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술보다 당신에게 취한 밤
도진은 서연과 만나면 꼭 술을 마시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서연도 이해하지 못했다.
밥만 먹으면 되지.
커피를 마셔도 되고,
산바카라을 해도 되는데 왜 꼭 술일까.
“도진 씨는 술 없으면 나 못 만나?”
어느 날 서연이 물었다.
도진이 웃었다.
“그런 게 아니죠.”
“그럼?”
“좋은 거 먹으면서 한잔 하면 좋잖아요.”
“나는 안 좋은데.”
“서연 씨는 아직 술맛을 몰라서 그래요.”
“평생 모르고 살아도 될 것 같은데.”
도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서연은 그런 도진을 흘겨봤다.
“왜 웃어?”
“그냥 귀여워서.”
“뭐가 귀여워.”
“술 싫다고 정색하는 거.”
서연은 입을 삐죽였다.
그런데 도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서연에게 술을 권하는 진짜 이유를.
술을 많이 마시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좋은 안주 하나를 앞에 놓고,
잔을 천천히 기울이면서
평소와 조금 다른 서연을 보고 싶었다.
늘 단단한 여자.
늘 괜찮다고 말하는 여자.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다음 일을 계산하고,
시계를 보고,
내일을 걱정하는 여자.
그런 서연이 자기 앞에서만큼은
조금 느슨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날도 도진은 괜찮은 식당을 찾아냈다.
“여기 안주 괜찮대요.”
서연이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우리가 술 먹으러 온 거야, 밥 먹으러 온 거야?”
“둘 다.”
“난 밥.”
“나는 술.”
“그럼 각자 먹자.”
“그래놓고 내 안주 다 먹을 거면서.”
서연이 도진을 바라봤다.
“맛있는 건 같이 먹는 거야.”
“거봐.”
도진이 웃었다.
“벌써 술꾼 마인드인데.”
“뭐래.”
서연도 웃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도진은 기다렸다는 듯 복분자주를 주문했다.
서연이 병을 보며 웃었다.
“또 이거야?”
“서연 씨가 이것만 마신다면서요.”
“기억은 잘하네.”
“그럼요.”
도진이 잔에 조금 따라주었다.
서연은 잔을 들여다봤다.
“조금만.”
“알았어요.”
“진짜 조금.”
“알았다니까.”
“취하면 바카라임져.”
말하고 나서 서연이 먼저 웃었다.
도진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 말 취소하지 마요.”
“뭘?”
“바카라임지라는 말.”
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도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기 잔을 들었다.
“짠.”
서연도 잔을 들었다.
“하여간 말은 잘해.”
두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한 모금.
지난번보다는 익숙했다.
달큼한 맛이 입안에 남았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괜찮네.”
“거 봐요.”
“그렇다고 술 좋아진 건 아니야.”
“알겠습니다.”
“소주는 절대 안 돼.”
“네.”
“맥주도 별로.”
“네, 공주님.”
서연의 눈이 커졌다.
“뭐?”
도진이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한잔 더 드릴까요?”
“말 돌리지 마.”
두 사람은 또 웃었다.
한잔이 들어가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또 반잔.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혀가 꼬이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은 멀쩡했다.
다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평소 같으면 한번 생각하고 했을 말을
그냥 해버렸다.
“도진 씨.”
“네.”
“오늘 좀 잘생겨 보인다.”
도진이 젓가락을 멈췄다.
“좀?”
“응. 좀.”
“아까 누구한테 오늘 예쁘다고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였죠?”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
“다시 해주세요.”
“싫어.”
“빨리.”
서연은 복분자주를 한 모금 마시고
도진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더 잘생겼네.”
도진이 만족한 듯 웃었다.
“합격.”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인데?”
둘은 또 웃었다.
도진은 그런 서연을 가만히 바라봤다.
술이 조금 들어가니
서연의 볼에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웃음도 많아졌다.
평소보다 장난도 많았다.
그 모습이 도진은 좋았다.
“왜 그렇게 봐?”
서연이 물었다.
“그냥.”
