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열리지 않은 편지
연원(淵源)연원(淵源)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2화. 열리지 않은 편지
1980년 5월.
서울의 봄은 유난히 짧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었는데, 어느새 골목의 담벼락에는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았다.
김씨 집안의 감나무에는 연둣빛 잎이 무성해졌다.
나무 아래에는 작은 새싹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김도현이 봄부터 물을 주며 돌보던 새싹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았던 것이 이제 제법 줄기를 세우고 있었다.
도현은 학교에 가기 전이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많이 컸네.”
손가락으로 잎을 건드리려다가 멈추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하시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린 것은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다. 자라는 데도 힘이 드는 법이거든.”
도현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작은 물뿌리개로 흙을 적셨다.
그 모습을 사랑채 창문 너머에서 박노식이 지켜보고 있었다.
노식은 오래도록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라는 데도 힘이 든다.
그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닿았다.
도현은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아이가 얼마나 힘겹게 자라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노식은 품속의 낡은 봉투를 만졌다.
한연화가 남긴 편지였다.
열 해 동안 전해지지 못한 편지.
그는 이제 그 편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날 아침.
윤정애는 안채에서 딸 명숙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명숙은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올게요.”
“어느 친구?”
“영숙이요.”
“지난번에도 그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니?”
명숙은 얼굴을 찌푸렸다.
“공부하러 간다는데 왜 자꾸 물어요?”
정애는 빗을 내려놓았다.
“걱정되니까 그러지.”
“엄마는 나만 걱정해요?”
정애가 딸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니?”
명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현이는 맨날 잘한다고만 하면서.”
정애는 한숨을 쉬었다.
“또 그 이야기니?”
명숙은 거울 속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왜?”
“나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뭔데?”
명숙은 잠시 망설였다.
“그 여자 말이에요.”
정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구?”
“도현이 낳은 여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정애는 천천히 빗을 내려놓았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말랬지.”
“왜요?”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니까.”
명숙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왜 그렇게 무서워해요?”
정애의 입술이 떨렸다.
“무섭기는 뭐가 무섭니.”
“그 여자 이름만 나와도 엄마 얼굴이 달라지잖아요.”
정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은 한참 어머니를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그 여자가 다시 찾아오면 어떡해요?”
정애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명숙은 말을 이었다.
“도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정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일 없어.”
“어떻게 알아요?”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다시는 이 집에 오지 못해.”
명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정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오래전 무슨 짓을 했는지 딸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 늦겠다. 어서 가.”
명숙은 어머니를 한참 바라보다 가방을 들었다.
방문이 닫혔다.
정애는 거울 앞에 혼자 남았다.
거울 속에는 어느새 중년이 되어가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젊은 날의 자존심도,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도 세월 속에서 많이 닳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감정만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이었다.
한연화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도현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이 한순간에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정애는 거울을 덮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같은 시각.
황씨 집안에서는 아침부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황서윤이 학교에서 발표할 글을 연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서윤이 큰소리로 읽자 전옥분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서윤은 웃음을 참으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그러나 가장 마음이 따뜻한 사람도 할머니입니다.”
옥분은 그제야 웃었다.
“이 녀석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이정순도 부엌에서 웃었다.
“어머니, 서윤이가 글을 참 재미있게 썼네요.”
서윤은 신이 나서 계속 읽었다.
“할머니는 내가 잘못하면 혼을 내시지만, 밤에는 꼭 이불을 덮어주십니다.”
옥분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걸 다 알고 있었니?”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는 줄 알았더니.”
“할머니 발소리 들리거든.”
옥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 썼다.”
서윤은 공바카라을 덮었다.
“나 오늘 발표 잘할 거야.”
정순이 물었다.
“떨리지는 않고?”
서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떨리지.”
“그런데?”
“틀리면 다시 읽으면 되잖아.”
옥분은 웃었다.
“그래. 세상에 한 번 틀렸다고 끝나는 일만 있는 건 아니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는 단지 학교에서 발표를 잘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서윤은 발표를 무사히 마쳤다.
선생님에게 칭찬도 받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다.
그때 박혜진이 물었다.
“서윤아, 너 김도현 오빠랑 친하지?”
“응.”
“그 오빠는 왜 맨날 혼자 있어?”
서윤은 고무줄을 넘다가 멈추었다.
