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열쇠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9화. 사랑해, 그리고 각자의 길로
제주에서의 마지막 아침이었다.
윤해원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
어제 받은 작은 열쇠가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나무 열쇠고리에 새겨진 두 글자.
해원.
손끝으로 이름을 한번 쓸어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준 것이 이렇게 마음에 남을 줄 몰랐다.
소유하겠다는 의미도 아니고,
같이 살자는 약속도 아니었다.
그저,
네가 오고 싶을 때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여기 있다는 뜻.
해원은 그게 좋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소리가 났다.
해원은 문을 열었다.
주방에 강태헌이 있었다.
“뭐 해?”
태헌이 돌아봤다.
“깼어?”
“응.”
“더 자지.”
“너 때문에 깼어.”
“나 조용히 했는데.”
“커피 냄새.”
태헌이 웃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숨겨.”
식탁에는 커피 두 잔과 간단한 아침이 놓여 있었다.
해원이 의자에 앉았다.
“이런 거 자꾸 하지 마.”
“왜?”
“버릇 들어.”
태헌이 커피를 해원 앞으로 밀었다.
“들어.”
“나중에 안 해주면?”
“그때 네가 해.”
해원이 피식 웃었다.
“결국 나도 해야 되네.”
“사랑이 원래 품앗이 아니야?”
“누가 그래?”
“강태헌이.”
“신뢰가 안 가는데.”
둘은 웃었다.
이런 아침이 이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아침을 먹었던 사람들처럼.
하지만 해원은 알고 있었다.
오늘 오후가 되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침을 먹은 뒤 태헌이 말했다.
“공항 가기 전에 한 군데만 가자.”
“어디?”
“비밀.”
해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말없이 뭐 준비했어?”
“이번에는 말했잖아. 한 군데 간다고.”
“어디인지 말 안 했잖아.”
“우리 규칙에 장소까지 말하라고 있었나?”
“오늘 추가할 거야.”
태헌이 웃었다.
“진짜 피곤한 여자친구네.”
“지금 취소해도 돼.”
“안 돼.”
“왜?”
태헌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 없으면 심심해.”
그 말이 해원의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사랑한 다보다,
가끔은 그런 말이 더 좋았다.
너 없으면 심심해.
그 말은 그 사람의 일상 안에 내가 들어갔다는 뜻 같아서.
태헌이 데려간 곳은 어제의 작업실이었다.
해원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여기 또 왜?”
“줄 거 있어.”
“열쇠 줬잖아.”
“그거 말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자 바카라상 위에 얇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뭔데?”
“열어봐.”
“반지 아니지?”
태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반지 주면 도망갈 것 같아서 못 줘.”
“잘 아네.”
해원이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여행 일정표인 줄 알았다.
맨 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의 다음 여행’
그 아래에는 몇 개의 도시가 적혀 있었다.
하노이.
닌빈.
사파.
라오까이.
그리고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이어지는 길.
허커우.
쿤밍.
시솽반나.
마지막에는 다시 쿤밍.
해원이 종이를 한참 바라봤다.
“이게 뭐야?”
“여행 계획.”
“언제?”
“아직 안 정했어.”
“그런데 왜 벌써 만들었어?”
“네가 베트남 가자며.”
“그냥 한 말인데.”
태헌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는 그냥으로 안 들었어.”
해원은 다시 종이를 내려다봤다.
“이거 며칠짜리야?”
“길게 가면 한 달도 되고.”
해원의 눈이 커졌다.
“한 달?”
“짧게 하면 줄이면 되고.”
“나 한 달씩 어떻게 비워.”
“그러니까.”
태헌이 의자를 당겨 해원 앞에 앉았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제안이야.”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뭔데?”
“나랑 한 달 살자.”
해원의 표정이 굳었다.
태헌이 바로 웃었다.
“같이 살자는 말 아니야.”
“방금 같이 살자며.”
“여행하면서.”
“그게 더 같이 사는 거잖아.”
“그런가?”
“24시간 붙어 있는 건데.”
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싫어.”
태헌의 얼굴이 굳었다.
“진짜?”
해원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
“표정 봐.”
“장난이야?”
“응.”
태헌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윤해원, 너 진짜.”
“왜.”
“사람 놀라게 하지 마.”
