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꺼냈다
서연에게는 오래된 습관이 하나 있었다.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정확히 말하면,
해봐야 달라질 게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힘들어.”
그 말을 한다고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나 오늘 너무 아파.”
그 말을 한다고 누군가 대신 출근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하는 편이 빨랐다.
일어나고,
씻고,
일하고,
돌아오고.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일어나는 것.
그것이 서연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도진은 가끔 물었다.
“서연 씨는 왜 그렇게까지 일해요?”
처음에는 웃어넘겼다.
“돈 벌려고 일하지, 놀려고 일해요?”
“그래도 너무 많이 하잖아요.”
“괜찮아요. 아직 튼튼해.”
서연은 늘 그런 식이었다.
괜찮다는 말은 참 편리했다.
상대방의 질문도 멈추게 하고
자기 마음도 더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게 해 줬다.
그런데 도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상한 일이 생겼다.
조금씩 말하고 싶어졌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왜 쉬지 못하는지.
왜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은 만큼 지치는지.
그걸 도진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어느 날 밤이었다.
도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요?”
“일 끝났어요.”
“이제 집 가요?”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
“그럼?”
“또 일하러 가.”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또요?”
“응.”
“오늘 아침에도 일했잖아요.”
“했지.”
“서연 씨.”
도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다 쓰러져요.”
서연은 웃었다.
“쉽게 안 죽어.”
“그 말하지 말라니까.”
그 순간 서연은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평소 같으면 농담 하나 던지고 전화를 끊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도 힘들다고.
나라고 좋아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라고.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도진 씨.”
“응.”
“나도 이렇게까지 일하면서 살게 될 줄 몰랐어.”
도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연은 계속했다.
“나도 쉬고 싶어.”
그 말을 하는 순간
목이 조금 메었다.
서연은 얼른 웃었다.
“아, 왜 갑자기 분위기가 이래.”
도진은 웃지 않았다.
“말해봐요.”
“뭘.”
“하고 싶은 말.”
그 한마디가 이상했다.
말해봐요.
그동안 서연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해결바카라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끝까지 들어줄 사람.
그래서 그날,
서연은 조금 더 이야기했다.
생활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
돈은 벌어도 늘 나갈 곳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내가 멈추면 여러 가지가 함께 멈출 것 같아
겁이 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오래 혼자 견뎌와서
이제는 힘들다고 말하는 방법조차 잘 모르겠다는 것.
말을 끝내고 나니 서연은 괜히 민망했다.
“내가 별 얘기를 다 하네.”
도진이 말했다.
“왜요.”
“이런 얘기 잘 안 해.”
“나한테는 해도 돼요.”
그 말에 서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한테는 해도 돼요.
참 별것 아닌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날 서연에게는
누군가 문 하나를 열어주는 말처럼 들렸다.
그 뒤부터였다.
서연은 도진에게 조금씩 필터를 걷기 시작했다.
좋은 일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힘들면 힘들다고 했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했고,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아픈 날이면
그 이야기도 조금씩 꺼냈다.
어떤 날은 이야기를 하다가 울기도 했다.
그러면 도진은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네요.”
그 말 하나면 이상하게 숨이 쉬어졌다.
서연은 그제야 알았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건
그 사람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내 옆에서 도망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느 날 도진이 물었다.
“그동안 이런 얘기 누구한테 했어요?”
서연은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글쎄.”
“친구들한테도 안 해요?”
“별로.”
“왜?”
서연은 한참 뒤에 대답했다.
“자존심인가 봐.”
“자존심?”
“응.”
서연은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볼까 봐 싫어.”
“왜 불쌍해요.”
“그냥.”
“나는 그렇게 안 보는데.”
서연의 시선이 멈췄다.
도진이 말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 같아요.”
그 말이 서연의 가슴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불쌍한 여자가 아니라
열심히 사는 여자.
그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그래서 서연은 조금 더 용감해졌다.
하지만 사람에게 마음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보여주면
그다음에는 더 보여주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작은 이야기였다.
오늘 일이 힘들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몸이 피곤하다.
그다음에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가 나왔다.
가족.
아이.
생활.
외로움.
그리고 서연 자신도 누구에게 말해본 적 없는
마음속 이야기까지.
도진은 대부분 들어주었다.
하지만 가끔은 말했다.
“서연 씨 생각이 너무 많아요.”
또 어떤 날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까지 다 생각하면 머리 아파요.”
처음에는 서연도 웃었다.
“그러게. 나도 내 머리가 피곤해.”
둘은 같이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연은 몰랐다.
그 말이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서연은 도진을 믿기 시작했다.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말을 끝내기 전에
어떤 마음인지 알아채는 것 같았고,
다정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순간에는
그 말을 정확하게 건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연은 더 이상 감정을 걸러내지 않았다.
기쁘면 기쁘다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그에게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이
서연이 도진에게 건넨 가장 큰 마음이었는지도 몰랐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먼저,
나는 당신 앞에서
나를 숨기지 않겠다는 것.
그날 밤.
도진과 통화를 끝낸 서연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후회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나 이 사람한테 기대고 싶은가 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평생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려고 애써온 여자가
처음으로,
한 남자의 손을 잡아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서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마음을 열어주는 것과
그 마음의 무게를 받아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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