“그냥 뭐?”
“서연 씨가 이렇게 웃는 모습이 좋아요.”
서연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도진이 말했다.
“그래서 같이 술 한잔하고 싶은 거예요.”
“나 술 먹이려고?”
“취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도진이 웃었다.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아서.”
서연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조금.”
“몰랐는데.”
“맨날 뭔가 생각하고 있잖아요.”
“내가?”
“돈 생각, 일 생각, 아이들 생각, 내일 생각.”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술 조금 들어가면 그게 잠깐 없어지는 것 같아요.”
도진이 말했다.
“그냥 웃잖아요.”
서연은 잔을 내려다봤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도진은 술을 마시는 서연이 좋은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웃는 서연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서연은 다시 잔을 들었다.
“그럼 오늘만.”
“뭐가요?”
“생각 안 할게.”
“진짜?”
“응.”
“내일 일도?”
“오늘은 안 해.”
“돈 생각도?”
“안 해.”
도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내 생각은?”
서연이 도진을 바라봤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평소 같으면 피해 갔을 질문을
그날은 피하지 않았다.
“그건 하지.”
도진이 잠시 말을 잃었다.
이번에는 서연이 웃었다.
“왜? 사람 설레게 해 놓고 본인이 당하니까 말이 안 나와?”
도진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술 조금 더 먹여야겠네.”
“꿈 깨.”
둘의 잔이 다시 부딪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서연은 멀쩡했다.
도진이 물었다.
“괜찮아요?”
“응.”
“안 취했어요?”
“조금.”
“어떻게 취했는데?”
서연이 잠시 생각했다.
“기분이 좋아.”
그게 전부였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니었고
정신이 흐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살짝 위로 떠오른 느낌.
웃음이 쉽게 나오고,
도진의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정도.
도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봤다.
“서연 씨.”
“왜?”
“술 못 마신다면서요.”
“못 마셔.”
“그런데 왜 이렇게 멀쩡해?”
서연도 그제야 이상했다.
평생 술을 거의 마셔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자신은 술에 약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서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겠는데.”
도진이 자기 잔과 서연의 잔을 번갈아봤다.
“혹시.”
“뭐?”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 아니에요?”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그런가 봐.”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 속았네.”
“내가 언제 술 약하다고 했어?”
“못 마신다고 했잖아요.”
“맛없어서 못 마신다고 했지.”
도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서연도 따라 웃었다.
잠시 후 도진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서연은 창문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도진.
연기를 내뿜는 모습.
여전히 싫었다.
담배도,
냄새도.
도진이 자리로 돌아왔다.
서연이 바로 말했다.
“냄새.”
“미안.”
도진이 조금 떨어져 앉았다.
서연이 웃었다.
“도진 씨.”
“응.”
“나 때문에 담배 끊을 수 있어?”
도진은 잠시 서연을 바라봤다.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줄여볼 수는 있죠.”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해서 좋네.”
끊겠다고 쉽게 약속하지 않는 것도
그날은 싫지 않았다.
도진이 다시 잔을 들었다.
“한잔 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맨날 조금 만 이래.”
“나는 분위기로 마시는 사람이야.”
“이제 술 철학까지 생겼네.”
“도진 씨가 가르쳤잖아.”
“그럼 스승님이라고 해봐요.”
“미쳤어?”
서연이 웃었다.
그 웃음이 꽤 오래 이어졌다.
도진은 그런 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기도 따라 웃었다.
그날 둘이 나눠 마신 것은
복분자주 한 병뿐만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활.
서로 다른 습관.
그리고 조금씩 깊어지는 마음.
서연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술자리는 좋았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좋은 안주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맞은편에 도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어져 지하철을 타기 전,
도진이 서연에게 물었다.
“많이 취했어요?”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응.”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조금 취하긴 했어.”
도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서연이 웃었다.
“술 말고.”
“그럼?”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먼저 걸었다.
“뭔데요?”
도진이 뒤에서 따라왔다.
“서연 씨.”
서연은 계속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날 자신을 취하게 만든 건
복분자주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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