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0화. 어머니가 아닌 여자의 편지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0화. 어머니가 아닌 여자의 편지

1979년 12월.

서울에 두 번째 큰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김씨 집안의 높은 돌담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처마 끝에서는 고드름이 자라고 있었고, 사랑채 문풍지는 바람이 불 때마다 가늘게 떨렸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감나무는 잎을 모두 떨군 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에서 김도현은 오래전 할아버지와 함께 감을 따던 날들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날 밤, 도현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랑채에서는 아홉 해 동안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편지 한 통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박노식과 윤정애였다.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길어졌다 짧아졌다.

정애는 노식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봉투에는 죽은 김만석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열지 말 것.'

노식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마님께서는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정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 도련님에게 남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지요.”

“그렇다면 왜 도련님에게 전하지 않았습니까?”

정애는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저씨는 모르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그 아이가 태어나던 날부터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노식은 정애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그날을 기억했다.

그러나 같은 날을 살아낸 사람이라고 해서 같은 상처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정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은 도현이를 안고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셨어요. 김씨 집안의 대가 이어졌다고.”

그녀는 마른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아무도 제게 묻지 않았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괜찮은지.”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애는 봉투를 가리켰다.

“저 편지가 아이에게 가는 순간, 그 여자는 다시 이 집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한연화 씨는 이미 오래전에 떠났습니다.”

“떠났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정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그 아이가 누구 배 속에서 나왔는지.”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압니다.”

“그런데 저는요?”

정애가 물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무엇이었을까요?”

노식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정애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날부터 저는 어머니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된 것 같지는 않았어요.”

등잔불이 흔들렸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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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월.

한연화가 아이를 낳은 날이었다.

스물네 살의 연화는 사흘 밤낮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그녀는 자꾸만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

작은 발.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젖을 찾던 입술.

연화는 아이의 얼굴을 손끝으로 만지며 속삭였다.

“우리 아가.”

누군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는 참 예쁘구나.”

그녀는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이미 이름을 정해놓았다.

김도현.

그녀의 성은 한씨였지만 아이는 김씨가 되어 살아갈 것이었다.

연화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사람이었다.

약속은 종이에 적혔고, 돈은 가족에게 건네졌다.

하지만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부터 약속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아이는 계약을 알지 못했다.

가문의 대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배가 고프면 울고, 따뜻한 품에 안기면 잠들었다.

연화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사흘도 되지 않은 아이가 어째서 벌써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야 할까.

그러나 그녀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날 오후, 윤정애가 방으로 들어왔다.

연화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두 여자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애는 아이를 보았다.

연화의 팔 안에서 잠든 작은 생명이었다.

“아이를 주세요.”

정애가 말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정애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연화는 아이를 더 꼭 안았다.

“조금만 더 안고 있으면 안 될까요?”

정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 역시 알았다.

눈앞의 여자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두 여자 모두 자신의 뜻대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한 사람은 아이를 낳고도 데리고 갈 수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정애는 연화를 미워했다.

그 여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건넸다.

정애는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이는 낯선 품에 안기자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뒤 울음을 터뜨렸다.

정애는 아이를 달랬다.

그러나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연화가 몸을 일으켰다.

“제가…”

정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아요.”

연화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정애는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방을 나왔다.

그날부터 김도현은 윤정애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나 두 여자의 마음속에는 그날의 울음소리가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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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사랑채의 등잔불 아래에서 정애는 눈물을 닦았다.

“처음에는 정말 잘 키우려고 했어요.”

노식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압니다.”

“아니요. 아저씨는 몰라요.”

정애는 고개를 저었다.

“도현이가 처음 걸었을 때도 제가 옆에 있었어요. 열이 나면 밤새 이마를 짚어봤고, 밥을 안 먹으면 죽을 끓였어요.”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늘 그러셨어요. 저 아이는 김씨 집안의 귀한 아들이라고.”

노식은 침묵했다.

“한 번도 제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정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그 아이를 보면 자꾸 그날이 생각났어요. 제가 아닌 여자가 아이를 안고 있던 모습이요.”

노식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도련님을 미워하셨습니까?”

정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워하려고 한 적 없어요.”

“하지만 도련님은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정애는 고개를 들었다.

노식은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님이 방문을 여시면 도련님은 먼저 표정을 살핍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기도 전에 잘못했다고 하십니다.”

정애의 입술이 떨렸다.

“그 아이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노식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마님께서 겪으신 일이 억울하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 일에 도련님이 바카라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노식이 자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아픈 것은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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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도현은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날 밤 내린 눈 때문에 골목길이 미끄러웠다.

그는 아버지가 사준 손목시계를 차고 바카라가방을 들었다.

안채에서는 명숙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 나 오늘 늦게 와.”

