 웃었다.
어느새 자신도 상대의 마음을 시험하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기울어 있었다.
서연은 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톡을 보냈다.
답이 없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바쁜가 보다.’
조금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진은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 때문에 수시로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까지도 바쁘다며 일하는 곳의 사진을 보내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전화만 닿지 않는 것 같은 기분.
서연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됐어.’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가방 속에 넣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자꾸 생각났다.
혹시 술을 마시는 걸까.
도진은 술을 좋아했다.
기분이 좋아도 마셨고, 힘들어도 마셨다.
좋은 안주를 보면 술을 찾았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술이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신 밤이면 가끔 연락이 사라졌다.
다음 날이면 비슷한 말이 돌아왔다.
잠들었다고.
처음에는 웃었다.
두 번째도 이해했다.
세 번째에는 조금 서운했다.
그다음부터는 숫자를 세지 않으려고 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숫자를 세기 시작하면 사랑이 초라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마음은 기억하고 있었다.
서연은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의 불빛이 빠르게 뒤로 흘러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식은 걸까.’
도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그랬다.
예전 같았으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또 이러는구나.’
그 생각이 서연을 놀라게 했다.
서운함보다 체념이 먼저 찾아온다는 것.
어쩌면 사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싸움이 아닐지도 몰랐다.
기다리지 않게 되는 것.
궁금해하지 않게 되는 것.
상대의 침묵에 익숙해지는 것.
서연은 그것이 무서웠다.
집에 도착했다.
불을 켜지 않은 채 한동안 창가에 서 있었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조용했다.
며칠 전 도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고 했다.
헤어지는 순간이 싫다고 했다.
서연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다고도 했다.
그 말들은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연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신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손을 잡고 걸을 때 정말 좋았다.
도진 쪽으로 몸이 살짝 기울어지는 것도 좋았다.
나이를 잊어버릴 만큼 웃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아주 먼 훗날까지 생각했다.
칠십이 넘어서도 저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까.
머리가 더 희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도 둘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며 웃을 수 있을까.
도진이 술잔을 들면 자신은 복분자주나 조금 홀짝이고,
“담배 좀 그만 피워.”
잔소리하면서도 옆에 앉아 있는 그런 노년.
서연은 그런 장면까지 상상했었다.
잠깐의 일탈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먼 미래까지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했다.
칠십의 도진은 선명한데,
다음 주의 도진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가슴을 찔렀다.
서연은 소파에 앉았다.
휴대전화가 손안에 있었다.
차단당한 것일까.
화를 내는 걸까.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자신도 이미 여러 번 도진에게서 멀어져야 하나 고민했다는 것.
연락이 사라질 때마다.
혼자 상상하고 먼저 마음을 접으려는 도진을 볼 때마다.
자신이 힘들다고 말했는데도 그 마음이 제대로 닿지 않는 것 같을 때마다.
그때마다 서연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어쩌면 도진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역시 물러난 것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서 조금씩 도망치고 있었다.
서연은 그제야 웃음이 났다.
슬픈 웃음이었다.
“우리 둘 다 겁쟁이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한 사람은 술과 침묵 뒤로 숨었고,
한 사람은 바쁜 일상 속으로 숨어버렸다.
보고 싶으면서도 먼저 찾지 않으려 했고,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상처받기 싫어 마음을 조금씩 거둬들였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더 이상 전화하지 않기로 했다.
도진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 사람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은가.
아니었다.
서연은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일이면 다시 일어날 것이고,
출근할 것이고,
사람들과 웃을 것이고,
해야 할 일을 해낼 것이다.
그런데도.
도진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 차이가 중요했다.
필요해서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혼자서도 살 수 있지만 곁에 있었으면 하는 사람.
서연에게 도진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그날 밤늦게까지 전화는 오지 않았다.
서연은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한 문장이 떠올랐다.
불꽃은 아름답다.
순식간에 어둠을 밝히고,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한다.
하지만 너무 뜨거운 불꽃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서연은 눈을 떴다.
천장이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는 불꽃이었던 걸까.’
잠깐 서로의 삶을 환하게 비추고 사라지는 인연.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서연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불꽃이 아니어도 좋았다.
처음처럼 뜨겁지 않아도 괜찮았다.
대신 오래 켜져 있는 작은 불빛이면 좋았다.
칠십이 넘어서도,
서로의 손등에 주름이 가득해져도,
아직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불빛.
서연이 원했던 사랑은 이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불빛을
자기 혼자 지킬 수는 없었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진을 기다리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시간보다 훨씬 먼 거리가 생겨 있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몰랐다.
그 거리를 먼저 건너올 사람이
누구일지를.
1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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