“혼자 있는 거 좋아하나 보지.”
이미영이 말했다.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김도현 오빠네 집 엄청 부자래.”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집이 크잖아.”
혜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있대.”
서윤이 돌아보았다.
“무슨 소문?”
혜진은 주변을 살폈다.
“그 오빠 엄마가…”
그때 서윤이 말을 끊었다.
“박혜진.”
혜진이 놀라 바라보았다.
“왜?”
“남의 집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혜진은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그냥 들은 거 말한 건데.”
서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들은 말이 다 사실은 아니잖아.”
미영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만하자.”
서윤은 다시 고무줄 앞으로 섰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혜진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도현의 어머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른 것이 있었다.
도현은 어머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야기는 가끔 했다.
할아버지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는 늘 말수가 줄어들었다.
서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도현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날 오후.
김도현은 담임 강인호 선생님에게 불려갔다.
“도현아.”
“네.”
“이번 글짓기 대회에 나가볼 생각 없니?”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제가요?”
“그래.”
강인호는 도현의 공바카라을 펼쳤다.
“네가 쓴 글을 읽어봤는데 생각이 깊더구나.”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썼어요.”
“글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적는 거지.”
선생님은 웃었다.
“주제는 가족이야.”
도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족이요?”
“그래. 우리 가족에 관한 이야기.”
도현은 공바카라을 내려다보았다.
선생님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어렵니?”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요.”
“그럼 한번 써보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교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족.
그는 가족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네 명의 누나.
그리고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그러나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했다.
어머니는 가끔 귤을 주었다.
첫째 누나는 자신을 도와주기도 했다.
막내 누나는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둘째 누나는 자신을 미워했다.
셋째 누나도 대부분 자신을 못 본 척했다.
도현은 생각했다.
가족은 모두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가족은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온 도현은 작은방에 앉았다.
글짓기 대회에 낼 원고지를 펼쳤다.
제목을 적었다.
'우리 가족.'
그러나 다음 문장을 쓸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연필을 들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명옥이었다.
“도현아.”
“응.”
“뭐 해?”
“글 써.”
“무슨 글?”
“우리 가족.”
명옥은 잠시 멈칫했다.
“우리 가족?”
“응.”
명옥은 원고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나와?”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지.”
명옥은 놀란 얼굴이었다.
“정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도 가족이잖아.”
명옥은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웃었다.
“그래.”
그녀는 방문을 닫으려다 멈추었다.
“도현아.”
“응?”
“나도 네가 싫은 건 아니야.”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명옥은 시선을 피했다.
“그냥…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옥은 잠시 서 있다가 방을 나갔다.
도현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나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싫지 않은데도 차갑게 대할 수 있을까.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줄 수 있을까.
그는 원고지에 첫 문장을 적었다.
'우리 집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적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도현은 한참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며칠 뒤.
박노식은 충청도의 작은 읍내에 도착했다.
백춘식이 알려준 마지막 단서를 따라온 길이었다.
그는 오래된 버스터미널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시골 장터에는 봄나물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노식은 수첩을 펼쳤다.
한연화.
1970년 여름 이후 충청도 어느 마을로 내려갔다는 여자.
그녀가 머물렀다는 곳은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백춘식은 한 가지 이름을 더 알려주었다.
최분례.
한연화의 먼 친척이라는 여자였다.
노식은 장터에서 반찬을 파는 노파에게 물었다.
“혹시 최분례라는 분을 아십니까?”
노파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분례?”
“예.”
“어디 사는 사람인데?”
“이 근처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노파는 잠시 생각했다.
“아, 분례네?”
노식의 눈이 커졌다.
“아십니까?”
“알지. 그런데 그 집은 오래전에 이사 갔는데.”
노식은 숨을 골랐다.
“어디로 갔습니까?”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몰라. 남편 일 때문에 옮겼다고 했던가.”
노식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노파가 덧붙였다.
“그런데 그 집에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여자 하나가 있었어.”
노식이 고개를 들었다.
“젊은 여자요?”
“응. 말수가 적고 얼굴이 참 고왔지.”
노식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노파는 잠시 생각했다.
“연화였던가…”
노식은 숨을 멈추었다.
“한연화요?”
노파는 손뼉을 쳤다.
“그래! 한연화!”
노식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여자가 어떻게 지냈습니까?”
