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다시 만나기 위해 헤어진다
“다음에도 꼭 와.”
“갈게.”
“진짜?”
“응.”
도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두 시간이 아니라 더 멀어도 갈게.”
전화를 끊은 뒤에도 서연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화면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도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두 시간이 아니라 더 멀어도 갈게.
그 말 하나가 이상하게 마음을 붙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아팠는데.
역에서 도진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정말 가슴 한쪽이 뜯겨나가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 빈자리에 작은 약속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다시 온다는 약속.
서연은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오늘 하루가 거꾸로 흘러왔다.
도진과 마주 앉아 먹었던 밥.
자신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던 손.
술을 마시지 않겠다며 물 잔을 들던 모습.
촬영장 앞에서 기다리던 얼굴.
그리고 헤어지기 전 자신을 안아주던 품.
서연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미쳤나 봐.”
혼잣말을 하고 웃었다.
이 나이에.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온 밤에 잠을 못 이루다니.
그런데 곧 웃음이 사라졌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두려워지는 것도 있었다.
이 사람이 없는 하루가 다시 익숙해질 수 있을까.
도진을 만나기 전에는 혼자인 시간이 이렇게 길지 않았다.
일하고,
집에 돌아오고,
씻고,
쓰러지듯 잠들면 하루가 끝났다.
외롭다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 도진을 알고 난 뒤부터 혼자인 시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빈 의자도 보였고,
말없는 휴대전화도 보였고,
밥을 혼자 먹는 시간도 보였다.
사랑이 외로움을 없애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행복을 알아버린 뒤의 외로움은 전보다 더 선명했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서연은 벌떡 일어나 화면을 봤다.
도진이었다.
자?
서연은 웃었다.
안 자.
답은 바로 왔다.
왜?
당신 때문에.
한참 답이 없었다.
서연은 괜히 보냈나 싶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왜 나 때문에 못 자.”
도진의 목소리였다.
“몰라.”
“또 생각 많아졌어?”
“응.”
“무슨 생각.”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우리 생각.”
“우리?”
“응.”
도진이 웃었다.
“오늘 그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아직도 할 생각이 남았어?”
“그러니까.”
서연은 베개에 기대며 말했다.
“당신 하고 헤어지고 오니까 더 생각나.”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서연은 괜히 민망해졌다.
“됐어. 자.”
“서연아.”
“응.”
“나도 그래.”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좋았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도진아.”
“응.”
“당신은 내가 왜 좋아?”
이번에는 꽤 오래 대답이 없었다.
“자?”
“생각 중이야.”
“그걸 그렇게 오래 생각해야 해?”
“많아서 고르는 중.”
서연이 웃었다.
“말은.”
도진도 웃었다.
“처음에는 예뻐서.”
“처음에는?”
“응.”
“지금은 안 예뻐?”
“말 좀 끝까지 들어.”
“해봐.”
도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처음에는 그냥 여자로 보였어.”
서연은 조용히 들었다.
“근데 만나면서 이상해졌어.”
“뭐가.”
“자꾸 궁금해.”
“뭐가 궁금한데.”
“밥은 먹었는지. 일은 끝났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집에는 들어갔는지.”
서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게 좋아하는 거야?”
“나는 그런 것 같아.”
도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응.”
“당신이 웃으면 좋아.”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오늘 촬영 끝나고 나올 때 웃었잖아.”
“응.”
“그거 보니까 기분 좋더라.”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이 물었다.
“당신은?”
“뭐가?”
“나는 왜 좋은데.”
이번에는 서연이 침묵했다.
좋은 이유.
처음에는 자신도 몰랐다.
다정한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잡아주는 것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여자로 바라봐주는 눈빛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서연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 옆에 있으면.”
“응.”
“내가 여자 같아.”
도진은 말이 없었다.
“누구 엄마도 아니고, 누구 아내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서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냥 서연 같아.”
도진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
“그게 좋은 거야?”
“응.”
“그럼 계속 서연 하면 되지.”
서연은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쉬워?”
“나 만날 때는 그래.”
“당신 만날 때만?”
“일단은.”
도진이 웃었다.
“나중에는 혼자 있을 때도 그렇게 살면 되고.”
서연은 그 말을 오래 마음에 담았다.
나중에는 혼자 있을 때도.
도진은 자신을 그의 여자 안에 가두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연이라는 사람을 밖으로 꺼내주고 있었다.
“도진아.”
“응.”
“우리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지 않아?”
도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말했다.
“조금만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얼마나 일찍?”
“한 십 년?”
도진이 웃었다.
“십 년 전에는 나 안 좋아했을걸.”
“왜?”
“나 지금보다 더 별로였어.”
서연이 웃었다.
“지금도 별론데.”
“끊는다.”
“농담이야.”
잠시 웃음이 이어졌다.
그러다 도진이 조용히 말했다.
