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사랑과 꿈 사이에 서다
촬영은 일요일이었다.
서연은 일정표에 적힌 날짜를 몇 번이나 바라봤다.
하필 그날이었다.
도진이 어렵게 비워두었다던 하루.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연은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정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하루를 함께 보낸다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촬영 일정이 그날로 잡혔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도진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내려놓았다.
메시지를 썼다.
도진아.
지웠다.
이번 주 일요일 촬영이 잡혔어.
다시 지웠다.
한참을 그러다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던졌다.
“왜 내가 죄지은 사람 같지?”
혼잣말이 방 안에 떨어졌다.
잘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테스트 결과가 좋았고, 다시 자신을 찾아주는 곳이 생겼다.
그런데 도진에게 말하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서연은 알고 있었다.
도진에게 일요일 하루가 어떤 의미인지.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는 남자.
일 때문에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바카라임져야 할 사람도 많았다.
그런 그가 자신을 만나겠다고 하루를 비웠다.
서연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휴일이 아니었다.
도진이 보여준 마음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지만 촬영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서연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자신을 한참 바라봤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고 싶었다.
촬영하고 싶었다.
카메라 앞에 다시 서고 싶었다.
누군가의 여자이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 순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갔다.
“어.”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로 사람들의 말소리와 기계음이 섞여 있었다.
“바빠?”
“조금. 왜?”
“할 말 있어서.”
“말해.”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요일 있잖아.”
“응.”
“촬영 잡혔어.”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서연은 기다렸다.
“이번 일요일?”
“응.”
다시 침묵.
서연은 그 침묵이 싫었다.
차라리 서운하다고 말하면 좋겠는데.
“몇 시?”
도진이 물었다.
“아침부터.”
“몇 시에 끝나는데?”
“정확히 몰라.”
“그래.”
짧았다.
서연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화났어?”
“아니.”
“그런데 왜 그래.”
“내가 뭘.”
또 그 말이었다.
내가 뭘.
서연은 눈을 감았다.
“당신 지금 기분 나쁘잖아.”
“안 나빠.”
“도진아.”
“일해야 한다며. 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서연은 알았다.
도진은 서운했다.
“미안해.”
그 말을 하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다.
도진이 바로 물었다.
“뭐가 미안한데?”
“당신이 하루 비웠는데.”
“그게 왜 당신이 미안할 일이야.”
“그래도.”
“촬영하러 가.”
“도진아.”
“나 일해야 해. 나중에 전화할게.”
통화가 끝났다.
서연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서 내리지 못했다.
뚝 끊어진 통화음이 마음속에서도 계속 울리는 것 같았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아니.
말해야 했다.
숨길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서연은 침대 끝에 앉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랑은 행복만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미안함도 데려왔다.
기다림도,
서운함도,
눈치도 데려왔다.
그리고 가끔은 선택까지 요구했다.
서연은 문득 화가 났다.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인지 자신도 몰랐다.
도진에게?
촬영 일정에?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는 자신에게?
그날 저녁까지 도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서연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몇 번이고 휴대전화를 확인했을 것이다.
뭐 해?
화났어?
전화해도 돼?
그런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내지 않았다.
도진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에게도 필요했다.
밤 열 시가 넘었다.
서연은 다음 날 입을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진.
서연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받았다.
“응.”
“뭐 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묻는다.
서연은 피식 웃었다.
“옷 정리해.”
“밥은?”
“먹었어.”
“뭐 먹었는데?”
“대충.”
“대충 먹지 말랬잖아.”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진도 잠시 조용해졌다.
결국 서연이 먼저 말했다.
“화났으면 화났다고 해.”
“안 났다니까.”
“그럼 서운해?”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서연은 기다렸다.
한참 뒤 도진이 말했다.
“조금.”
서연의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왜?”
“기다렸으니까.”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도진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하루 종일 같이 있으려고 했어.”
“알아.”
“어디 갈지도 좀 찾아봤고.”
서연의 눈이 커졌다.
“당신이?”
“왜. 내가 그런 것도 못 해?”
“아니.”
서연은 웃으려다가 웃지 못했다.
“몰랐어.”
“말 안 했으니까.”
도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서 서운했어.”
처음이었다.
도진이 그렇게 정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한 것은.
화난 척도,
괜찮은 척도 하지 않고.
그냥 서운했다고.
서연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미안하라고 한 얘기 아니야.”
“알아.”
“나도 생각해 봤어.”
“뭘?”
“내가 왜 기분이 나빴나.”
서연은 가만히 들었다.
“촬영 때문에 가 아니더라.”
“그럼?”
도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당신한테 자꾸 내 자리가 뒤로 밀리는 것 같아서.”
서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도진아.”
“알아. 당신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 거.”
“응.”
“당신 바쁜 것도 알고.”
“응.”
“근데 나도 사람이잖아.”
그 말 앞에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도진도 사람이었다.
질투했고,
기다렸고,
서운했다.
서연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보고 싶어.”
서연이 말했다.
“그럼 일요일 나 만나.”
“촬영 있다니까.”
“끝나고.”
“몇 시에 끝날지 몰라.”
“기다리면 되지.”
서연이 멈칫했다.
“또 기다리게?”
도진이 웃었다.
“나 요즘 기다리는 거 연습하잖아.”
서연도 웃었다.
조금 전까지 무거웠던 마음이 살짝 풀렸다.
“밤늦게 끝날 수도 있어.”
“그럼 늦게 보면 되고.”
“한 시간밖에 못 볼 수도 있어.”
