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원래 쉽게 설레는 여자가 아니었다
서연을 좋아한다는 남자는 의외로 많았다.
젊었을 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커서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한 뒤에도 가끔 그런 남자가 나타났다.
밥 한번 먹자고 하는 사람.
집에 잘 들어갔느냐며 밤늦게 안부를 묻는 사람.
별것 아닌 일에도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
어떤 남자는 꽤 오랫동안 서연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했다.
서연은 그럴 때마다 미안했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같이 밥을 먹으면 즐거웠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집에 돌아온 뒤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그의 이름이 떠도 심장이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손을 잡는 모습을 상상하면 오히려 어색했다.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서연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감각 하나가 애초부터 빠져서 태어난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편했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좋은 사람인 건 알아요. 그런데 저는…”
뒤에 붙는 말은 늘 같았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그 말을 들은 친구가 어느 날 웃었다.
“너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서연도 따라 웃었다.
“내가 이 나이에 뭘 높여. 혈압이나 안 높으면 다행이지.”
둘은 한참 웃었다.
하지만 서연은 알고 있었다.
눈이 높은 게 아니었다.
그저 없었다.
남자를 기다려본 기억도,
보고 싶어 잠을 설친 기억도,
휴대전화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연락 하나를 기다린 기억도.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는 사랑은 그랬다.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다
서연의 첫 결혼은 사랑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시작이었다.
그때의 그녀는 너무 어렸다.
나이만 어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떤 감정이 흐르는지조차 제대로 몰랐다.
좋아한다는 것과 결혼한다는 것의 차이도 몰랐다.
주변 사람들의 말과 상황이 그녀보다 먼저 앞으로 나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남편이라는 호칭이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서연은 그 사실을 결혼하고서야 알았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 관계에서 빠져나왔을 때 서연에게 남은 것은 그리움이 아니었다.
죄바카라감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참았으면 달랐을까.’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건 아닐까.’
사랑보다 죄바카라감이 오래갔다.
그리고 사람은 때때로 과거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다음 인생을 선택하기도 한다.
서연이 그랬다.
다음에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끝까지 바카라임져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엄마가 되면 지난날의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죄바카라감으로 시작한 바카라임이 얼마나 무거워질 수 있는지를.
사랑보다 생활
세월이 지나면서 서연은 점점 많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내.
엄마.
며느리.
누군가의 보호자.
그리고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
그중 어느 것도 ‘여자’라는 이름보다 가볍지 않았다.
아침이면 일어나야 했다.
돈이 부족하면 일을 해야 했다.
몸이 아프다고 공과금이 기다려주는 것도 아니었고 마음이 외롭다고 생활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서연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배웠다.
힘들어도 일어나야 한다.
울고 싶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 견디는 데 능숙해졌다.
아파도 괜찮다고 말하는 법.
힘들어도 웃는 법.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날이면 오히려 더 바쁘게 움직이는 법.
어느 날은 그런 생각도 했다.
사람이 강해지는 건 정말 좋은 일일까.
아니면 기댈 곳이 없어서 강한 척하는 법을 배우는 걸까.
답은 알 수 없었다.
대신 다음 날 아침이면 알람이 울렸다.
그러면 또 일어났다.
그게 서연의 인생이었다.
여자라는 이름
어느 순간부터 거울을 볼 때도 여자로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늘 얼굴이 부었네.
피곤해 보이네.
머리 좀 해야겠네.
그 정도였다.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가끔 아주 늦은 밤,
일을 끝내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럴 때 서연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한테 한번 제대로 기대어본 적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힘들다고 말하기 전에 해결바카라부터 찾았고,
아프다고 말하기 전에 약부터 먹었으며,
울고 싶을 때조차 혼자 있을 곳부터 찾았다.
그것이 서연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러니 사랑 같은 건 이제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쉰을 훌쩍 넘긴 여자가 무슨 설렘인가 싶었다.
이제 남은 인생은 조용히 살면 된다고.
돈 벌고,
내 몸 챙기고,
아이들 걱정 조금 덜 하고,
가끔 친구들과 맛있는 것 먹으면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우습다.
평생 없었던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한 순간 찾아오기도 한다.
그날도 별다른 날이 아니었다.
서연은 일을 마치고 피곤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남자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저 짧은 몇 마디.
서연은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잠시 후 다시 읽었다.
또 웃었다.
그러다 문득 표정이 굳었다.
“어?”
이상했다.
왜 웃었지?
서연은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또 읽었다.
이번에는 자신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잠가두었던 마음속 작은 방 하나가 있다는 것을.
너무 오래 닫아두어서
자기 자신조차 그 방의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별것 아닌 말 몇 마디를 들고 나타난 한 남자가
그 문 앞에 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 남자의 이름은
도진이었다.
그리고 서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도진을 만나면서 자신이 가장 많이 하게 될 질문이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할까?’가 아니라,
‘나는 왜 이제야 사랑을 알고 있는 걸까?’
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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