“난 지금이라서 만난 것 같은데.”
서연이 멈칫했다.
“왜?”
“예전에 만났으면 당신 귀한 줄 몰랐을 수도 있잖아.”
서연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은 알아?”
“조금.”
“뭐야.”
“많이.”
도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놓치기 싫어.”
서연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쁘면서도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사람의 마음은 참 욕심이 많았다.
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만나고 싶고,
만나면 더 오래 있고 싶고,
오래 있으면 헤어지기 싫고,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놓치기 싫다는 말까지 오래 듣고 싶었다.
“서연아.”
“응.”
“울어?”
“아니.”
“또 거짓말.”
서연은 눈물을 닦았다.
“당신 때문에 자꾸 울잖아.”
“내가 뭘 했다고.”
“그러게.”
잠시 후 도진이 말했다.
“다음에는 울지 마.”
“그건 약속 못 해.”
“왜.”
“헤어질 때 아픈 걸 어떡해.”
도진이 조용해졌다.
서연은 천장을 바라봤다.
“도진아.”
“응.”
“나 오늘 생각했어.”
“뭘.”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나.”
도진이 웃었다.
“집에 가야 하니까.”
“그건 아는데.”
“내일 일해야 하고.”
“그것도 알아.”
서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근데 다른 생각도 들더라.”
“뭔데?”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가 다시 만나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서.”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서연은 계속 말했다.
“오늘 끝까지 같이 있으면 내일은 없잖아.”
“응.”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또 살아야 다음에 만날 수 있는 거잖아.”
도진은 한참 뒤 대답했다.
“그렇네.”
“그러니까 헤어지는 것도 우리 사랑의 일부인가 봐.”
서연은 스스로 말하고도 가슴이 아팠다.
헤어짐도 사랑이라니.
참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맞는 말이었다.
어른의 사랑은 매일 붙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마음 한쪽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것.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고,
다시 만날 날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헤어지는 시간이 조금은 덜 슬플 것 같았다.
“그럼.”
도진이 말했다.
“오늘 우리 헤어진 거 아니네.”
“그럼?”
“다음에 만나러 가는 중인 거지.”
서연은 웃었다.
“그게 뭐야.”
“맞잖아.”
도진이 말했다.
“오늘 헤어진 순간부터 다음 만남 시작된 거잖아.”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끔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서연의 가장 아픈 곳에 따뜻한 말을 올려놓았다.
“그럼 언제 만날 건데?”
서연이 물었다.
“또 그 얘기야?”
“중요해.”
“스케줄 봐야지.”
서연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봐. 또 현실.”
도진이 웃었다.
“현실 속에서 만나야 오래 만나지.”
그 말에 서연은 조용해졌다.
현실 속에서 만나야 오래 만난다.
불꽃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지키면서 오래가는 사랑.
서연이 원했던 등불 같은 사랑이 어쩌면 그런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알았어.”
“뭘.”
“기다릴게.”
도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너무 오래는 안 기다리게 할게.”
“진짜?”
“응.”
“약속?”
“약속.”
그날 두 사람은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전화를 끊지 못했다.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지 않는 시간이 더 길었다.
도진의 숨소리.
서연의 작은 뒤척임.
가끔 서로가 아직 있는지 확인하는 짧은 목소리.
“자?”
“아니.”
“당신은?”
“안 자.”
그것이면 됐다.
같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같은 밤 안에 있었다.
한참 뒤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아.”
“응.”
“이제 자.”
“당신 먼저 자.”
“당신 자는 거 보고.”
서연이 웃었다.
“전화로 어떻게 봐.”
“그냥 알지.”
서연은 눈을 감았다.
“나 눈 감았어.”
“응.”
“도진아.”
“왜.”
서연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응.”
“헤어질 때 조금 더 오래 안아줘.”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은 민망해서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됐어. 못 들은 걸로 해.”
그때 도진이 말했다.
“싫어.”
서연의 눈이 떠졌다.
“뭐가 싫어?”
“조금 더는 싫다고.”
“그럼?”
도진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아주 오래 안아줄게.”
서연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났다.
“잘 자.”
“응.”
“내일 전화할게.”
“응.”
“서연아.”
“또 왜.”
도진이 웃었다.
“보고 싶다.”
서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날 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다시 만나기 위해 오늘은 헤어진다고.
그렇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몰랐다.
다음 만남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게 될 줄은.
그리고 그날,
서연이 도진에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자신의 현실을 결국 말하게 되리라는 것도.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보고 싶다는 말만으로 머물 수 없었다.
오래 함께하고 싶다면 언젠가는 서로의 삶 전체를 바라봐야 했다.
좋은 것만이 아니라,
숨기고 싶었던 것까지.
도진은 과연 서연의 현실까지 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서연은 그 대답을 들은 뒤에도,
도진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26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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