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우리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7화. 우리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차가 없었다.

그래서 만나는 날이면 늘 지하철역에서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태우러 오는 일도 없었고,
집 앞까지 데리러 오는 일도 없었다.

“어디서 볼까요?”

“중간에서 봐요.”

둘은 노선도를 들여다보며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덜 먼 곳을 찾았다.

서연은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도진을 만나러 가는 날이면
평소 지루하기만 하던 지하철이 조금 달라졌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한번 보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입술도 한번 확인했다.

그러다 혼자 웃었다.

‘누가 보면 스무 살인 줄 알겠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음이라는 게 나이까지 계산해 가며 뛰는 물건은 아닌 모양이었다.


도진을 만나면 늘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없어.”

“진짜?”

“응.”

“옷은?”

“많아.”

“가방?”

“있어.”

“신발?”

서연이 웃었다.

“도진 씨.”

“왜요?”

“나 물건 사러 나온 거 아니야.”

도진도 웃었다.

“그래도 뭐 하나 해주고 싶잖아요.”

그 말이 좋았다.

무엇을 받느냐보다

자신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서연에게는 낯설고 고마웠다.

도진은 매장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여기 한번 들어가 보고,

저기 한번 구경하고.

서연에게 어울릴 만한 것이 보이면 걸음을 멈췄다.

“이거 괜찮겠다.”

“필요 없어.”

“한번 봐봐요.”

“진짜 괜찮아.”

서연은 손사래를 쳤지만
속으로는 조금 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주는 쪽으로 살았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다’

는 마음을 보이는 것 자체가 좋았다.

가격도 물건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게 좋았다.


그런데 도진에게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가 하나 있었다.

술.

밥을 먹으면 술.

이야기가 길어지면 술.

기분이 좋으면 술.

조금 힘든 날에도 술.

서연은 처음에 그 사실을 몰랐다.

첫 술자리에서 도진이 소주병을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다.

“한잔해요.”

서연은 잔을 바라봤다.

“나 술 잘 못 마시는데.”

“조금만.”

“진짜 못 마셔.”

“한 모금만.”

서연은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함께 만났는데
한잔 정도는 맞춰주는 게 예의인가 싶었다.

잔을 들었다.

입술을 댔다.

아주 조금 마셨다.

그리고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도진이 물었다.

“왜요?”

서연은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이걸 왜 마셔?”

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요?”

“맛이 없잖아.”

“원래 소주가 그런 맛이지.”

“그런데 이걸 돈 주고 사 먹어?”

도진이 더 크게 웃었다.

“진짜 술 안 마시는구나.”

“안 마신다니까.”

서연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 남은 소주 맛을 없애려고
물컵을 거의 비워버렸다.

도진은 그런 서연이 재미있는지 계속 웃었다.

“이렇게 술 못 마시는 사람 처음 봤네.”

“나는 도진 씨가 더 신기해.”

“왜?”

“이 맛없는 걸 어떻게 그렇게 잘 마셔?”

“맛으로 마시는 게 아니죠.”

“그럼?”

도진은 잠시 생각하다 웃었다.

“기분으로?”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도진에게 술은 꽤 가까운 친구 같았다.

서연의 눈에는 거의 물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한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어도

도진은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술잔 사이사이 담배를 피웠다.

한 대를 피우고 들어왔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나갔다.

서연은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했다.

평생 담배를 피워본 적도 없었고
옷에 밴 냄새조차 싫었다.

도진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면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코끝을 찡그렸다.

도진이 눈치챘다.

“담배 냄새 싫죠?”

“응.”

서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많이 싫어.”

“미안.”

도진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서연은 그런 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했다.

술도 싫고,

담배도 싫었다.

그런데 도진은 싫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앞뒤가 맞지 않았다.


도진의 말투 때문이었을까.

서연은 그의 말하는 방식이 좋았다.

다정했다.

무언가를 부탁할 때도 명령하는 느낌이 없었고,

서연의 표정이 조금만 달라져도 물었다.

“왜 그래요?”

“뭐 기분 나쁜 거 있어요?”

여자의 마음을 잘 살피는 사람 같았다.

가끔은 서연보다 먼저 서연의 표정을 읽었다.

그럴 때마다 서연은 생각했다.

‘이 사람은 여자를 좀 아는구나.’

도진에게는 기본적인 생각 하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에게는 잘해줘야 한다는 것.