노파는 한숨을 쉬었다.
“참 딱한 여자였지.”
“왜요?”
“밤마다 아이를 찾는 소리를 했거든.”
노식의 손이 떨렸다.
노파는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잃은 줄 알았어.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아이가 어디 살아 있다고 믿는 모양이더라고.”
노식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노파는 계속 말했다.
“새벽이면 마을 뒷산에 올라가곤 했어.”
“왜요?”
“몰라. 그냥 서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더라.”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연화는 아이가 살아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살았다.
노파는 노식을 살폈다.
“그 여자를 왜 찾으슈?”
노식은 잠시 망설였다.
“오래전 인연이 있습니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노식은 다시 물었다.
“그 뒤에 어디로 갔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노파는 잠시 생각했다.
“분례네가 떠날 때 그 여자도 같이 갔는지는 모르겠어.”
노식은 수첩을 꺼냈다.
“혹시 다른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까?”
노파는 한참 생각했다.
그러다 말했다.
“아, 하나 있어.”
노식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입니까?”
“그 여자가 편지를 자주 썼어.”
노식의 눈이 커졌다.
“편지를요?”
“응. 그런데 부치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노파는 말했다.
“우체국에 가는 걸 본 적이 없거든. 늘 편지만 쓰고 서랍에 넣었다고 했어.”
노식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한연화가 남긴 편지는 한 통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어쩌면 매년 아이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아이가 몇 살이 되었는지 헤아리며.
어떤 얼굴로 자라고 있을지 상상하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이에게 말을 걸며.
노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편지들을 찾아야 한다고.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한 여자가 어머니로 살아온 시간이었다.
같은 날 저녁.
김씨 집안에서는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도현의 원고지가 사라진 것이었다.
도현은 바카라상 서랍을 뒤졌다.
바카라 사이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명숙이 방문 앞에 나타났다.
“뭘 그렇게 찾아?”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원고지요.”
“무슨 원고지?”
“글짓기 대회에 낼 거요.”
명숙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제목이 뭔데?”
“우리 가족이요.”
명숙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가족?”
“네.”
명숙은 비웃듯 웃었다.
“너는 우리 가족에 대해 뭘 안다고 글을 써?”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숙은 말을 이었다.
“가족이 뭔지도 모르면서.”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누나.”
“왜?”
“제 원고지 봤어요?”
명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의심하는 거야?”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명숙은 차갑게 말했다.
“네 물건은 네가 잘 챙겨.”
그녀는 돌아섰다.
도현은 한참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바카라상 서랍을 뒤졌다.
원고지는 없었다.
그날 밤 도현은 원고지를 새로 꺼냈다.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글이 전과 달라졌다.
처음에는 가족의 모습을 적으려 했다.
이번에는 가족의 마음을 적고 싶어졌다.
그는 천천히 썼다.
'우리 집에는 높은 담장이 있습니다.'
'담장 밖에서 보면 우리 집은 아주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담장 안에서는 서로 마음을 잘 모릅니다.'
도현은 연필을 멈추었다.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적었다.
'나는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원고지를 접었다.
이번에는 바카라상 서랍에 넣지 않았다.
푸른색 공바카라 사이에 끼워두었다.
다음 날.
서윤은 학교에서 도현을 만났다.
도현의 표정이 어두웠다.
“오빠.”
“응.”
“무슨 일 있어?”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서윤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거짓말.”
도현은 웃지 않았다.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오늘 글 발표해서 칭찬받았어.”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응.”
“잘했네.”
서윤은 웃었다.
“오빠도 글 잘 쓰잖아.”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나도 글짓기 대회 나가.”
서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응.”
“무슨 글?”
“우리 가족.”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가족 이야기잖아.”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서윤아.”
“왜?”
“가족은 꼭 서로 좋아해야 해?”
서윤은 눈을 깜빡였다.
“당연하지.”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
서윤은 말했다.
“우리 집도 맨날 싸우거든.”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너희 집도?”
“응. 엄마랑 할머니도 가끔 싸우고, 나도 혼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웃었다.
“근데 싸우고 나면 다시 밥 먹잖아.”
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가족은 싸워도 다시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사람들 아닐까?”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늘 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면 식탁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서윤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오빠.”
“응.”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을래?”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응.”
“왜?”
