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9화. 아무도 묻지 않은 아이의 이름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9화. 아무도 묻지 않은 아이의 이름

1979년 11월.

서울의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골목마다 연탄을 들여놓는 손수레가 오갔고, 시장에는 무와 배추가 산처럼 쌓였다. 아침이면 집집마다 김장 준비로 부산했다.

김씨 집안의 높은 돌담 안에서도 겨울맞이가 시작되었다.

마당에는 배추를 절이는 커다란 함지가 놓였고, 부엌에서는 멸치와 다시마를 끓이는 냄새가 났다.

감나무에는 마지막 감 몇 개가 남아 있었다.

김도현은 그 감을 따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가장 잘 익은 감을 골라 드리는 것이 자신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감을 따자고 하지 않았다.

도현은 아침마다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불면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이 흔들렸다.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감.

도현은 어쩐지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는 아이.

그해 도현은 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아홉 살의 도현에게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었다.


---

그날 아침.

윤정애는 부엌에서 김장에 쓸 양념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째 딸 명희는 무를 채 썰었고, 셋째 명자는 마늘을 까고 있었다.

둘째 명숙은 마루에 앉아 친구에게서 빌린 잡지를 읽었다.

막내 명옥은 배추를 나르다 말고 도현을 불렀다.

“야, 도현아.”

도현이 돌아보았다.

“응?”

“이거 좀 옮겨.”

마당 한쪽에는 절인 배추가 담긴 함지가 놓여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혼자 들기에는 무거워 보였다.

“같이 들자.”

명옥은 눈을 찌푸렸다.

“그것도 혼자 못 들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함지 양쪽을 붙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배추와 물이 가득 담긴 함지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들어 올렸을 때였다.

손이 미끄러졌다.

쿵.

함지가 바닥에 내려앉으며 소금물이 튀었다.

“어머!”

명옥이 소리쳤다.

부엌에서 정애가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명옥은 도현을 가리켰다.

“도현이가 함지를 엎을 뻔했어.”

정애는 젖은 마당을 바라보았다.

“도현아!”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조심해야지!”

“네.”

“아침부터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니?”

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명희가 부엌에서 나왔다.

“엄마, 제가 같이 들라고 했어야 했는데…”

정애가 딸을 바라보았다.

“넌 하던 일이나 해.”

명희는 입을 다물었다.

도현은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찬 소금물이 손등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들었다.

따끔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집에서 아프다는 말은 때때로 또 다른 꾸중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

김장 준비가 끝날 무렵 박노식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도현이 젖은 걸레를 짜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도련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손이 다 젖으셨네요.”

“괜찮아요.”

노식은 아이의 손을 살폈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붉은 상처가 보였다.

“잠깐 이리 오십시오.”

그는 도현을 사랑채 뒤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약통을 꺼냈다.

“이거 바르세요.”

도현은 약통을 바라보았다.

“전에 주신 것도 있어요.”

“그건 다 쓰셨습니까?”

“아직요.”

“그럼 이것도 가지고 계십시오.”

도현은 조심스럽게 받았다.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네.”

“요즘 학교는 어떻습니까?”

“재미있어요.”

“친구들은요?”

“있어요.”

“많습니까?”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서윤이요.”

노식은 희미하게 웃었다.

“황씨 집 따님 말씀이군요.”

“네.”

“그 아이는 참 씩씩하더군요.”

도현도 조금 웃었다.

“말도 많아요.”

노식은 아이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집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습니까?”

“네. 맨날 뭐든 물어봐요.”

“도련님은 귀찮지 않으십니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윤이는 제가 말 안 해도 기다려줘요.”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짧은 말에 아이의 외로움이 모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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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김태중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었다.

사업상 중요한 계약을 마무리한 뒤 잠시 쉴 생각이었다.

태중은 대문을 들어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도현아!”

도현은 바카라을 읽다가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

태중은 웃으며 아들을 안아 올렸다.

“우리 아들 많이 컸구나.”

도현은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태중은 아들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선물이다.”

도현은 눈을 크게 떴다.

“뭔데요?”

“열어봐.”

상자 안에는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검은 가죽줄이 달린 작은 시계였다.

도현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제 거예요?”

“그럼.”

태중은 아들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도현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태중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마루에 서 있던 명숙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태중은 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정애야!”

그가 안채를 향해 불렀다.

“우리 아들 시계 하나 사왔다.”

정애는 부엌에서 나오며 억지로 웃었다.

“잘하셨네요.”

태중은 아들의 손목을 다시 들어 보였다.

“멋있지?”

정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오래된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

그날 저녁.

김씨 집안의 식탁은 오랜만에 떠들썩했다.

태중은 사업 이야기를 했고, 딸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명희는 취업을 고민하고 있었고, 명숙은 진학 문제로 마음이 복잡했다.

태중은 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도현에게 물었다.

“도현아.”

“네.”