“어디 가는데?”

“친구 만나.”

“너 요즘 자꾸 늦는다.”

명숙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정애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저녁 전에는 들어와.”

명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 마루를 지나가자 명숙이 그를 불렀다.

“야.”

도현이 돌아보았다.

“네.”

“그 시계 아직도 차고 다니니?”

도현은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네.”

명숙은 코웃음을 쳤다.

“좋겠다. 아버지가 사준 거라서.”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이 다가왔다.

“한번 줘봐.”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왜요?”

“구경 좀 하자.”

그는 시계를 풀어 건넸다.

명숙은 시계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런 건 어린애한테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주셨어요.”

“알아. 네 아버지가.”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도현은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아버지이기도 하잖아요.”

명숙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명숙은 시계를 마루 위에 내려놓았다.

“가져가.”

도현은 시계를 집어 들었다.

그때 명숙이 낮게 말했다.

“너는 참 좋겠다.”

도현이 돌아보았다.

“뭐가요?”

명숙은 웃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도현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뭘요?”

명숙은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안채에서 정애가 날카롭게 불렀다.

“명숙아!”

명숙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정애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만해.”

명숙은 어머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요.”

도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엇을 그만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시계를 다시 차고 대문을 나섰다.

그러나 명숙의 말은 오래 귀에 남았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자신이 무엇을 모른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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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겨울방학을 앞두고 학예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영숙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시 낭송과 합창을 연습시켰다.

도현은 시를 낭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발음이 또렷했고, 문장을 정확하게 읽었다.

선생님은 도현을 칭찬했다.

“좋아. 그런데 조금 더 자신 있게 읽어보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실 뒤편에서는 서윤이 합창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서윤은 노래를 부르다가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도현도 작게 웃었다.

연습이 끝난 뒤 서윤이 다가왔다.

“오빠!”

“왜?”

“시 읽는 거 잘하더라.”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읽은 건데.”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듣기 좋았어.”

도현은 괜히 공바카라을 정리했다.

서윤은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 시계 예쁘다.”

“아버지가 사주셨어.”

“정말?”

“응.”

서윤은 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초침이 계속 움직이네.”

“시계니까.”

서윤은 눈을 흘겼다.

“그건 나도 알아.”

도현이 웃었다.

서윤도 웃었다.

그때 서윤이 물었다.

“오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

“왜?”

“아직 생각 안 해봤어.”

서윤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아.”

“뭔데?”

“선생님도 되고 싶고, 가게도 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도현은 웃었다.

“다 할 수 있어?”

서윤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면 되지.”

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쉬워?”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어려울 수도 있지.”

“그런데?”

“어려우면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윤은 늘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말했다.

도현은 그런 서윤이 부러웠다.

그에게 세상은 아직 두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서윤에게 세상은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곳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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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박노식은 서울역 근처의 작은 찻집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있었다.

이름은 오상필.

오래전 김만석의 토지 거래를 도왔던 사람이었다.

노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상필 씨.”

“말씀하십시오.”

“예전에 김 회장님 댁에서 일하던 여자 하나 기억하십니까?”

상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라니요?”

“한연화라는 사람입니다.”

상필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노식을 바라보았다.

“그 이름을 왜 이제 와서 찾으십니까?”

노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필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일은 끝난 줄 알았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노식은 잠시 망설였다.

“아이 때문입니다.”

상필은 한숨을 쉬었다.

“그 집 아들이요?”

“예.”

상필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잘 크고 있지 않습니까?”

노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필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노식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상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그가 물었다.

“그래서 친어머니를 찾으시겠다는 겁니까?”

노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럼요?”

“그 여자가 살아 있는지만 알고 싶습니다.”

상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차가 사라진 지 오래된 서울역 앞 거리에는 버스와 택시가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바쁘게 오갔다.

상필은 한참 뒤 말했다.

“연화 씨가 떠난 뒤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노식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디로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상필은 망설였다.

“그 여자를 데려왔던 중개인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백춘식이라고…”

노식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백춘식.”

상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르지요.”

노식은 수첩을 꺼냈다.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상필은 잠시 생각했다.

“예전에는 청량리 쪽에서 사람을 소개하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거기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노식은 이름을 적었다.

그것이 그날 얻은 전부였다.

한연화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찾아갈 이름 하나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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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윤정애는 도현의 작은방 앞에 서 있었다.

문 안에서는 연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정애는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았다.

노식이 전날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도련님은 마님이 방문을 여시면 먼저 표정을 살핍니다.’

정애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도현아.”

안에서 바카라을 덮는 소리가 났다.

“네, 어머니.”

“들어가도 되겠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

정애는 문을 열었다.

도현은 바카라상 앞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정애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이미 혼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부하니?”

“네.”

“어려운 건 없고?”

