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것도 사랑이라면

기다려달랬지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8화. 기다리는 것도 사랑이라면

‘해원아.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

이번에는 네가 기다려줘.’

윤해원은 식탁 앞에 서서 메모를 세 번 읽었다.

커피에서는 아직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강태헌이 나간 지 오래되지 않았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전화할까.

어디냐고 물을까.

왜 말도 없이 갔느냐고 따질까.

손가락이 태헌의 이름 위에서 멈췄다.

그러다 내려놓았다.

“기다려달랬지.”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기다린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해원은 원래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연락도,

약속도,

사람의 마음도.

오지 않으면 먼저 돌아섰고,

늦어지면 혼자 결론을 내렸다.

기다리다 실망하는 것보다 먼저 포기하는 게 덜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태헌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믿고 기다리는 일.

해원은 커피를 들고 창가로 갔다.

제주의 아침은 맑았다.

어젯밤 함께 걸었던 바다가 멀리 보였다.

맑은 날에 우산을 쓰고 걸었던 자신들이 생각났다.

“미쳤지.”

웃음이 났다.

그런데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30분.

한 시간.

태헌에게 연락은 없었다.

해원은 집 안을 정리했다.

설거지를 했다.

세탁기를 돌렸다.

창문도 닦았다.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휴대전화만 볼 것 같아서였다.

결국 두 시간이 지나자 참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살아 있어?’

보내고 나니 우스웠다.

잠시 뒤.

답이 왔다.

‘응.’

그 한 글자에 마음이 놓였다.

해원은 바로 썼다.

‘어디야?’

그런데 보내기 직전 멈췄다.

지웠다.

대신 썼다.

‘알았어.’

이번에는 태헌이 물었다.

‘안 물어봐?’

해원은 피식 웃었다.

‘기다리라며.’

한참 뒤 답이 왔다.

‘조금만 더.’

‘응.’

그 ‘응’을 보내고 해원은 스스로 놀랐다.

예전 같으면 절대 못 했을 것이다.

왜.

어디.

누구랑.

언제 와.

그 모든 질문을 삼키고 단 한 글자.

응.

사랑은 어쩌면 묻는 것만큼 묻지 않는 것도 필요한지 몰랐다.

점심이 조금 지나 현관문이 열렸다.

해원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태헌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다녀왔어.”

해원은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디 갔다 왔어?”

태헌이 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뭔데?”

“열어봐.”

해원이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작은 열쇠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조그만 열쇠고리.

그 위에는 짧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해원’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이게 뭐야?”

“내가 제주에 자주 오는 친구한테 빌려 쓰는 작업실이 하나 있어.”

“작업실?”

“응. 바다 쪽에 작은 방.”

“그런 게 있었어?”

“응.”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줘?”

태헌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어제 네 얘기 듣고 생각했어.”

“무슨 얘기.”

“너는 누구 아내로 다시 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해원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응.”

“네 집에 내 물건을 가져다 놓는 건 싫을 것 같더라.”

“……”

“그래서 반대로 생각했어.”

태헌이 열쇠를 가리켰다.

“내 공간에 네 자리를 하나 만들면 되겠다고.”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이 살자는 뜻 아니야.”

태헌이 서둘러 말했다.

“부담 갖지 마.”

“그럼?”

“네가 제주 왔는데 혼자 있고 싶은 날 있잖아.”

“응.”

“여기 집에 있기 싫을 수도 있고.”

“응.”

“그럴 때 가.”

태헌이 웃었다.

“나 없어도.”

해원은 손바닥 위의 열쇠를 바라봤다.

“내가 왜 네 공간을 써?”

“내 거 아니야. 빌린 거야.”

“그게 그거지.”

“그럼 안 써도 돼.”

태헌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냥 갖고만 있어.”

그 말이 더 이상했다.

쓰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자주 오라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문 하나를 열어놓은 것이었다.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라고.

해원은 열쇠를 꼭 쥐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그거 하러 갔어?”

“응.”

“열쇠고리에 내 이름 새기러?”

“응.”

“전화 한 통 못 하고?”

“놀래주려고.”

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

“왜?”

“사고 난 지 며칠 됐다고 말도 없이 없어져.”

태헌이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미안.”

“나 별생각 다 했어.”

“또?”

“또가 아니라 당연한 거야.”

“알았어.”

“우리 규칙 추가.”

태헌이 웃었다.

“또?”

“말없이 사라지지 않기.”