“이번 시험은 어땠니?”

“잘 봤어요.”

“몇 등 했어?”

“일등이요.”

태중은 크게 웃었다.

“역시 우리 아들이야!”

그는 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겠구나.”

명숙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태중이 돌아보았다.

“왜?”

“저도 이번에 성적 올랐어요.”

태중은 웃었다.

“그래? 잘했구나.”

명숙은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현아, 앞으로도 계속 일등 해야 한다.”

명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애가 물었다.

“어디 가니?”

“배불러요.”

명숙은 방으로 들어갔다.

태중은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쟤는 왜 저러지?”

정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기쁘던 선물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

그날 밤.

도현은 작은방에서 시계를 풀어 바카라상 위에 놓았다.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째깍.

째깍.

도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할수록 누나들은 자신을 더 미워했다.

도현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누나들이 전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첫째 누나 명희는 가끔 자신을 도와주었다.

막내 명옥은 혼자 있을 때는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둘째 누나가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도현은 바카라상 위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랍을 열었다.

푸른색 공바카라이 있었다.

그는 공바카라을 펼쳤다.

‘오늘 아버지가 시계를 사주셨다.’

잠시 멈추었다.

‘기뻤다.’

다음 문장을 쓰려다 연필이 멈췄다.

한참 뒤 다시 적었다.

‘그런데 누나는 화가 났다.’

도현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었다.

‘나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

그는 공바카라을 덮었다.

그 질문에는 아직 답이 없었다.


---

같은 날 밤.

명숙은 어머니 방에 앉아 있었다.

정애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명숙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물었다.

“엄마.”

“왜?”

“아버지는 왜 도현이만 좋아해?”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또 그 소리니?”

명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아버지 딸 아니야?”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럼 왜 맨날 도현이만…”

명숙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가 그렇게 안 웃어.”

정애는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명숙의 눈에는 자신이 젊었을 때 느꼈던 서러움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았던 시선.

딸 넷을 낳고도 집안의 대를 잇지 못했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세월.

그 모든 것이 다시 떠올랐다.

정애는 조용히 말했다.

“명숙아.”

“응.”

“네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야.”

명숙은 눈물을 닦았다.

“그럼 왜?”

정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 말했다.

“옛날 어른들은 아들을 특별하게 생각했어.”

명숙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우리는?”

정애는 딸의 손을 잡았다.

“너희도 소중하지.”

명숙은 고개를 저었다.

“말로만 그러잖아.”

정애의 눈가가 젖었다.

그녀는 딸을 끌어안았다.

명숙은 어머니 품에서 울었다.

정애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날 두 사람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끝내 말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받은 상처가 도현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며칠 뒤.

황씨 집안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서윤이 학교에서 친구와 다투고 돌아온 것이었다.

전옥분은 손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혜진이가 나한테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

“내가 미영이 욕했다고 했어.”

옥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안 했니?”

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

“안 했어!”

“그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몰라.”

옥분은 손녀를 옆에 앉혔다.

“서윤아.”

“응.”

“사람은 때때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도 미워하게 만들고 싶어 한단다.”

서윤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혼자 미워하면 마음이 불편하니까.”

서윤은 한참 생각했다.

“그럼 나쁜 거네.”

옥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서윤은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

옥분은 잠시 생각했다.

“먼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지.”

“그래도 거짓말하면?”

“그때는 네가 아는 진실을 차분히 말하면 돼.”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옥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서윤아.”

“응?”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건 기억해.”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옳은데도?”

“그래.”

옥분은 조용히 말했다.

“사람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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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윤은 학교에서 혜진을 만났다.

“박혜진.”

혜진이 돌아보았다.

“왜?”

“너 어제 왜 그랬어?”

혜진은 시선을 피했다.

“뭘?”

“내가 미영이 욕했다고 했잖아.”

혜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윤은 팔짱을 꼈다.

“왜 그랬냐고.”

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그냥 뭐?”

혜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맨날 미영이랑만 놀잖아.”

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

“뭐?”

혜진은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미영이가 더 좋은 것 같아서.”

서윤은 한참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혜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서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게 말하지.”

혜진은 고개를 들었다.

“뭐?”

“나랑도 놀고 싶다고.”

혜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서윤은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는 거짓말하지 마.”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윤은 웃었다.

“그럼 됐어.”

두 아이는 다시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도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서윤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은 상처받으면 뒤로 물러났지만, 서윤은 상처받아도 먼저 다가갔다.

그 차이가 도현에게는 신기했다.


---

1979년 12월.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다.

김씨 집안의 감나무 가지에도 하얀 눈이 쌓였다.

도현은 작은방 창문을 열고 눈을 바라보았다.

작년 겨울 서윤이 만들어주었던 작은 눈덩이가 떠올랐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도현은 그날 서윤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친구니까.’

그 짧은 말은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도현은 바카라상 서랍을 열었다.

푸른색 공바카라과 종이감이 있었다.