“없어요.”

정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바카라상.

낡은 바카라장.

얇은 이불.

창가에 놓인 물컵.

그리고 바카라상 위의 손목시계.

정애는 조용히 물었다.

“방은 춥지 않니?”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애는 아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는 겨울바람에 튼 자국이 있었다.

“손은 왜 그러니?”

도현은 손을 감추었다.

“그냥요.”

정애는 잠시 망설였다.

“약은 바르니?”

“네.”

“누가 줬어?”

“노식 아저씨가요.”

정애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카라상 위에 작은 귤 두 개를 내려놓았다.

“먹어라.”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저 주시는 거예요?”

정애는 가슴이 철렁했다.

귤 두 개를 주는 일에도 아이는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애는 그 자리에 조금 더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부터 사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때 도현이 불렀다.

“어머니.”

정애가 멈추었다.

“왜?”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저…”

“말해보렴.”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정애는 숨을 멈추었다.

“무슨 말이니?”

도현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는 저를 보면 자꾸 화가 나시잖아요.”

정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면 고칠게요.”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눈을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작아 보였다.

정애는 입술을 열었다.

“도현아…”

그러나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기다렸다.

정애는 그 앞에 서서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어.”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정애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공부 마저 해라.”

그녀는 방을 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정애는 복도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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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도현은 푸른색 공바카라을 펼쳤다.

선생님이 준 공바카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적었다.

‘오늘 어머니가 귤을 주셨다.’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하셨다.’

도현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적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슬퍼 보이셨을까.’

연필 끝이 멈추었다.

그는 서랍을 열었다.

서윤이 만들어준 종이감이 있었다.

도현은 종이감을 꺼내 귤 옆에 놓았다.

진짜 과일과 종이로 만든 과일.

하나는 먹으면 사라지고, 하나는 오래 남을 수 있었다.

도현은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바카라 마지막 줄에 적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미움받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는 공바카라을 덮었다.

그날 밤 도현은 귤 하나를 먹었다.

나머지 하나는 바카라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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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

새해가 밝았다.

김씨 집안에서는 차례를 지냈다.

김태중은 아들 도현에게 절하는 법을 다시 가르쳤다.

“도현아, 허리를 더 숙여야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중은 아들의 어깨를 바로잡았다.

“우리 집안의 제사는 네가 이어가야 한다.”

도현은 대답했다.

“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에게 집안의 제사는 할아버지 사진 앞에 절을 올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례가 끝난 뒤 친척들이 모였다.

큰아버지뻘 되는 친척이 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이 집 장손이 벌써 이렇게 컸네.”

태중은 웃었다.

“그렇지요.”

친척은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씨 집안의 뿌리를 잘 이어야 한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네.”

그때 방 한쪽에서 명숙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뿌리도 모르면서…”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누나?”

명숙은 시선을 피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도현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뿌리.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학교에서는 식물의 뿌리에 대해 배웠다.

뿌리는 땅속에 숨어 있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지탱한다.

그러나 사람에게도 뿌리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도현은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나무의 뿌리는 높은 담장 아래 깊숙이 뻗어 있을 것이다.

자신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그 질문을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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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박노식은 청량리의 오래된 골목을 걷고 있었다.

눈이 녹아 길은 질척거렸다.

노식은 오상필에게서 들은 주소를 찾아 헤맸다.

백춘식.

한연화를 김씨 집안에 소개했던 중개인.

그를 찾으면 오래된 비밀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노식은 좁은 골목 끝에 있는 작은 가게 앞에서 멈추었다.

간판에는 '춘식상회'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문을 열었다.

안에는 쉰을 훌쩍 넘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누구십니까?”

노식은 모자를 벗었다.

“백춘식 씨를 찾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접니다만.”

노식은 잠시 숨을 골랐다.

“오래전 일로 여쭐 것이 있습니다.”

백춘식은 그를 살폈다.

“무슨 일입니까?”

노식은 조용히 말했다.

“한연화라는 여자를 기억하십니까?”

그 순간 백춘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한참 노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씨 집안에서 오셨습니까?”

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백춘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게 문을 닫았다.

문밖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그는 다시 노식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를 왜 찾습니까?”

노식은 대답했다.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백춘식은 눈을 감았다.

한참 뒤 그가 말했다.

“그 아이가 벌써 열 살이 되었겠군요.”

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춘식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천천히 말했다.

“한연화는…”

그는 말을 멈추었다.

노식은 숨을 죽였다.

백춘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집에서 나온 뒤에도 한동안 아이를 잊지 못했습니다.”

노식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백춘식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나를 찾아왔었거든요.”

노식의 손이 멈추었다.

“언제 말입니까?”

“아이를 낳고 몇 달 뒤였습니다.”

