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두 어머니의 죄
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1화. 두 어머니의 죄
1980년 2월.
서울 청량리의 겨울은 여전히 매서웠다.
역전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머리에 보따리를 인 여자들, 커다란 가방을 든 지방 상인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젊은이들이 좁은 길을 오갔다.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역전은 잠시 소란스러워졌다가 다시 일상의 소음 속으로 가라앉았다.
박노식은 청량리역 뒤편의 허름한 상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백춘식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낡은 난로 위에서는 주전자가 끓고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전구는 바람이 스며들 때마다 희미하게 흔들렸다.
춘식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김씨 집안에서 아직도 그 여자를 찾습니까?”
노식은 고개를 저었다.
“집안에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찾는 겁니까?”
“제가 찾습니다.”
춘식은 성냥을 그었다.
잠시 뒤 담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이상하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흔적을 지워놓고 이제 와서 찾는다니.”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춘식은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요?”
노식은 한참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 아이가 불행합니다.”
춘식의 손이 멈추었다.
“불행하다니요?”
“집안에서는 귀한 아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아이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춘식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렀다.
“돈 많은 집에 들어갔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닌 모양이군요.”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춘식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낡은 장부 하나를 꺼냈다.
“한연화.”
그는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그 여자는 아이를 낳고 나서도 몇 번이나 저를 찾아왔습니다.”
노식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엇 때문에요?”
“아이 소식이 궁금해서요.”
춘식은 장부를 덮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건강한지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아이 이름을 알고 싶다고 했고요.”
노식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한연화가 떠나던 날을 기억했다.
눈이 내리던 대문 앞에서 여자는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춘식이 말했다.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는 아이 사진이라도 한 장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사진을요?”
“예.”
“구해주셨습니까?”
춘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며칠 뒤 김씨 집안에서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노식은 숨을 죽였다.
“누구였습니까?”
춘식은 노식의 얼굴을 살폈다.
“윤정애 씨였습니다.”
노식은 눈을 감았다.
예상했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듣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다.
“마님이 직접 오셨습니까?”
“예. 젊고 단정한 여자였어요. 옷차림만 봐도 넉넉한 집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춘식은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한연화가 다시 찾아오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노식은 고개를 숙였다.
춘식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다시는 김씨 집안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까?”
춘식은 잠시 망설였다.
“아닙니다.”
노식이 고개를 들었다.
춘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연화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라는 부탁도 했습니다.”
순간 노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뭐라고요?”
춘식은 시선을 피했다.
“아이가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노식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거짓말을 했습니까?”
춘식은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요?”
“돈을 받았습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난로 위의 주전자가 끓어올랐다.
춘식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다시 꺼냈다.
“그때는 그저 돈 많은 집안의 복잡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식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그 말을 믿었습니까?”
춘식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말했다.
“그날 한연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식은 숨을 멈추었다.
“울지도 않았어요. 그냥 저를 오래 바라보다가 돌아섰습니다.”
“그 뒤에는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식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가 기억하는 한연화는 아이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 말을 믿었다면.
지난 열 해를 어떻게 살아왔을까.
노식은 얼굴을 감쌌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김씨 집안이 빼앗은 것은 한 여자의 아이만이 아니었다.
아이를 기다릴 희망까지 빼앗았을지도 몰랐다.
같은 시각.
김씨 집안의 안채에서는 윤정애가 딸 명숙과 마주 앉아 있었다.
명숙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요즘 들어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아졌고, 어머니의 말에 쉽게 짜증을 냈다.
“명숙아.”
“왜요?”
“요즘 학교 준비는 잘하고 있니?”
“네.”
“필요한 건 없고?”
명숙은 잠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있으면 사주실 거예요?”
정애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명숙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요.”
정애는 딸의 얼굴을 살폈다.
명숙은 예쁘게 자란 아이였다.
눈매는 아버지를 닮았고, 입술은 자신을 닮았다.
어릴 때부터 영리했고 자존심이 강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자존심은 쉽게 상처받는 마음으로 변해 있었다.
“명숙아.”
“네.”
“도현이한테 조금 잘해주면 안 되겠니?”
명숙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갑자기 왜요?”
“그냥.”
“엄마도 이제 도현이 편이에요?”
정애는 당황했다.
“그런 말이 아니잖니.”
명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까지 그러면 나는 누구한테 말해요?”
정애는 딸의 손을 붙잡았다.
“앉아봐.”
“싫어요.”
“명숙아.”
명숙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엄마는 몰라요.”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뭘 모르는데?”
“아버지가 도현이를 볼 때하고 우리를 볼 때 눈빛이 달라요.”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명숙은 말을 이었다.
“도현이가 시험에서 일등 하면 온 집안이 떠들썩한데, 내가 잘하면 그냥 잘했다고만 해요.”
“아버지가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니야.”
“일부러 안 그러니까 더 싫어요.”
정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명숙은 눈물을 닦았다.
“엄마.”
“응.”
“도현이는 정말 우리 동생 맞아요?”
정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무슨 말이니?”
명숙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릴 때 들었어요.”
정애는 숨을 멈추었다.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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