“어제는 네가 놀랬잖아.”
“복수야?”
“조금.”
둘이 웃었다.
하지만 해원은 곧 진지해졌다.
“한 달은 너무 길어.”
“알아.”
“나 일도 있고.”
“알아.”
“정리해야 할 것도 많고.”
“그것도 알아.”
“그럼 왜 한 달이야?”
태헌이 종이를 가리켰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라서.”
“그럼?”
“우리 시험.”
“무슨 시험?”
“우리가 정말 같이 오래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인지.”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태헌은 차분하게 말했다.
“여행 가면 다 나오잖아.”
“뭐가?”
“성격.”
해원이 웃었다.
“너는 이미 다 나온 것 같은데.”
“아직 멀었어.”
“또?”
“피곤할 때.”
“응.”
“길 잃었을 때.”
“응.”
“돈 쓸 때.”
“응.”
“계획 틀어졌을 때.”
“응.”
“서로 말하기 싫을 때.”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그래도 같이 갈 수 있는지 보고 싶어.”
해원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결혼을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한 집에 살자는 것도 아니었다.
남은 인생을 약속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길 위에서 서로를 더 알아보자는 것.
강태헌다운 제안이었다.
“만약 싸우면?”
해원이 물었다.
“싸우지.”
“내가 혼자 간다고 하면?”
“보내줘야지.”
“진짜?”
“응.”
“잡아야 되는 거 아니야?”
“잡으면 또 싫다며.”
해원이 웃었다.
“어렵지?”
“엄청.”
“후회해?”
태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어려워도 네가 좋으니까.”
해원의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태헌이 말했다.
“해원아.”
“응.”
“나는 너랑 꼭 같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게 아니야.”
“응.”
“꼭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응.”
“그런데.”
태헌은 잠시 말을 멈췄다.
“네가 보고 있는 세상을 옆에서 같이 보고 싶어.”
해원의 눈이 흔들렸다.
“네가 가고 싶은 데 가고.”
“……”
“나도 내가 가고 싶은 데 가고.”
“응.”
“가끔 같은 곳으로 가고.”
태헌이 웃었다.
“그러다 헤어져서 각자 갔다가 다시 만나고.”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자신이 원하던 삶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
혼자이고 싶은 날에는 혼자일 수 있고,
함께 있고 싶은 날에는 손을 내밀 수 있는 관계.
“그래서?”
해원이 물었다.
“언제 갈 건데?”
태헌의 얼굴이 밝아졌다.
“간다는 거야?”
“날짜부터 보자고.”
“그게 간다는 거지.”
“강태헌.”
“응.”
“설레발치지 마.”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태헌은 계속 웃고 있었다.
해원은 여행 계획표를 다시 보았다.
한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이어지는 선.
국경을 넘고,
기차를 타고,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또 이동하는 길.
젊었을 때였다면 이런 여행을 두려워했을지도 몰랐다.
가족.
일.
돈.
해야 할 일.
늘 자신을 기다리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준비만 하다가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 가고 싶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태헌아.”
“응.”
“나 하나 물어봐도 돼?”
“응.”
“왜 나야?”
태헌이 웃었다.
“또 그 질문?”
“제대로 대답해.”
“전에 했잖아.”
“오늘 다시.”
태헌은 한참 해원을 바라봤다.
“네가 예뻐서.”
“나 간다.”
해원이 일어서려 하자 태헌이 웃으며 손목을 잡았다.
“알았어. 앉아.”
“장난하지 말고.”
“진짜인데.”
“강태헌.”
“알았어.”
그가 잠시 생각했다.
“너는 계속 살아가잖아.”
“뭐?”
“힘들어도.”
해원의 표정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 자꾸 뭘 포기하잖아.”
태헌이 말했다.
“이제 늦었다.”
“……”
“내 나이에 뭘.”
“……”
“그냥 이렇게 살다 가지.”
태헌은 고개를 저었다.
“근데 너는 아니더라.”
해원이 가만히 들었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일하고.”
“응.”
“새로운 거 배우고.”
“응.”
“글도 쓰고.”
“응.”
“가고 싶은 데 있으면 궁금해하고.”
태헌이 웃었다.
“그러면서 맨날 안 힘들다고 거짓말하고.”
해원이 피식 웃었다.
“그게 뭐가 좋아.”