백춘식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잘 있는지만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춘식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때 김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노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요?”

백춘식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집 어른이요.”

노식은 김만석을 떠올렸다.

그러나 백춘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분이었습니다.”

노식은 숨을 멈추었다.

백춘식은 말을 이었다.

“그 여자를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노식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만석만이 아니었다.

한연화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사람은 또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도 김씨 집안 안에 살고 있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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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김씨 집안의 마당에서는 도현이 감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그는 땅을 내려다보았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는 살아 있었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잎을 틔울 것이다.

도현은 손바닥으로 거친 나무껍질을 만졌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할아버지.”

바람이 불었다.

“사람도 뿌리를 모르면 못 자라나요?”

대답은 없었다.

그는 한참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잘 자라고 있는 거죠?”

가지 끝에 남아 있던 눈이 바람에 떨어졌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담장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 오빠!”

서윤이었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왜?”

“나와 봐!”

그는 대문으로 걸어갔다.

서윤은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거.”

도현은 봉투를 받았다.

“뭔데?”

“군고구마.”

서윤은 웃었다.

“할머니가 구워주셨어.”

도현은 봉투를 열었다.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서윤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빨리 먹어. 식기 전에.”

도현은 고구마를 반으로 갈랐다.

노란 속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그는 반쪽을 서윤에게 건넸다.

“너도 먹어.”

서윤은 웃었다.

“나 먹었어.”

“그래도.”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 받아들었다.

두 아이는 골목 돌계단에 앉았다.

서윤은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었다.

“달다.”

도현도 웃었다.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도현이 물었다.

“서윤아.”

“왜?”

“사람은 왜 자기 집에서 태어나는 걸까?”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야?”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왜 어떤 사람은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서윤은 고구마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도현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어떤 집은 웃음소리가 많고 어떤 집은 조용해?”

서윤은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오빠.”

“응.”

“집이 크다고 마음도 큰 건 아닌가 봐.”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웃었다.

“우리 집은 작아도 맨날 시끄럽잖아.”

도현은 웃었다.

“그렇지.”

“그러니까 오빠도 우리 집에 와서 시끄럽게 놀면 돼.”

도현은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도현은 웃었다.

“그냥.”

서윤도 웃었다.

두 아이는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따뜻한 고구마를 나누어 먹었다.

그 순간만큼은 높은 돌담도, 오래된 집안의 비밀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

그날 밤.

윤정애는 안채에서 오래된 배냇저고리를 꺼냈다.

그녀는 천을 펼쳐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도현이 처음 입었던 옷이었다.

작고 낡은 배냇저고리.

정애는 손끝으로 옷깃을 만졌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현아…”

그녀는 그 이름을 여러 번 불렀다.

자신이 낳지 않았지만 자신이 키운 아이.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할수록 자신의 상처가 떠올랐던 아이.

정애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이제 알고 있었다.

도현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를.

그 아이가 왜 작은방에서 혼자 바카라을 읽는지.

왜 무엇을 물어도 괜찮다고 대답하는지.

정애는 배냇저고리를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아홉 해 동안 쌓인 상처를 단 한마디로 지울 수 있을까.

정애는 한참 동안 울었다.

그러다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봉투 하나가 더 있었다.

김만석이 남긴 봉투와는 다른 것이었다.

겉면에는 아무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정애는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소박한 저고리를 입은 여자.

한연화였다.

정애는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사진을 왜 버리지 못했을까.

미워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정애는 사진을 뒤집었다.

뒷면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리 아기에게.'

정애의 손이 떨렸다.

그 아래에는 또 한 줄이 있었다.

'엄마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란다.'

정애는 숨을 멈추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전 한연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를 빼앗기듯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안아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여자.

정애는 사진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울었다.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한연화가 남긴 말의 무게를 온전히 느꼈다.

그 여자는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빼앗긴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아이를 얻었지만, 정작 아이에게 따뜻한 어머니가 되어주지 못했다.

정애는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한연화에게 하는 말인지.

도현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오래전 상처받았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정애는 사진을 접지 않았다.

그대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1980년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세상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김씨 집안의 시간은 여전히 과거에 묶여 있었다.

박노식은 한연화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고,

윤정애는 자신이 감추어온 죄바카라감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명숙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상처를 동생에게 돌리고 있었으며,

도현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른 채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서윤은 그런 도현의 곁에서 작은 고구마 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웃고 있었다.

누구도 아직 알지 못했다.

이 겨울에 시작된 작은 변화들이 훗날 얼마나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될지.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뿌리를 감춘다고 해서 나무가 다른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땅속 깊이 묻힌 뿌리는 보이지 않아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 닿게 될 것이었다.

김도현의 삶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모른 채.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그 이름을 마주하게 될 운명을 품은 채.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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