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날, 나는 네가 필요했다
서연은 아침부터 몸이 이상했다.
처음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줄 알았다.
몸이 무겁고 손끝에 힘이 없었다.
그래도 알람이 울리자 일어났다.
늘 그랬으니까.
아프다고 하루가 멈춰주는 것도 아니고,
피곤하다고 해야 할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서연은 욕실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하얗게 떠 있었다.
“오늘 몰골 한번 훌륭하네.”
혼자 중얼거리며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 여자가 웃지도 않고 자신을 바라봤다.
잠시 침대에 다시 눕고 싶었다.
딱 한 시간만.
아니, 십 분만이라도.
하지만 그러면 늦는다.
서연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오전 일을 마칠 무렵부터 한기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에어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손이 차가워지고,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내려갔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입맛도 없었다.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 나을 것 같았다.
서연은 카페 앞에서 잠시 멈췄다.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보였다.
따뜻한 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앉아 있는 여자.
마주 보고 웃는 연인.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남자.
문 하나만 열면 됐다.
차 한 잔 주문해서 앉아 있으면 됐다.
그런데 그날은 그것조차 힘들었다.
‘그냥 가자.’
서연은 다시 걸었다.
조금 걷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제야 겁이 났다.
평소 같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을 먹고,
이를 악물고,
집에 돌아가 쓰러져 자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진.
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메시지를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나 오늘 좀 아픈 것 같아.’
또 지웠다.
이런 말을 보내서 뭘 하겠다는 건가 싶었다.
도진이 당장 달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각자의 일이 있었고,
각자의 하루가 있었다.
그런데도 말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알아줬으면 했다.
결국 서연은 짧게 보냈다.
‘나 오늘 많이 아파.’
전송.
보내고 나니 괜히 민망했다.
‘뭘 이런 걸 보내.’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잠시 뒤 진동이 울렸다.
도진이었다.
“어디가 아파요?”
그 한 문장을 보는 순간
서연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몸살인가 봐. 너무 추워.”
“열은?”
“모르겠어.”
“약은 먹었어요?”
“아직.”
답장이 바로 왔다.
“약부터 먹어요. 따뜻한 거 마시고.”
평범한 말이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
그런데 서연은 그 말을 한참 바라봤다.
도진이 다시 보냈다.
“그리고 오늘은 좀 쉬어요.”
서연은 피식 웃었다.
‘그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몸은 더 무거워졌다.
한기가 뼛속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서연은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좀 안아줬으면 좋겠다.
대단한 위로도 필요 없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옆에 앉아서
“오늘 많이 힘들었지?”
그 한마디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도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연은 조금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 사람한테 마음을 줬나.’
좋아하는 것과 기대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은 보고 싶다.
하지만 기대고 싶은 사람은
내가 가장 약한 순간에 떠오른다.
그날 서연에게 떠오른 사람은 도진이었다.
밤늦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서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도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괜찮아.”
“안 괜찮은 목소린데.”
그 말에 서연이 웃었다.
“도진 씨.”
“응.”
“나 오늘 진짜 힘들었어.”
처음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
도진도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다.”
그 한마디에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참 이상했다.
하루 종일 버텼다.
몸이 아파도 울지 않았고,
걷기 힘들어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많이 힘들었겠다’
라고 말해주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서연은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 왜 이러지.”
“울어요?”
“아니.”
“우는데.”
“안 운다니까.”
“서연 씨.”
“왜.”
“울어도 돼요.”
그 말에 결국 눈물이 흘렀다.
서연은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그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진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좋았다.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전화기 반대편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한참 뒤 서연이 말했다.
“도진 씨.”
“응.”
“이상하다.”
“뭐가요?”
“나는 원래 이런 얘기 안 하는데.”
“알아요.”
“어떻게 알아?”
“맨날 괜찮다고 하잖아요.”
서연이 웃었다.
“그랬나?”
“맨날.”
“그럼 오늘도 괜찮다고 할 걸 그랬네.”
“그러지 마요.”
도진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나한테까지 괜찮은 척하지 마요.”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한테까지.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어쩌면 서연이 기다렸던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괜찮은 척해도 되지만
한 사람 앞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그날 이후 서연의 마음속에서
도진의 자리는 조금 달라졌다.
설레는 남자에서
기대고 싶은 남자로.
그 변화가 서연은 조금 무서웠다.
설렘은 혼자서도 견딜 수 있다.
보고 싶으면 참으면 되고,
연락을 기다리다 지치면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면 된다.
하지만 기대기 시작하면 달라진다.
그 사람이 없을 때
빈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서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 한편에서는 계속 경고했다.
‘너무 기대하지 마.’
그런데 다른 마음이 말했다.
‘이번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평생 혼자 버텼으니까.
한 번쯤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
며칠 뒤 도진과 영상통화를 했다.
서연은 아직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도진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살 빠졌어요?”
“예뻐졌다는 뜻이야?”
“그건 원래 예뻤고.”
서연이 웃었다.
“말은 참 잘해.”
“진짠데.”
“여자들한테 원래 이렇게 말 잘해?”
도진이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글쎄요.”
“봐. 수상해.”
“서연 씨한테만 그런가 보죠.”
서연은 웃으며 화면에서 시선을 피했다.
“하여간.”
그런데 입가의 웃음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도진은 그런 서연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제 좀 낫죠?”
그 질문이 좋았다.
아팠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이.”
“다행이다.”
그 순간 서연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아주 조금은 기대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서연에게 사랑은
힘든 날에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었고,
도진에게 사랑은
어쩌면 조금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방법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 차이가 처음에는 아주 작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그래서 서연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서연은 도진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오늘은 고마웠어.’
잠시 뒤 답장이 왔다.
‘뭐가요?’
서연은 한참 생각하다 적었다.
‘그냥. 내 얘기 들어준 거.’
도진에게서 답이 왔다.
‘그 정도 가지고.’
서연은 그 문장을 바라보다 웃었다.
그리고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
말하지 않았다.
도진에게는 ‘그 정도’였지만
서연에게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아프다고 말한 것.
힘들다고 말한 것.
울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정말 울어버린 것.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날 그녀는 아직 몰랐다.
사람에게 가장 많이 상처받는 순간은
마음을 주었을 때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받아줄 거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라는 것을.
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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