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조금 더 가까이

도진을 만나기로 한 날,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5화. 조금 더 가까이

도진을 만나기로 한 날,
서연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도진을 만난다.

그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들어오자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참 나.”

서연은 이불을 걷어내며 혼잣말을 했다.

“데이트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왜 이래.”

그러고는 잠시 멈췄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옷장을 몇 번씩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일.

어떤 옷을 입어야 조금이라도 예뻐 보일까 고민하는 일.

거울 앞에 서서 귀걸이를 했다가 빼고
다른 것을 다시 해보는 일.

서연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평소라면 편한 옷 하나 꺼내 입고
머리만 정리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크림색 니트를 꺼냈다.

입어봤다.

거울을 봤다.

다시 벗었다.

다른 옷을 입었다.

또 거울을 봤다.

결국 처음 입었던 크림색 니트로 돌아왔다.

서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처음부터 이거 입을 거면서.”

그러면서도 립스틱을 한 번 더 발랐다.


약속 장소에는 도진이 먼저 와 있었다.

서연은 멀리서 그를 발견하고 걸음을 조금 늦췄다.

도진은 휴대전화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연을 발견했다.

그 순간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웃는 얼굴.

서연은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도진이 서연을 한번 바라봤다.

“왜?”

“뭐가요?”

“왜 그렇게 봐.”

“그냥.”

“그냥 뭐?”

도진이 웃었다.

“오늘 예쁘네요.”

서연은 바로 받아쳤다.

“오늘만?”

도진이 잠시 당황했다.

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도진 씨 아직 멀었네.”

“뭐가요?”

“여자한테 오늘 예쁘다고 하면 안 되지.”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

서연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더 예쁘네요.”

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서연 씨.”

“네.”

“오늘은 더 예쁘네요.”

서연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

둘은 한참 웃었다.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았다.

커피 두 잔과 작은 케이크 하나.

별것 없는 테이블이었다.

그런데 서연은 좋았다.

누군가와 이렇게 아무 목적 없이 앉아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늘 누군가를 만나면 할 일이 있었다.

상의해야 할 일이 있었고,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고,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도진과 커피를 마시는 것.

그게 오늘의 일이었다.

도진이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좋아졌어.”

“다행이다.”

그 짧은 말이 또 좋았다.

자신이 며칠 전 아팠다는 걸
도진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서연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사실 많이 힘들었어.”

“알아요.”

“아니. 도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도진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서연은 얼른 웃었다.

“그런데 이제 괜찮아.”

“왜 맨날 괜찮다고 해요?”

“그럼 어떡해.”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고 해야지.”

서연은 그 말을 듣고 도진을 바라봤다.

이 사람은 참 이상했다.

별것 아닌 말로 사람 마음을 건드렸다.


카페를 나온 뒤 둘은 천천히 걸었다.

도진이 서연보다 반걸음 앞서 걷다가
속도를 줄였다.

서연과 나란히 걸었다.

그 작은 행동까지 서연의 눈에는 들어왔다.

길을 건너려는데 차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도진이 자연스럽게 서연의 팔을 잡았다.

“잠깐.”

순간이었다.

차는 지나갔고,
도진은 손을 놓았다.

그런데 서연의 팔에는
그 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둘은 다시 걸었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자꾸 그 순간이 반복됐다.

‘왜 이러지.’

손 한번 잡힌 것뿐인데.

쉰을 넘긴 여자가
이런 것에도 설렐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러면서도 좋았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조금 걷다가 도진이 물었다.

“힘들어요?”

“아니.”

“앉았다 갈까요?”

“괜찮아.”

도진이 웃었다.

“또 괜찮대.”

서연도 웃었다.

“그럼 뭐라고 해?”

“힘들면 힘들다고.”

“안 힘든데.”

“진짜?”

“응.”

서연은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오늘은 안 힘들어.”

“왜요?”

서연은 도진을 한번 바라봤다.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같이 있으니까.”

도진이 걸음을 멈췄다.

서연은 먼저 몇 걸음 걸어갔다.

뒤에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말 갑자기 하면 반칙인데.”

서연이 뒤돌아봤다.

“왜?”

“사람 설레게 하잖아요.”

서연은 웃었다.

“도진 씨도 당해봐.”

“내가 뭘 했다고.”

“몰라서 물어?”

두 사람은 또 웃었다.


그날 둘은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다.

좋은 식당을 예약한 것도 아니었고
멋진 곳으로 여행을 간 것도 아니었다.

커피를 마셨고,
조금 걸었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서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로웠다.

사랑이라는 건
거창한 사건으로 시작되는 줄 알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백이나,
영화처럼 멋진 장면 같은 것.

그런데 아니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

내가 아팠다는 걸 기억해주는 것.

걸음을 맞춰주는 것.

그리고 헤어지기 싫어서
조금 천천히 걷는 것.

어쩌면 사랑은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졌다.

서연은 시계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도진도 그런 것 같았다.

둘은 이미 같은 길을 두 번이나 돌고 있었다.

서연이 결국 웃었다.

“우리 아까 여기 지나가지 않았어?”

도진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랬나?”

“그랬어.”

“길을 잘못 들었나 보네.”

서연은 도진을 빤히 바라봤다.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고?”

도진이 웃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차를 타기 전,
도진이 말했다.

“도착하면 연락해요.”

“응.”

“꼭.”

“알았어.”

서연은 몇 걸음 가다가 뒤돌아봤다.

도진이 아직 서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웃었다.

서연은 다시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헤어진 지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연은 창밖을 바라봤다.

불빛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큰일 났네.’

도진이 좋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도진과 함께 있을 때의 자신이 좋다는 것이었다.

웃는 자신.

장난치는 자신.

예뻐 보이고 싶어 하는 자신.

누군가의 손길 하나에 설레는 자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자 하나가
도진 앞에서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도진이었다.

‘도착했어요?’

서연은 웃으며 답했다.

‘방금.’

잠시 후 다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좋았어요.’

서연은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적었다.

‘나도.’

보내려다가 한마디를 더 붙였다.

‘많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도진의 답장이 왔다.

‘다음에는 더 오래 봐요.’

서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다음.

그 단어가 좋았다.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는 것.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


그날 밤 서연은 아주 오랜만에
내일이 조금 기다려졌다.

사랑인지 아직은 몰랐다.

아니,
굳이 이름 붙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서연은 이제
도진을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가 들어올 자리를
마음속에 조금씩 넓혀주고 있었다.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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