“찬성.”

“어디 가는지는 말하기.”

“그건 조금 협의.”

“왜?”

“서프라이즈 해야 하잖아.”

“필요 없어.”

“나는 하고 싶은데.”

“그럼 제주에서 버리고 간다.”

태헌이 웃었다.

“무섭다, 내 여자친구.”

해원도 결국 웃었다.

점심을 먹고 둘은 태헌이 말한 작업실로 갔다.

차로 20분쯤 떨어진 곳이었다.

바다에서 조금 들어간 조용한 마을.

낮은 돌담 뒤로 작은 집 하나가 있었다.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문을 열자 나무 냄새가 났다.

작은 바카라상.

낡은 소파.

커피포트.

바카라 몇 권.

창밖으로는 돌담 너머 바다가 보였다.

해원은 천천히 안을 둘러봤다.

“좋다.”

“진짜?”

“응.”

“여기서 가끔 혼자 있어.”

“뭐 하면서?”

“아무것도.”

해원이 태헌을 돌아봤다.

“네가?”

“왜?”

“너도 아무것도 할 줄 알아?”

“잘하지.”

“의외네.”

태헌이 웃었다.

“사람들은 내가 계속 돌아다니니까 혼자 있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아.”

“나도 그랬어.”

“근데 반대야.”

태헌이 창가에 기대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해서 여행을 다니는 거야.”

해원은 그 말을 이해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혼자이고 싶어서 떠나는 날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누구의 역할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우리 닮았네.”

해원이 말했다.

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가 너 좋아하나 봐.”

“그건 좀 억지다.”

“진짜인데.”

태헌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해원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가에 앉아 있었다.

태헌은 바카라을 봤고,

해원은 바다를 봤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각자 다른 일을 했다.

신기했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계속 말하지 않아도 됐다.

해원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원하는 관계.

같이 있으면서도 혼자일 수 있는 사람.

침묵을 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모든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

“태헌아.”

“응.”

“나 여기 마음에 들어.”

태헌이 바카라에서 눈을 들었다.

“다행이다.”

“가끔 와도 돼?”

“열쇠 줬잖아.”

“너 없어도?”

“그러라고 준 거야.”

해원이 열쇠를 내려다봤다.

“이상하다.”

“뭐가?”

“예전 같으면 누가 나한테 열쇠 주면 부담스러웠을 것 같아.”

“지금은?”

해원은 잠시 생각했다.

“조금 좋아.”

태헌이 웃었다.

“조금?”

“응.”

“그 조금 또 나왔네.”

“많이는 부담스럽잖아.”

“알았어.”

태헌은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오후 둘은 다시 바다로 나갔다.

이번에는 우산이 없었다.

바람이 강했다.

해원의 머리가 계속 얼굴을 덮었다.

태헌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예전 같으면 해원은 조금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만히 있었다.

태헌의 손끝이 볼을 스쳤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왜.”

해원이 물었다.

“키스하고 싶어서.”

해원이 웃었다.

“이제는 허락 안 받아?”

“물어본 거잖아.”

“그게 질문이야?”

“응.”

해원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은 없었다.

바다와 바람뿐이었다.

“해.”

태헌이 웃었다.

“진짜?”

“마음 바뀌기 전에.”

태헌이 해원의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짧지 않았다.

급하지도 않았다.

바람이 불었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해원은 처음으로 태헌의 옷깃을 잡았다.

태헌의 손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키스가 끝난 뒤에도 둘은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마를 맞댄 채 잠시 웃었다.

태헌이 말했다.

“해원아.”

“응.”

“나 지금 행복해.”

해원의 가슴이 저렸다.

예전 같으면 그런 말을 들으면 무서웠을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의 행복을 바카라임져야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나도.”

처음으로 바로 대답했다.

태헌의 눈이 커졌다.

“뭐?”

“두 번 말 안 해.”

“방금 나도 행복하다고 한 거야?”

“몰라.”

“윤해원.”

해원이 웃으며 먼저 걸었다.

태헌이 뒤따라왔다.

“한 번만 다시 말해봐.”

“싫어.”

“녹음 못 했잖아.”

“미쳤어.”

두 사람의 웃음이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저녁.

해원의 제주 집으로 돌아왔다.

간단히 밥을 먹고 와인 한 잔씩을 마셨다.

태헌은 어젯밤처럼 다른 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잘 자.”

“응.”

태헌이 돌아섰다.