“살아 있는 것 같아서.”
해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졌어.”
태헌이 말했다.
“너 보면서.”
해원은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예쁘다.
좋다.
보고 싶다.
그런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네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잘 살고 싶어 졌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울어?”
태헌이 물었다.
“아니.”
“눈 빨간데.”
“바람 들어와서 그래.”
“실내인데?”
해원이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조용히 해.”
태헌도 웃었다.
잠시 뒤 해원이 말했다.
“태헌아.”
“응.”
“나 어제 하려다 못 한 말 있어.”
태헌의 표정이 달라졌다.
“뭔데?”
해원은 갑자기 긴장됐다.
이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사랑해.
고작 세 글자.
그런데 쉰을 넘긴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그 세 글자는 스무 살의 것과 달랐다.
그 안에는 앞으로도 있었다.
상처도 있었다.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더 쉽게 말할 수 없었다.
태헌은 기다렸다.
“말 안 해도 돼.”
그가 말했다.
그 순간 해원은 알았다.
그래서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자신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
잡으면서도 놓을 줄 아는 사람.
해원은 태헌의 손을 잡았다.
“강태헌.”
“응.”
“나도.”
태헌의 눈이 조금 커졌다.
“뭐가?”
해원이 웃었다.
“알면서.”
“모르겠는데.”
“한 번만 말할 거야.”
“응.”
해원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사랑해.”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은 괜히 민망해졌다.
“왜 아무 말 안 해?”
태헌이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
“왜.”
그가 손으로 눈을 한번 문질렀다.
해원의 눈이 커졌다.
“너 울어?”
“아니.”
“우네.”
“바람 들어왔어.”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내인데?”
태헌도 결국 웃었다.
해원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게 좋아?”
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었다.
“많이.”
해원의 눈에도 다시 눈물이 고였다.
태헌이 그녀를 안았다.
이번에는 허락을 묻지 않았다.
해원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한참 뒤 태헌이 귓가에 말했다.
“기다린 보람 있다.”
“뭘 얼마나 기다렸다고.”
“오래 기다렸지.”
“5년?”
태헌이 웃었다.
“아니.”
“그럼?”
“네가 나한테 오는 시간.”
해원은 눈을 감았다.
그래.
그 남자는 기다렸고,
자신은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 같은 곳에 서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해원은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태헌이 물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또 그냥.”
해원이 웃었다.
“다음 여행.”
“벌써?”
“응.”
“좋네.”
“근데 한 달은 안 돼.”
“3주.”
“2주.”
“18일.”
“15일.”
“17일.”
“강태헌.”
“16일.”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가서 생각해.”
“그럼 가능성 있다는 거지?”
“응.”
태헌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해원이 말했다.
“태헌아.”
“응.”
“우리 하나만 약속하자.”
“뭔데?”
“나 때문에 네 인생 포기하지 마.”
태헌이 잠시 해원을 바라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
“너도.”
“응.”
“나 때문에 네 인생 포기하지 마.”
“응.”
“그리고.”
태헌이 말했다.
“가고 싶은 데 생기면 가.”
“혼자?”
“혼자도.”
해원이 놀라서 바라봤다.
“다른 남자랑만 가지 마.”
“거봐.”
“그건 양보 못 해.”
해원이 웃었다.
“알았어.”
태헌도 웃었다.
“나도 여자랑 단둘이 안 갈게.”
“당연하지.”
“질투하네.”
“응.”
해원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태헌이 놀라서 쳐다봤다.
“방금 인정했어?”
“응.”
“윤해원이?”
“운전이나 해.”
둘이 웃었다.
공항이 가까워졌다.
해원은 문득 아쉬웠다.
며칠 전 제주에 도착할 때는 여행이 시작된다는 설렘이 컸다.
지금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싫었다.
하지만 예전과 달랐다.
여행이 끝난다고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만날 것이고,
또 각자의 일을 할 것이고,
가끔 서운할 것이고,
어쩌면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것이면 됐다.
태헌이 한 손을 내밀었다.
“손.”
해원이 그의 손을 잡았다.
“운전할 때 두 손 써.”
“잠깐은 괜찮아.”
“위험해.”
태헌은 웃으며 다시 핸들을 잡았다.