그는 종이감을 꺼냈다.

조금 구겨졌지만 여전히 주황빛을 띠고 있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급히 종이감을 서랍에 넣었다.

문이 열렸다.

명옥이었다.

“도현아.”

“응.”

명옥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너 안 추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명옥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부르셔.”

도현은 바카라을 덮었다.

“알았어.”

명옥은 돌아서려다 멈추었다.

“도현아.”

“응?”

명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도현이 바라보았다.

“언제?”

명옥은 한참 망설였다.

“찻잔 깨졌을 때.”

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명옥은 고개를 숙였다.

“나 봤어.”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숙 언니가 깬 거.”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한참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명옥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무서워서.”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명옥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옥은 한참 서 있다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도현은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미워해서 거짓말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무서워서 진실을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현은 서랍을 열었다.

푸른색 공바카라을 펼쳤다.

그리고 적었다.

‘오늘 명옥 누나가 미안하다고 했다.’

잠시 멈추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그날 밤 늦게.

박노식은 사랑채에서 오래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김만석이 남긴 수첩을 다시 펼쳤다.

‘한연화 관련 사항은 별도 보관.’

그 문장이 적힌 페이지였다.

노식은 수첩의 앞뒤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작은 숫자 하나를 발견했다.

‘三.’

삼.

그는 한참 그 글자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페이지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페이지에는 숫자가 없었다.

노식은 서랍을 열었다.

만석이 사용하던 오래된 문서함이었다.

세 개의 작은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 칸에는 토지 관련 서류가 들어 있었다.

두 번째 칸에는 거래처 장부가 있었다.

세 번째 칸은 비어 있었다.

노식은 손을 멈추었다.

세 번째 칸.

그는 안쪽을 자세히 살폈다.

나무판 하나가 다른 부분보다 조금 두꺼워 보였다.

노식은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딸깍.

작은 소리가 났다.

나무판이 조금 움직였다.

노식은 숨을 멈추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는 얇은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봉투는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겉면에는 김만석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열지 말 것.’

노식은 봉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만석을 평생 모셨다.

그의 명령을 어긴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만석은 세상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비밀 때문에 한 아이가 자신의 뿌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었다.

노식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봉투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한연화의 주소일까.

그녀의 가족관계일까.

아니면 도현의 출생과 관련된 또 다른 사실일까.

노식은 등잔불 가까이 봉투를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봉투 끝을 열었다.

그 순간 사랑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노식은 급히 봉투를 덮었다.

“누구십니까?”

잠시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예요.”

윤정애였다.

노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애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아저씨.”

“예, 마님.”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

“서류를 조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정애는 방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식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게…”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애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봉투를 어디서 찾으셨어요?”

노식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정애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저씨.”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왔다.

“그건 열면 안 돼요.”

노식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습니까?”

정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식은 조용히 물었다.

“마님은 이 봉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정애의 입술이 떨렸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그건…”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밖에서는 겨울바람이 불었다.

사랑채 문풍지가 가늘게 떨렸다.

노식은 봉투를 손에 쥔 채 정애를 바라보았다.

정애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가 남긴 거예요.”

노식의 눈이 커졌다.

“한연화 씨가 말입니까?”

정애는 고개를 숙였다.

“네.”

노식은 봉투를 바라보았다.

정애는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도현이에게 남긴 거예요.”

방 안에 긴 침묵이 흘렀다.

노식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님이 그러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정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아이가 알면 안 된다고.”

노식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한 여자가 자신의 아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들어 있었다.

아홉 해 동안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말.

그리고 그 말을 받아야 할 아이는 지금 높은 담장 안의 작은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자신을 낳아준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노식은 봉투를 가슴 가까이 가져갔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김만석의 명령을 어길 결심을 했다.

그러나 아직 봉투를 열지는 않았다.

정애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노식은 정애를 바라보았다.

“마님.”

그는 천천히 말했다.

“언제까지 숨기실 생각입니까?”

정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노식은 다시 물었다.

“도현 도련님이 어른이 되어서도요?”

정애의 눈물이 떨어졌다.

“그 아이가 알게 되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식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뒤 정애가 말했다.

“우리 집은 무너질 거예요.”

노식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봉투를 바라보았다.

한 아이의 출생을 숨기기 위해 세운 집안의 평화.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침묵해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

노식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무너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집안이 아니라 거짓말로 세워진 질서인지도 모른다고.


---

같은 시각.

도현은 작은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사준 시계였다.

째깍.

째깍.

초침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도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어른이 될 것이다.

어른이 되면 이 집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비밀 하나가 사랑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눈은 밤새 내렸다.

감나무 가지에 하얀 눈이 쌓였다.

그리고 사랑채의 작은 등잔불은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그 안에서는 한 여자가 남긴 봉투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진실을 지키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진실을 감추려 했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 아이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는 그 아이를 낳게 한 어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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