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보고 싶다는 말보다

귓가에 남았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12화. 보고 싶다는 말보다

전화를 끊고도 서연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도진의 마지막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 남았다.

“그 마음…… 나한테 있는 거 맞아?”

평소의 도진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자신감 있게 다가오던 남자.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던 남자.

헤어진 여자들이 자신을 쉽게 놓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던 남자.

그런 도진이 서연에게는 자꾸 확인을 받고 싶어 했다.

서연은 그것이 조금 우습고,

조금 귀엽고,

또 조금은 슬펐다.

사실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도진 씨 마음은 정말 어디까지일까.’

처음에는 말이 참 예뻤다.

무언가 해주고 싶다는 말도 했고,

좋은 것을 보면 서연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서연은 물건이 탐났던 게 아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좋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생각하며

‘이 여자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렜다.

그런데 가까워질수록 말들은 조금씩 흐려졌다.

서연은 묻지 않았다.

원래 지나가는 말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사랑은 무엇을 받는 것으로 확인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은 것들이 하나씩 마음에 남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사는 곳은 두 시간쯤 떨어져 있었다.

도진은 일주일에 엿새를 일했다.

서연은 일주일에 일곱 날을 일했다.

누가 더 바쁜지를 따질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도진에게 하루는 휴일이었지만,

서연에게 하루는 돈이었다.

일을 하루 쉬면 그날 벌 돈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나가야 할 돈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서연에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하루를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내는 일이 아니었다.

자기 몫의 하루를 통째로 떼어주는 일이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서연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월요일 하루를 비워두었다.

도진이 오라고 하면 가려고 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거창한 데이트도 필요 없었다.

같이 밥을 먹고,

걷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손을 잡고.

그렇게 둘만의 기억 하나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도진에게는 이미 일정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의 일도 있었고 병원에 가야 할 일도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런데 마음은 머리보다 조금 어린 모양이었다.

섭섭했다.

‘나는 하루를 비웠는데.’

차마 말하지 못했다.

자기가 먼저 비워놓고 상대에게 바카라임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서연은 괜찮은 척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한 가지 생각이 마음에 들어왔다.

‘우리 둘은 언제 추억을 만들지?’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그것만으로 관계가 계속될 수 있을까.

서연은 이제 말보다 장면을 갖고 싶었다.

둘이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먹었던 음식.

별것 아닌 일로 한참 웃었던 오후.

도진이 술잔을 들고,

서연은 또 못 마시겠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결국 복분자주 한 병을 가운데 놓고 둘이 나눠 마시는 그런 밤.

나중에 시간이 흘러도

“우리 그때 그랬잖아.”

하고 꺼낼 수 있는 기억.

그런 게 필요했다.

그날 밤 도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뭐 해?’

서연은 한참 후에 답했다.

‘일.’

곧 답장이 왔다.

‘또?’

서연은 웃었다.

‘응. 또.’

‘몸 좀 챙겨.’

짧은 문장이었다.

며칠 전이었다면 그 말 하나에도 마음이 따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다른 말이하고 싶었다.

서연은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웠다.

그러다 결국 보냈다.

‘도진 씨.’

‘응.’

‘우리는 맨날 보고 싶다고만 하는 것 같아.’

한참 답이 없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괜히 보냈나 싶었다.

그때 화면이 다시 켜졌다.

‘왜. 나 보고 싶어?’

역시 도진이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 하면 슬쩍 장난으로 빠져나가는 남자.

서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응. 보고 싶지.’

몇 초 뒤 숫자 1이 사라졌다.

‘그런데?’

서연은 천천히 적었다.

‘보고 싶다는 말만 계속하면 나중에는 그 말도 익숙해질 것 같아.’

‘……’

‘난 우리 둘이 뭔가 같이 했으면 좋겠어.’

‘뭘?’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여행?

데이트?

좋은 식당?

아니었다.

그런 거창한 것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거나.’

‘아무거 나가 뭔데?’

‘같이 시장을 가도 되고, 밥을 먹어도 되고, 그냥 하루 종일 걸어도 되고.’

그리고 한 줄을 더 보냈다.

‘우리한테도 추억이 있어야 하잖아.’

이번에는 답장이 오래 걸렸다.

서연은 그동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럼 만들자.’

서연은 그 네 글자를 오래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래.’

말은 언제나 쉬웠다.

보고 싶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함께하자는 말도.

서연은 이제 조금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정말 어느 날 도진이 시간을 비우는지.

자기에게 오기 위해 움직이는지.

둘 사이 두 시간의 거리를 누가 먼저 건너오는지.

그리고 자신도 그만큼 움직일 수 있는지.

사랑은 마음만으로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면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거리도 필요하고,

때로는 돈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서로를 향해 실제로 움직이는 발이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서연은 출근 준비를 하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도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갈게.’

서연의 손이 멈췄다.

잠시 후 한 줄이 더 왔다.

‘당신 하루 말고, 내 하루를 비워볼게.’

서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었다.

아직 날짜도 없었다.

약속도 아니었다.

어쩌면 또 말로 끝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서연은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출근길의 발걸음이 어제보다 조금 가벼웠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오늘 서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단 한 문장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갈게.

1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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