해원이 그의 손등 위에 잠깐 손을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사랑은 누군가의 인생에 들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길을 막지 않으면서,
때때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
멀어지는 날에는 기다리고,
힘든 날에는 찾아가고,
다시 만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잡는 것.
윤해원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는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공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태헌이 물었다.
“해원아.”
“응.”
“다음 여행 진짜 갈 거지?”
해원이 웃었다.
“응.”
“나랑?”
“응.”
“그다음도?”
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물어볼 거야?”
태헌이 웃었다.
“응.”
해원은 문을 열며 대답했다.
“그럼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생각해 볼게.”
“또 생각해 본대.”
“대신.”
해원이 차에서 내리기 전 몸을 돌렸다.
태헌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오늘은 같이 갈게.”
태헌이 멍하니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빨리 와.”
태헌이 웃으며 따라 내렸다.
“윤해원!”
“왜.”
“방금 그거 한 번 더.”
“싫어.”
“한 번만.”
“비행기 놓쳐.”
해원은 웃으며 공항으로 걸어갔다.
태헌이 뒤따라왔다.
둘은 아직 모른다.
5년 뒤 어디에 있을지.
10년 뒤에도 함께일지.
한집에서 살게 될지,
각자의 집을 오가며 살게 될지.
결혼을 할지,
하지 않을지.
하지만 이제 그들은 그것을 미리 정답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함께 갈 수 있으면 함께 가고.
내일 각자의 길을 가야 하면 보내주고.
다시 보고 싶으면 만나러 가는 것.
그것이 윤해원과 강태헌이 선택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한 편만 남았다.
30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혼식장이 아니라,
다시 길 위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사랑은
정착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일이었으니까.
29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30화. 우리는 함께 떠나는 사람이 되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윤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며칠 전 제주로 갈 때와 같은 하늘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돌아오는 자신의 마음은 전혀 같지 않았다.
제주에 갈 때까지만 해도 해원은 계속 생각했다.
강태헌을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시간을 나눠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해서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 결혼이라는 답을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는 달라졌다.
이제 혼자 살아가고 싶다는 말 속에
강태헌이 없어야 한다는 뜻은 들어 있지 않았다.
혼자일 수 있는 자유와,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행복.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해원은 이제 알 것 같았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췄다.
태헌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끝났다.”
“뭐가?”
“첫 여행.”
해원이 웃었다.
“며칠 갔다 온 게 무슨 대단한 여행이라고.”
“나한테는 대단했는데.”
“왜?”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윤해원이 나랑 여행을 왔잖아.”
“그게 그렇게 대단해?”
“응.”
“왜?”
“처음에는 카라반 가자는 말에도 도망갔던 여자니까.”
해원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도망갔어.”
“여행 얘기만 하면 생각해본다고 했잖아.”
“생각은 해봐야지.”
“그래서 베트남도 생각해볼 거야?”
해원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그건 가서 일정부터 보자.”
태헌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간다는 거네?”
“왜 그렇게 결론이 빨라?”
“이번 여행에서 배웠어.”
“뭘?”
“윤해원이 ‘생각해볼게’ 하면 반은 된 거고.”
“또?”
“‘응’ 하면 끝난 거고.”
“또?”
태헌이 웃었다.
“먼저 손 잡으면 완전히 내 편.”
해원이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꿈 깨.”
태헌이 웃었다.
“아프다.”
해원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
“팔?”
“아니. 네가 때린 데.”
“강태헌.”
“알았어.”
둘은 웃으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다시 서울의 공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은 빠르게 걸었고,
휴대전화는 계속 울렸고,
각자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헌이 물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해원이 잠시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혼자 갈 수 있다고.
굳이 돌아가지 말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응.”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뭐?”
“데려다줘.”
“진짜?”
“싫어?”
“아니.”
태헌이 웃었다.
“좋아서.”
해원은 먼저 걸었다.
“빨리 와.”
그 말이 이제 자연스러웠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태헌이 차에서 내렸다.
“가방 줘.”
“이거 하나야.”
“그래도.”
“내가 들 수 있어.”
태헌이 해원을 빤히 바라봤다.
해원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들어.”
태헌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이것도 연습해야 돼.”
“뭘?”
“남한테 맡기는 거.”
“너 남 아니야?”
말이 먼저 나왔다.