그때 해원이 불렀다.

“태헌아.”

“응?”

“잠깐 앉아봐.”

둘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해원은 한참 말을 고르다 물었다.

“너 어제 물었잖아.”

“뭘?”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응.”

“나도 물어보고 싶어.”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어?”

태헌은 잠시 생각했다.

“잘.”

해원이 웃었다.

“그런 대답 말고.”

“그럼.”

태헌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가능하면 많이 보고 싶어.”

“뭘?”

“세상.”

“여행?”

“응.”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응.”

“돈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포기하지 않을 정도는 벌고 싶고.”

“응.”

“그리고.”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마지막에 돌아볼 때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어.”

해원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게 끝이야?”

“하나 더 있어.”

“뭔데?”

태헌이 웃었다.

“그때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어.”

해원의 눈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평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자신의 마음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일까.

“태헌아.”

“응.”

“나는 약속 못 해.”

“알아.”

“10년 뒤도 모르고.”

“응.”

“5년 뒤도 모르겠어.”

“응.”

“내년 일도 모르겠고.”

태헌이 웃었다.

“나도 몰라.”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근데.”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어디 가든.”

태헌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가끔 네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이 계속 말했다.

“서울에서도.”

“응.”

“제주에서도.”

“응.”

“여행에서도.”

“응.”

“그리고 내가 혼자 있고 싶은 날에는.”

태헌이 웃었다.

“내가 없어지고.”

“응.”

“다시 보고 싶으면?”

해원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갈게.”

그 말에 태헌의 표정이 무너졌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했다.

“왜.”

해원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해.”

태헌이 손을 맞잡았다.

“그 말 듣고 싶었어.”

“뭐?”

“내가 갈게.”

해원은 순간 몇 년 전 제주를 떠올렸다.

비 오는 날.

처마 아래 서 있던 자신.

주소를 보내라던 남자.

‘네가 괜찮은 건 아는데,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야.’

그리고 얼마 전 병원.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갔다.

사랑은 한 사람이 계속 달려가는 일이 아니었다.

번갈아 가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내가 가고,

어떤 날은 네가 오고.

누군가 지치면 한 사람이 조금 더 걷고.

그러다 다시 나란히 걷는 것.

태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아도 돼?”

해원이 피식 웃었다.

“이제 그건 안 물어봐도 돼.”

태헌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해원은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이제 그 심장 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해원이 말했다.

“태헌아.”

“응.”

입술 끝까지 올라온 말이 있었다.

사랑해.

이번에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해원은 잠시 멈췄다.

태헌이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 여행.”

“응.”

“베트남 갈까?”

태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하려고 이렇게 뜸 들였어?”

“왜. 싫어?”

“아니.”

“그럼?”

태헌이 해원을 더 꼭 안았다.

“좋아.”

해원도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해원은 알고 있었다.

그 말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그날 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둘은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해원은 오늘 받은 열쇠를 침대 옆에 놓았다.

작은 나무 열쇠고리.

‘해원.’

누군가의 집 열쇠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속하라는 표시도 아니었다.

그저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올 수 있는 문 하나.

그것이 태헌이 해원에게 주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들었다.

‘자?’

태헌의 답이 바로 왔다.

‘또 왜 안 자.’

‘궁금한 거 있어.’

‘뭔데?’

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베트남 갔다가 또 어디 갈까?’

답은 금방 왔다.

‘네가 가고 싶은 데.’

‘그다음은?’

‘그것도.’

‘계속?’

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

‘네가 그만 오라고 할 때까지.’

해원은 화면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썼다.

‘그럼 오래 걸리겠다.’

메시지를 보냈다.

태헌에게 전화가 왔다.

해원은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자. 내일 얘기해.’

태헌에게 답이 왔다.

‘내일도 같이 있는 거지?’

해원은 짧게 답했다.

‘응.’

그리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내일.

예전의 윤해원에게 그 말은 그저 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오늘이 끝나도 다시 만날 사람이 있다는 뜻.

다음 여행을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뜻.

그리고 어쩌면,

아주 먼 훗날까지도 계속 이어질지 모르는 말.

내일.

그날 밤 윤해원은 처음으로 그 단어가 좋아졌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강태헌은 해원에게 한 가지를 건넸다.

반지도 아니었고,

결혼하자는 말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강태헌다운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 제안 앞에서,

윤해원은 마침내 자신이 끝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게 된다.

29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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