서윤은 웃었다.
“그냥. 오늘 우리 집에 감자조림 했거든.”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괜찮을까?”
서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오빠 좋아하잖아.”
도현은 조금 웃었다.
서윤은 그의 팔을 잡았다.
“가자.”
두 아이는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그날 저녁 도현은 황씨 집안의 작은 밥상에 앉았다.
전옥분은 그에게 밥을 한 공기 더 퍼주었다.
“많이 먹어라.”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옥분은 웃었다.
“밥 먹는데 무슨 인사를 그렇게 하니.”
이정순은 감자조림을 도현의 밥그릇 가까이 놓아주었다.
“이거 좋아하니?”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윤은 옆에서 떠들었다.
“할머니, 도현 오빠 글짓기 대회 나간대!”
옥분은 놀라 바라보았다.
“그래?”
도현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네.”
옥분은 웃었다.
“잘됐구나. 무슨 글을 쓰니?”
“가족 이야기요.”
옥분은 잠시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가족 이야기는 참 어렵지.”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옥분은 웃었다.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도 많으니까.”
도현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그날 저녁 황씨 집안의 밥상은 시끄러웠다.
서윤은 학교 이야기를 했고, 정순은 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옥분은 손녀에게 밥을 흘리지 말라고 잔소리했다.
그러다 모두 함께 웃었다.
도현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가족이라는 것이 꼭 같은 피를 나눈 사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며칠 뒤.
김씨 집안의 안채에서 윤정애는 도현의 원고지를 발견했다.
명숙의 바카라상 서랍 안이었다.
정애는 딸의 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그것을 보았다.
원고지 첫 장에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우리 가족.'
정애는 조심스럽게 펼쳤다.
도현의 글씨였다.
'우리 집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많이 하십니다.'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십니다.'
'누나들은 학교에 다니고 나는 공부를 합니다.'
정애는 다음 장을 넘겼다.
'우리 집에는 높은 담장이 있습니다.'
'담장 밖에서 보면 우리 집은 아주 좋아 보입니다.'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다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가끔 우리 집이 무섭습니다.'
정애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음 줄을 읽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원고지를 내려놓았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명숙이었다.
“엄마?”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니?”
명숙은 원고지를 보았다.
얼굴이 굳어졌다.
“그걸 왜 봐요?”
정애는 조용히 물었다.
“네가 가져왔니?”
명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애는 다시 물었다.
“도현이 원고지를 네가 가져왔어?”
명숙은 고개를 돌렸다.
“그냥…”
정애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그랬니?”
명숙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싫어서요.”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렇게 싫었니?”
명숙은 울음을 터뜨렸다.
“도현이가 우리 가족 이야기까지 잘 쓰는 게 싫었어요!”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숙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공부도 잘하고, 아버지한테 사랑도 받고, 이제 글까지 잘 쓰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애는 딸을 끌어안았다.
명숙은 어머니 품에서 울었다.
정애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날 정애는 처음으로 딸에게 말했다.
“명숙아.”
“네…”
“네가 아무리 속상해도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돼.”
명숙은 고개를 들었다.
정애는 눈물을 닦았다.
“도현이가 잘못한 게 아니잖니.”
명숙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낯설었다.
어머니가 도현의 편을 드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정애는 원고지를 들어 올렸다.
“이건 도현이에게 돌려줘야 해.”
명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
정애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사과해야 한다.”
명숙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박노식은 충청도에서 돌아왔다.
그의 가방에는 작은 수첩이 들어 있었다.
최분례의 옛 주소.
한연화가 머물렀다는 마을.
그리고 그녀가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
노식은 사랑채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그는 한연화가 남긴 봉투를 꺼냈다.
아직 열지 않은 편지였다.
노식은 봉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알았다.
한연화는 아이를 잊지 않았다.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아이에게 편지를 쓰며 살았다.
노식은 봉투를 손에 쥐었다.
이 편지는 언젠가 도현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전해야 할까.
도현은 아직 열 살이었다.
집안의 비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렇다고 영원히 숨길 수도 없었다.
노식은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먼저 한연화를 찾기로.
그녀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보기로.
그 후에야 도현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노식은 봉투를 다시 넣었다.
그때 사랑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도현이었다.
노식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도현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예. 정리할 것이 조금 있어서요.”