좋아하는 여자라면 챙겨줘야 하고,

예쁘다고 말해주고,

작은 것이라도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

서연은 그런 도진이 좋았다.

자신이 오랫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다정함이었으니까.


술이 조금 들어간 어느 날,

도진이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연애가 참 힘들었어요.”

“왜?”

“헤어진 사람들이 나한테 집착을 많이 했어요.”

서연이 도진을 바라봤다.

“집착?”

“응.”

도진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연락 가지고도 그렇고,
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하고,
계속 확인하려고 하고.”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서연은 도진이 안타까웠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그 사랑이 지나쳐 숨을 쉬지 못할 정도가 되면
얼마나 피곤할까 싶었다.

서연은 말했다.

“그래서 헤어진 거야?”

“그런 것도 있었죠.”

도진은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 더 했다.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자신은 잘해줬고,

상대는 점점 자신에게 집착했고,

결국 관계가 힘들어졌다는 이야기.

서연은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도진을 힘들게 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연락이 조금 늦어도 기다리고,

일이 바쁘다고 하면 이해하고,

자기 시간을 달라고 하면 존중해주고 싶었다.

서연은 그것이 성숙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는.


두 번째 술자리에서 도진이 맥주를 따라줬다.

서연은 처음에는 몇 모금 마셨다.

도진과 잔도 부딪쳤다.

“짠.”

“짠.”

그런데 역시 맛이 없었다.

배만 불렀다.

서연은 결국 잔을 내려놓았다.

“나 선언할 게 있어.”

도진이 눈을 크게 떴다.

“뭔데요?”

“앞으로 나한테 소주랑 맥주 권하지 마.”

“왜?”

“맛없어.”

“술이 원래…”

“그 말하지 마.”

서연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난 달달한 거 아니면 안 마실 거야.”

도진이 웃었다.

“선전포고예요?”

“응. 공식 발표.”

“알겠습니다.”

도진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서연 씨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둘은 웃었다.


그리고 다음번에 만났을 때,

도진이 무언가를 들고 왔다.

“이건 괜찮을 거예요.”

“뭔데?”

복분자주였다.

서연이 병을 바라보다 도진을 봤다.

“이건 달아?”

“소주보다는.”

“확실해?”

“일단 먹어봐요.”

서연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조금 따라 마셨다.

잠시 입안에서 맛을 보았다.

도진이 표정을 살폈다.

“어때요?”

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도진이 기다렸다.

“먹을 만하네.”

도진이 웃었다.

“드디어 합격.”

서연도 웃었다.

“소주는 영원히 탈락.”

그날 둘은 복분자주 한 병을 나누어 마셨다.

도진에게는 별것 아닌 술 한 병이었겠지만

서연에게는 조금 특별했다.

자신이 싫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다른 것을 준비해 온 마음.

그게 좋았다.


잔을 들며 도진이 물었다.

“괜찮아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응. 이 정도는.”

두 사람의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서연은 아주 조금씩 마셨다.

도진은 그런 서연을 보며 웃었다.

그날 서연은 술맛보다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도진의 눈빛을 더 오래 기억했다.


두 사람은 참 달랐다.

도진에게 술은 일상이었고

서연에게 술은 낯선 것이었다.

도진에게 담배는 오래된 습관이었고

서연에게 담배 냄새는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달랐고,

살아온 방식도 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화는 잘 통했다.

도진이 웃으면 서연도 웃었고,

서연이 툭 던지는 말에
도진은 한참을 웃었다.

서연은 생각했다.

사람이 꼭 같아야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다른 부분은 맞춰가면 되는 거라고.

좋아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서연은 자신의 옷깃을 슬쩍 맡았다.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내가 진짜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다.’

평소 같으면 질색했을 냄새인데

오늘은 그 냄새 너머로
도진의 웃는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그날 밤 도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 즐거웠어요.’

서연은 답했다.

‘나도.’

잠시 생각하다 하나를 덧붙였다.

‘복분자는 합격.’

도진에게서 바로 답이 왔다.

‘그럼 다음에도 복분자.’

서연은 웃었다.

‘담배는 불합격.’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 메시지가 왔다.

‘그건 노력해 볼게요.’

서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노력해 볼게요.

그 말이 좋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조금씩 상대방 쪽으로 걸어오는 것.

서연은 그게 연애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참아주는 것과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도진이 몇 번이나 들려준

‘나를 사랑했던 여자들은 결국 집착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서연이 전혀 다른 마음으로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것도.


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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