둘 다 멈췄다.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태헌도 해원을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 안 했어.”
“했는데.”
“잘못 들었어.”
“윤해원.”
“왜.”
태헌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나 남 아니야?”
해원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들어오기 싫으면 가.”
태헌이 웃으며 따라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집 안은 며칠 전 그대로였다.
그런데 해원에게는 조금 달라 보였다.
태헌이 앉았던 소파.
함께 커피를 마셨던 식탁.
처음 조금 길게 키스했던 자리.
태헌이 신발을 벗었다.
해원이 말했다.
“커피 마시고 갈래?”
“피곤하지 않아?”
“조금.”
태헌이 웃었다.
“이제 잘 말하네.”
“뭘.”
“피곤하다고.”
해원도 웃었다.
“배웠어.”
“누구한테?”
“한 살 어린 사람한테.”
태헌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수강료 비싼데.”
“얼마인데?”
“평생.”
해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예전 같으면 그 단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평생.
너무 길고,
너무 무겁고,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약속.
그런데 오늘은 웃음이 났다.
“바가지네.”
그게 전부였다.
태헌도 더 말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던 중 해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일과 관련된 연락이었다.
해원은 통화를 하고 메모를 했다.
태헌은 조용히 기다렸다.
전화를 끊자 해원이 한숨을 쉬었다.
“또 바빠지겠네.”
“일?”
“응.”
“며칠?”
“한동안.”
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베트남은 조금 미루면 되겠다.”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왜?”
“바쁘다며.”
“그렇다고 안 간다는 건 아닌데.”
태헌의 눈이 커졌다.
“갈 거야?”
“응.”
“언제?”
“일 정리하고.”
“진짜?”
해원이 웃었다.
“왜 자꾸 물어.”
태헌은 잠시 해원을 바라보다 말했다.
“좋아서.”
그 말.
처음에는 참 낯간지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해원도 알고 있었다.
태헌에게 ‘좋아서’는 이유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라는 뜻이었다.
해원이 물었다.
“그 여행 끝나면?”
“뭐가?”
“다음에는 어디 갈 건데?”
태헌이 웃었다.
“알래스카.”
“진짜?”
“오로라 보러.”
“추운데.”
“붙어 있으면 되지.”
“또 시작이네.”
“싫어?”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를 마셨다.
태헌이 웃었다.
“그다음은?”
이번에는 해원이 물었다.
“몽골?”
“좋지.”
“그다음은?”
“유럽.”
“너 돈 많아?”
“벌어야지.”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돈 벌러 가야겠네.”
“그러니까 우리 각자 열심히 벌자.”
“각자?”
“응.”
태헌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돈은 네가 벌고, 내 돈은 내가 벌고.”
“여행비는?”
“그건 그때 싸우자.”
해원이 웃었다.
“벌써 싸울 계획까지 있어?”
“싸우면서 가는 거지.”
“싫은데.”
“그럼 네가 다 내.”
“강태헌.”
“알았어. 내가 조금 더 낼게.”
“왜?”
“한 살 어리니까.”
“그게 무슨 논리야.”
둘이 한참 웃었다.
태헌이 돌아갈 시간이 됐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었다.
해원이 문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며칠 동안 계속 같이 있었는데 이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묘했다.
그렇다고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헤어지는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태헌이 일어섰다.
“갈게.”
“응.”
“내일 연락할게.”
“응.”
“보고 싶으면?”
“연락해.”
“그럼 지금 보고 싶은데.”
해원이 웃었다.
“지금 보고 있잖아.”
“집에 가면.”
“그때 연락해.”
태헌이 문을 열었다.
그때 해원이 불렀다.
“태헌아.”
“응.”
“조심해서 가.”
“응.”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그리고.”
태헌이 기다렸다.
해원은 웃었다.
“사랑해.”
태헌의 표정이 멈췄다.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한 번 더.”
“싫어.”
“잘 못 들었어.”
“들었잖아.”
“못 들었는데.”
해원이 문을 닫으려 했다.
태헌이 급하게 문을 잡았다.
“잠깐.”
“왜.”
“나도.”
“뭐가?”
이번에는 태헌이 웃었다.
“사랑해.”
해원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말했다.
“알아.”
문 밖에서 태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해원은 제주에서 가져온 열쇠를 꺼냈다.