도현은 방 안을 바라보았다.
“뭐 정리하세요?”
노식은 잠시 망설였다.
“옛날 서류입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아저씨.”
“예.”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셨어요?”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냥요.”
노식은 미소 지었다.
“엄하셨지만 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잘해주셨어요.”
“그렇지요.”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거짓말도 하셨어요?”
노식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무엇을요?”
“어른도 잘못할 수 있다고요.”
노식은 한참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도 잘못한 일이 있었을까요?”
노식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김만석을 평생 모셨다.
그의 장점도 알고 있었고, 잘못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잘못 중 하나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아이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노식은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
“네.”
“세상에 잘못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도요?”
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잘못하면 어떻게 해야 해요?”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인정해야지요.”
“그다음에는요?”
“바로잡아야 합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조용히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도련님도 편히 주무십시오.”
도현은 돌아섰다.
노식은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날 그는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
김만석의 명령을 따랐던 일.
한연화의 흔적을 지우는 데 협조했던 일.
도현이 자신의 출생을 모르게 만든 일.
그 모든 것에 자신도 바카라임이 있었다.
노식은 봉투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는 바로잡아야겠지요.”
1980년 5월의 마지막 주.
김도현은 글짓기 대회에 원고를 제출했다.
제목은 '우리 가족'이었다.
그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서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잘못하면 사과하겠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강인호 선생님은 그 글을 오래 읽었다.
그리고 원고지를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는 도현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에 남는 것이 있었다.
아이가 가족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소박하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
잘못하면 사과하는 것.
함께 웃는 것.
어른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 어린아이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날 저녁.
윤정애는 도현의 작은방 앞에 섰다.
손에는 원고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명숙의 방에서 발견한 도현의 첫 번째 원고였다.
정애는 문을 두드렸다.
“도현아.”
“네, 어머니.”
“잠깐 들어가도 되겠니?”
“네.”
정애는 문을 열었다.
도현은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정애는 원고지를 내밀었다.
“이거.”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제 원고지예요.”
정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숙이 방에서 찾았어.”
도현은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정애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도현아.”
“네.”
“네가 쓴 글을 읽어봤어.”
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죄송해요.”
정애는 놀라 바라보았다.
“왜 사과하니?”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정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구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정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정작 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정애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네가 집이 무섭다고 썼더구나.”
도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원고지를 꼭 쥐었다.
정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러니?”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애는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뒤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요.”
정애는 숨을 멈추었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요.”
그 말은 정애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그녀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울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정애는 천천히 아이 앞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도현아.”
도현은 움찔했다.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아이가 자신의 손길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똑똑히 보았다.
정애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정애는 다시 말했다.
“네가 무서워하게 만든 건 내 잘못이야.”
도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애도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한참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정애도 아이를 억지로 끌어안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날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날 밤.
도현은 푸른색 공바카라을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적었다.
'오늘 어머니가 미안하다고 하셨다.'
잠시 멈추었다.
'처음이었다.'
도현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는 다음 문장을 쓰지 못했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공바카라을 덮었다.
그리고 창밖의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 아래 작은 새싹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도현은 생각했다.
사람도 나무처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까.
오늘 미안하다고 말한 어머니가 내일도 자신에게 친절할 수 있을까.
그는 아직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그것이 아홉 해 동안 외로움을 견뎌온 아이의 마음이었다.
같은 밤.
박노식은 사랑채에서 한연화의 편지를 다시 꺼냈다.
그는 봉투를 바라보았다.
열 해 동안 열리지 않은 편지.
그 안에는 어떤 말이 들어 있을까.
아이를 향한 사랑일까.
세상을 향한 원망일까.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겨놓은 마지막 인사일까.
노식은 봉투를 손끝으로 만졌다.
그러나 끝내 열지 않았다.
그 편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도현의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봉투를 다시 넣었다.
그리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한연화의 행적을 계속 찾을 것.'
그 아래에 또 한 줄을 적었다.
'아이에게 진실을 전할 때를 준비할 것.'
노식은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는 밤바람이 불었다.
감나무 잎들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그는 한참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밀은 오래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감춘 시간만큼 더 많은 사람의 삶을 흔들 수 있다고.
그날 밤 김씨 집안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잠들었다.
윤정애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사과한 일을 떠올렸다.