“한 시간이면 어때.”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이 말했다.
“하루 다 못 가진다고 안 보는 것보다 낫잖아.”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동안 자신이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
잠깐이라도 서로를 향해 움직이는 마음.
“그럼 촬영 끝나고 전화할게.”
“응.”
“근데 너무 늦으면 그냥 집에 가.”
“그건 내가 정해.”
서연이 웃었다.
“고집은.”
“당신도 만만치 않아.”
두 사람은 한참을 더 이야기했다.
통화를 끝내기 전 도진이 말했다.
“서연아.”
“응.”
“촬영 잘해.”
“응.”
“나 신경 쓰지 말고.”
서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남자 배우랑 연기해도?”
도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 얘기는 하지 마.”
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질투하네.”
“한다. 왜.”
이번에는 너무 당당해서 서연이 더 크게 웃었다.
“그래도 하라고?”
“일이잖아.”
“많이 컸네, 도진 씨.”
“대신.”
“또 대신.”
“끝나고 나한테 와.”
서연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응.”
일요일 아침.
서연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화장은 평소보다 조금 또렷하게 했다.
긴장됐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처음 제대로 대사를 하는 것도.
그리고 촬영이 끝난 뒤 도진을 만나는 것도.
휴대전화가 울렸다.
도진의 메시지였다.
배우님, 잘하고 오세요.
서연은 웃었다.
그리고 답했다.
끝나고 도망가지 말고 기다려.
곧바로 답이 왔다.
오늘은 안 사라져.
그 한마디를 보고 서연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은 안 사라져.
서연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몰랐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분위기는 분주했다.
스태프들이 움직이고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서연은 대본을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이 커졌다.
오늘 촬영할 장면이 지난 미팅 때와 달라져 있었다.
중년의 첫사랑이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마지막에 짧은 포옹이 있었다.
서연은 대본의 마지막 줄을 한참 바라봤다.
포옹.
도진이 알면 또 난리가 나겠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왜 웃으세요?”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이 돌아봤다.
오늘 상대역이었다.
지난번부터 계속 마주쳤던 그 남자.
“아니에요.”
“마지막 장면 보셨죠?”
“네.”
남자가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촬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긴장했다.
하지만 카메라가 돌아가자 서연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랜 세월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 여자.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던 마음.
지나간 세월.
후회.
그리움.
서연은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끌어냈다.
도진을 처음 기다렸던 밤.
연락되지 않아 아팠던 시간.
불꽃이었던 걸까 생각했던 새벽.
그리고 안 사라지면 된다고 말했던 순간.
모든 감정이 연기가 되었다.
“컷!”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습니다.”
서연은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포옹 장면 갈게요.”
서연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상대 배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으시죠?”
“네.”
카메라가 돌아갔다.
남자가 서연을 바라봤다.
대사를 했다.
“다시 만나면 꼭 한번 안아보고 싶었어요.”
서연은 대본대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갔다.
남자의 팔이 서연의 어깨를 감쌌다.
그 순간이었다.
촬영장 입구 쪽에서 누군가 멈춰 섰다.
검은 셔츠.
익숙한 얼굴.
도진이었다.
서연의 눈이 순간 커졌다.
도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서연.
그리고 서연을 안고 있는 남자.
“컷!”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좋아요. 아주 좋았습니다.”
남자가 서연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서연의 시선은 이미 도진에게 가 있었다.
도진은 웃지 않았다.
화난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 표정이 오히려 서연을 더 불안하게 했다.
서연이 한 걸음 움직였다.
“도진아.”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다시 불렀다.
“도진아.”
그제야 도진이 말했다.
“나 너무 일찍 왔나 봐.”
목소리는 차분했다.
서연은 그 말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질투인지.
서운함인지.
아니면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그런데 도진은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 아주 작게 웃었다.
“배우님.”
서연은 그를 바라봤다.
“연기 잘하네.”
그리고 돌아섰다.
“도진아!”
서연이 그를 따라가려 했다.
그때 감독이 불렀다.
“서연 씨, 한 컷만 더 갈게요.”
서연의 발이 멈췄다.
촬영장 문밖으로 나가는 도진.
자신을 부르는 감독.
서연은 두 방향 사이에 서 있었다.
예전의 서연이었다면 도진을 따라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연은 문밖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네.”
카메라 앞으로 다시 걸어갔다.
도진을 사랑했다.
그래도 자신의 삶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그 사실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촬영장을 나온 도진은 건물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떠난 것이 아니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연기인 거 알아.”
잠시 뒤 피식 웃었다.
“아는데 기분 나쁜 건 또 뭐냐.”
그는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서연이 자신의 일을 끝내고 나오기를.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세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배우는 사람은 서연만이 아니었다.
도진도 지금,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
한 시간 뒤.
촬영장 문이 열렸다.
서연이 뛰어나왔다.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연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왜 안 갔어?”
도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안 사라진다고 했잖아.”
그 한마디에 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런데 도진이 한 걸음 다가오더니 낮게 말했다.
“근데.”
“응?”
“나도 하나는 받아야겠다.”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뭘?”
도진의 시선이 조금 전 촬영장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서연에게 돌아왔다.
“아까 저 사람한테 준 거.”
서연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웃음을 터뜨렸다.
“포옹?”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질투하는 거야?”
도진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응.”
서연의 웃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도진이 말했다.
“연기는 끝났잖아.”
“그래서?”
도진은 두 팔을 살짝 벌렸다.
“이제 진짜 하자.”
서연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도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23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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