‘해원.’
작은 나무 열쇠고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집 열쇠 옆에 놓았다.
두 개의 열쇠.
하나는 자신의 집.
하나는 태헌이 열어둔 공간.
굳이 하나의 열쇠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각자의 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필요할 때 서로의 문을 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몇 달 뒤.
인천공항.
윤해원은 작은 가방 하나를 메고 출국장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짐은 많지 않았다.
태헌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해원이 그의 가방을 보고 웃었다.
“너 이민 가?”
“한 달 간다며.”
“누가 한 달 간대?”
“나.”
“나는 2주라고 했어.”
“그래서 협상하려고.”
“이미 비행기 타는데 무슨 협상이야.”
태헌이 웃었다.
“가서 하지 뭐.”
해원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못 말린다.”
태헌이 물었다.
“여권?”
“있어.”
“휴대전화?”
“있어.”
“충전기?”
“있어.”
“옷?”
“있어.”
“진짜?”
“있다니까.”
태헌이 해원의 작은 가방을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해원이 먼저 말했다.
“그 질문 하면 혼자 간다.”
태헌이 입을 다물었다.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학습했네.”
“연애도 공부야.”
“누가 그래?”
“강태헌이.”
“신뢰 안 가.”
익숙한 대화였다.
그래서 더 좋았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두 사람은 잠시 멈췄다.
태헌이 물었다.
“긴장돼?”
“조금.”
“무서워?”
“조금.”
“후회해?”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랑 이렇게 오래 여행하는데?”
“그러니까 조금 무섭지.”
“싸우면?”
“각자 다니자.”
“진짜?”
“응.”
“내가 길 잃으면?”
“찾아오겠지.”
“네가 길 잃으면?”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네가 오겠지.”
태헌도 웃었다.
“응.”
“갈게.”
그 한마디면 됐다.
둘은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았다.
해원은 문득 몇 년 전 제주를 떠올렸다.
비가 쏟아지던 날.
젖은 운동화.
작은 우산 하나.
그리고 자신의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던 남자.
그때는 몰랐다.
그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일이 이렇게 긴 이야기가 될 줄은.
그날 강태헌은 해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해원도 그에게 걸어갔다.
누군가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사랑은 가운데에서 만나는 일이었다.
“해원아.”
“응.”
“우리 어디까지 갈까?”
태헌이 물었다.
해원은 출국장 너머를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목적지를 말했을 것이다.
하노이.
사파.
쿤밍.
혹은 그다음 도시.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하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나랑?”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응.”
“진짜?”
“응.”
태헌이 웃었다.
“그럼 오래 가자.”
해원도 웃었다.
“천천히.”
“알았어.”
둘은 다시 걸었다.
윤해원은 더 이상 누군가의 인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강태헌도 그녀를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의 집이 있었고,
각자의 일이 있었고,
각자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사이에,
서로에게로 가는 길 하나가 생겼다.
어떤 날은 태헌이 걸어왔고,
어떤 날은 해원이 달려갔다.
어떤 날은 기다렸고,
어떤 날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했다.
소유하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외면하지 않고.
해원은 태헌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태헌이 바라봤다.
“왜?”
해원이 웃었다.
“그냥.”
태헌도 웃었다.
“또 그냥?”
“응.”
“좋아서?”
해원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리고 말했다.
“응.”
“좋아서.”
그 말이면 충분했다.
스무 살의 사랑은 영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은 오늘 함께 걷는 것을 선택했다.
내일도 걷고 싶으면 다시 손을 잡고,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날에는 보내주고,
다시 보고 싶어지면 찾아가는 것.
그렇게 하루씩 선택하다 보면
어쩌면 그것이 영원이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출국장 끝에서 태헌이 물었다.
“해원아.”
“응.”
“다음 여행은 어디 갈까?”
해원이 웃었다.
“이번 여행부터 갔다 오자.”
“그래도 생각은 해보자.”
“또?”
“응.”
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
때로는 아이처럼 웃고,
때로는 자신보다 훨씬 어른처럼 기다려준 사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옆에서 함께 걸어갈 사람.
해원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디로?”
해원은 웃었다.
“우리 다음 이야기로.”
사랑은 정착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잃지 않은 채,
누군가와 함께 떠날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30화 완결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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