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이제 진짜 하자
“아까 저 사람한테 준 거.”
서연은 도진을 바라봤다.
“포옹?”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두 팔을 살짝 벌렸다.
“연기는 끝났잖아.”
“그래서?”
“이제 진짜 하자.”
서연은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촬영장 안에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다.
연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카메라도 없었다.
대본도 없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자신 앞에는 도진이 서 있었다.
서연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도진의 품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서연이 멈췄다.
“왜?”
도진이 물었다.
서연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생각 중.”
“뭘 또 생각해.”
“안아줄까 말까.”
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됐어.”
두 팔을 내리려는 순간 서연이 도진의 품으로 들어갔다.
“아이, 참.”
도진의 몸이 순간 굳었다.
서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두 팔로 허리를 감쌌다.
도진은 몇 초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왜 안 안아?”
서연이 작게 물었다.
그제야 도진의 두 팔이 서연의 등을 감쌌다.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했다.
그리고 단단했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촬영장에서의 포옹과는 전혀 달랐다.
아까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카메라 위치.
표정.
대사.
감독의 목소리.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진의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
쿵.
쿵.
생각보다 빨랐다.
서연이 웃었다.
“당신 심장 되게 빨리 뛴다.”
도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 때문에 그렇잖아.”
“내가 뭘.”
“알면서.”
서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웃었다.
“아까 질투 많이 했지?”
“조금.”
“조금?”
“많이.”
이번에는 솔직했다.
서연은 고개를 들어 도진을 바라봤다.
“그래도 안 갔네.”
“간다고 했어?”
“표정은 가는 사람 같았어.”
도진은 피식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갈까 했어.”
서연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진짜?”
“응.”
“왜?”
도진은 잠시 촬영장 건물을 바라봤다.
“당신이 다른 남자한테 안겨 있는 거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
“연기잖아.”
“알아.”
“알면서?”
“머리는 아는데 마음은 모르더라.”
서연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도진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갔어.”
“응.”
“근데 밖에 나와서 생각했지.”
“뭘?”
도진이 서연을 내려다봤다.
“내가 여기서 가버리면 또 똑같아지는 거잖아.”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 나쁘면 연락 안 하고, 술 마시고, 자버리고.”
서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도진이 그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반복해 온 행동을.
“당신 그거 싫어하잖아.”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
“그래서 기다렸어.”
그 말 하나가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었다.
도진이 그랬다.
아직 질투했고,
아직 술을 좋아했고,
가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서연은 도진의 손을 잡았다.
“잘했어.”
“뭘.”
“안 간 거.”
“칭찬해 주는 거야?”
“응.”
“그럼 상은?”
서연이 웃었다.
“방금 줬잖아.”
“뭘.”
“안아줬잖아.”
도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달라고 한 거잖아.”
“그럼 뭐 원하는데?”
도진이 서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서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또 그냥.”
도진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서연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와?”
“내가 뭘.”
“지금 이상해.”
“뭐가.”
도진은 웃고 있었다.
서연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밥이나 먹으러 가.”
도진이 웃었다.
“겁먹었어?”
“내가 왜.”
“얼굴 빨개졌는데.”
“더워서 그래.”
“오늘 추운데?”
서연이 도진의 팔을 때렸다.
“시끄러워.”
도진이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서연은 촬영 때문에 아침부터 제대로 먹지 못했다.
“뭐 먹을래?”
도진이 물었다.
“고기.”
“갑자기?”
“오늘 힘들었어.”
“그럼 고기 먹자.”
“당신이 사.”
“왜?”
“나 오늘 배우 했잖아.”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배우가 돈 더 많이 벌지 않아?”
“오늘은 신인이라 돈 없어.”
“참나.”
둘은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기가 익기 시작하자 도진이 자연스럽게 집게를 들었다.
서연이 바라봤다.
“당신 고기 잘 굽네.”
“이 정도는 하지.”
“앞으로도 당신이 구워.”
“왜.”
“난 먹을게.”
도진이 고기 한 점을 서연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먹어.”
서연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맛있다.”
도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웃었다.
“많이 먹어.”
“당신도 먹어.”
“난 먹고 있어.”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먹었다.
그 평범한 시간이 서연은 좋았다.
촬영도 좋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설렜다.
하지만 결국 하루가 끝난 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오늘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고기 한 점을 자신의 접시에 올려주는 사람.
서연은 문득 생각했다.
‘이런 게 함께 늙는 건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좋은 날에도 같이 밥을 먹고,
힘든 날에도 같이 밥을 먹는 것.