명숙은 어머니가 도현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지 알 수 없었다.
박노식은 한연화를 찾을 다음 길을 생각했다.
그리고 김도현은 작은방에서 푸른색 공바카라을 베개 옆에 놓고 잠들었다.
그 공바카라에는 아직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들이 쌓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태어난 순간에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침묵을 선택하며, 어떤 손길을 내미는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1980년 봄.
김씨 집안의 높은 담장 안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가 곧 용서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과 한마디가 지난 상처를 모두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여전히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한연화가 남긴 편지.
그 편지가 열리는 날, 김도현은 자신이 알고 있던 가족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은 다만 열 살 소년이 감나무 아래 작은 새싹에 물을 주며 내일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는 내일이 반드시 오늘보다 따뜻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진실은 밝혀지는 순간보다, 밝혀지기까지의 시간이 더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편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편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제1부. 두 가문의 뿌리
제12화. 열리지 않은 편지
1980년 5월.
서울의 봄은 유난히 짧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었는데, 어느새 골목의 담벼락에는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았다.
김씨 집안의 감나무에는 연둣빛 잎이 무성해졌다.
나무 아래에는 작은 새싹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김도현이 봄부터 물을 주며 돌보던 새싹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았던 것이 이제 제법 줄기를 세우고 있었다.
도현은 학교에 가기 전이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많이 컸네.”
손가락으로 잎을 건드리려다가 멈추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하시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린 것은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다. 자라는 데도 힘이 드는 법이거든.”
도현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작은 물뿌리개로 흙을 적셨다.
그 모습을 사랑채 창문 너머에서 박노식이 지켜보고 있었다.
노식은 오래도록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라는 데도 힘이 든다.
그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닿았다.
도현은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아이가 얼마나 힘겹게 자라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노식은 품속의 낡은 봉투를 만졌다.
한연화가 남긴 편지였다.
열 해 동안 전해지지 못한 편지.
그는 이제 그 편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날 아침.
윤정애는 안채에서 딸 명숙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명숙은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올게요.”
“어느 친구?”
“영숙이요.”
“지난번에도 그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니?”
명숙은 얼굴을 찌푸렸다.
“공부하러 간다는데 왜 자꾸 물어요?”
정애는 빗을 내려놓았다.
“걱정되니까 그러지.”
“엄마는 나만 걱정해요?”
정애가 딸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니?”
명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현이는 맨날 잘한다고만 하면서.”
정애는 한숨을 쉬었다.
“또 그 이야기니?”
명숙은 거울 속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왜?”
“나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뭔데?”
명숙은 잠시 망설였다.
“그 여자 말이에요.”
정애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구?”
“도현이 낳은 여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정애는 천천히 빗을 내려놓았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말랬지.”
“왜요?”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니까.”
명숙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왜 그렇게 무서워해요?”
정애의 입술이 떨렸다.
“무섭기는 뭐가 무섭니.”
“그 여자 이름만 나와도 엄마 얼굴이 달라지잖아요.”
정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은 한참 어머니를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그 여자가 다시 찾아오면 어떡해요?”
정애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명숙은 말을 이었다.
“도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정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일 없어.”
“어떻게 알아요?”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다시는 이 집에 오지 못해.”
명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요?”
정애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오래전 무슨 짓을 했는지 딸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 늦겠다. 어서 가.”
명숙은 어머니를 한참 바라보다 가방을 들었다.
방문이 닫혔다.
정애는 거울 앞에 혼자 남았다.
거울 속에는 어느새 중년이 되어가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젊은 날의 자존심도,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도 세월 속에서 많이 닳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감정만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두려움이었다.
한연화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도현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이 한순간에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정애는 거울을 덮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같은 시각.
황씨 집안에서는 아침부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황서윤이 학교에서 발표할 글을 연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서윤이 큰소리로 읽자 전옥분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서윤은 웃음을 참으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그러나 가장 마음이 따뜻한 사람도 할머니입니다.”
옥분은 그제야 웃었다.
“이 녀석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이정순도 부엌에서 웃었다.
“어머니, 서윤이가 글을 참 재미있게 썼네요.”
서윤은 신이 나서 계속 읽었다.
“할머니는 내가 잘못하면 혼을 내시지만, 밤에는 꼭 이불을 덮어주십니다.”