서연이 도진을 바라봤다.
“왜 봐?”
“그냥.”
“또 그냥이네.”
“나도 쓸 거야.”
도진이 웃었다.
“많이 써.”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직원이 물었다.
“술은 안 드리세요?”
도진이 순간 메뉴판을 봤다.
서연도 그 시선을 봤다.
평소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주 한 병.
아니면 두 병.
술자리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도진은 잠시 메뉴판을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은 안 마실게요.”
직원이 돌아갔다.
서연은 아무 말 없이 도진을 바라봤다.
“왜.”
“진짜 안 마셔?”
“응.”
“고기 먹는데?”
“응.”
“왜?”
도진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당신 하고 얘기하려고.”
서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술 마셔도 얘기하잖아.”
“그동안은 술 먹어야 말이 잘 나왔는데.”
도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오늘은 그냥 맨 정신으로 있고 싶어.”
서연은 그 말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술이 있어야 마음을 표현하던 사람이 자신과 맨 정신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식당을 나왔을 때 밤이 깊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지하철역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도진이 말했다.
“오늘 촬영 재미있었어?”
“응.”
“많이?”
“응.”
“또 하고 싶어?”
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응.”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
서연이 그를 바라봤다.
“진짜?”
“응.”
“나 점점 바빠질 수도 있어.”
“지금도 바빠.”
“당신 자주 못 볼 수도 있고.”
도진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그건 싫지.”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진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해.”
“왜?”
도진은 한참 생각했다.
“당신 오늘 나오면서 웃었잖아.”
“내가?”
“응.”
“언제?”
“촬영 끝나고 나올 때.”
도진이 서연을 바라봤다.
“그 얼굴 좋더라.”
서연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못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도진도 멈췄다.
서연은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당신 많이 변했다.”
“내가?”
“응.”
“좋게?”
서연은 웃었다.
“조금.”
“또 조금이야.”
“더 노력해.”
도진이 웃었다.
다시 걸었다.
역 입구가 가까워졌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 순간 서연은 갑자기 아쉬워졌다.
오늘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갔다.
“도진아.”
“응.”
“우리 언제 또 봐?”
도진이 서연을 바라봤다.
“보고 싶어?”
“아니.”
“그럼 됐네.”
서연이 그의 팔을 때렸다.
“물어보니까 그렇지.”
도진이 웃었다.
“다음 주?”
“당신 일하잖아.”
“끝나고 보면 되지.”
“두 시간 걸리는데?”
도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내가 갈게.”
서연은 피식 웃었다.
“또?”
“왜.”
“당신 요즘 자꾸 온다.”
“싫어?”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
짧은 말이었다.
도진이 그녀를 바라봤다.
서연도 그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지하철 안내 방송이 들렸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도진이 조용히 말했다.
“서연아.”
“응.”
“아까 말한 거.”
“뭐?”
“이제 진짜 하자는 거.”
서연이 웃었다.
“포옹했잖아.”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서연의 표정이 멈췄다.
도진은 이번에는 장난치지 않았다.
“우리.”
잠시 숨을 골랐다.
“제대로 만나자.”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제대로 아니었어?”
“나도 모르겠어.”
도진은 솔직했다.
“좋아하고, 보고 싶고, 질투하면서도 내가 바카라임져야 하는 말은 자꾸 피했던 것 같아.”
서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서?”
“이제 안 피하려고.”
도진이 서연의 손을 잡았다.
“나 당신 좋아해.”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술도 마시지 않았다.
외로운 밤도 아니었다.
질투 끝에 나온 말도 아니었다.
맨 정신으로,
서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제대로 만나자.”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듣고 나니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이 밀려왔다.
자신의 현실.
도진의 현실.
두 시간의 거리.
서로 다른 생활.
그리고 서연에게는 도진에게 아직 모두 말하지 못한 삶의 무게도 있었다.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들.
도진이 물었다.
“왜 대답 안 해?”
서연은 그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도진아.”
“응.”
“나 당신한테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어.”
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뭔데?”
서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만 바라봤다.
하지만 사랑이 정말 현실이 되는 순간에는 마음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왜 그렇게 일만 하는지.”
도진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왜 당신을 좋아하면서도 자꾸 멀어지려고 했는지.”
도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연은 그를 바라봤다.
“그 이유를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아.”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진이 조용히 말했다.
“말해.”
서연은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으로 감정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문 앞에 섰다.
24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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