옥분은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걸 다 알고 있었니?”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는 줄 알았더니.”
“할머니 발소리 들리거든.”
옥분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 썼다.”
서윤은 공바카라을 덮었다.
“나 오늘 발표 잘할 거야.”
정순이 물었다.
“떨리지는 않고?”
서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떨리지.”
“그런데?”
“틀리면 다시 읽으면 되잖아.”
옥분은 웃었다.
“그래. 세상에 한 번 틀렸다고 끝나는 일만 있는 건 아니지.”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는 단지 학교에서 발표를 잘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서윤은 발표를 무사히 마쳤다.
선생님에게 칭찬도 받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다.
그때 박혜진이 물었다.
“서윤아, 너 김도현 오빠랑 친하지?”
“응.”
“그 오빠는 왜 맨날 혼자 있어?”
서윤은 고무줄을 넘다가 멈추었다.
“혼자 있는 거 좋아하나 보지.”
이미영이 말했다.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 김도현 오빠네 집 엄청 부자래.”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집이 크잖아.”
혜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있대.”
서윤이 돌아보았다.
“무슨 소문?”
혜진은 주변을 살폈다.
“그 오빠 엄마가…”
그때 서윤이 말을 끊었다.
“박혜진.”
혜진이 놀라 바라보았다.
“왜?”
“남의 집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혜진은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그냥 들은 거 말한 건데.”
서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들은 말이 다 사실은 아니잖아.”
미영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만하자.”
서윤은 다시 고무줄 앞으로 섰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혜진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도현의 어머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른 것이 있었다.
도현은 어머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야기는 가끔 했다.
할아버지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는 늘 말수가 줄어들었다.
서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도현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날 오후.
김도현은 담임 강인호 선생님에게 불려갔다.
“도현아.”
“네.”
“이번 글짓기 대회에 나가볼 생각 없니?”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제가요?”
“그래.”
강인호는 도현의 공바카라을 펼쳤다.
“네가 쓴 글을 읽어봤는데 생각이 깊더구나.”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썼어요.”
“글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야.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적는 거지.”
선생님은 웃었다.
“주제는 가족이야.”
도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가족이요?”
“그래. 우리 가족에 관한 이야기.”
도현은 공바카라을 내려다보았다.
선생님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어렵니?”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요.”
“그럼 한번 써보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교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족.
그는 가족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네 명의 누나.
그리고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그러나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했다.
어머니는 가끔 귤을 주었다.
첫째 누나는 자신을 도와주기도 했다.
막내 누나는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둘째 누나는 자신을 미워했다.
셋째 누나도 대부분 자신을 못 본 척했다.
도현은 생각했다.
가족은 모두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가족은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온 도현은 작은방에 앉았다.
글짓기 대회에 낼 원고지를 펼쳤다.
제목을 적었다.
'우리 가족.'
그러나 다음 문장을 쓸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연필을 들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명옥이었다.
“도현아.”
“응.”
“뭐 해?”
“글 써.”
“무슨 글?”
“우리 가족.”
명옥은 잠시 멈칫했다.
“우리 가족?”
“응.”
명옥은 원고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나와?”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지.”
명옥은 놀란 얼굴이었다.
“정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도 가족이잖아.”
명옥은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웃었다.
“그래.”
그녀는 방문을 닫으려다 멈추었다.
“도현아.”
“응?”
“나도 네가 싫은 건 아니야.”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명옥은 시선을 피했다.
“그냥…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옥은 잠시 서 있다가 방을 나갔다.
도현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나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싫지 않은데도 차갑게 대할 수 있을까.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줄 수 있을까.
그는 원고지에 첫 문장을 적었다.
'우리 집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적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도현은 한참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며칠 뒤.
박노식은 충청도의 작은 읍내에 도착했다.
백춘식이 알려준 마지막 단서를 따라온 길이었다.
그는 오래된 버스터미널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시골 장터에는 봄나물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노식은 수첩을 펼쳤다.
한연화.
1970년 여름 이후 충청도 어느 마을로 내려갔다는 여자.
그녀가 머물렀다는 곳은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백춘식은 한 가지 이름을 더 알려주었다.
최분례.
한연화의 먼 친척이라는 여자였다.
노식은 장터에서 반찬을 파는 노파에게 물었다.
“혹시 최분례라는 분을 아십니까?”
노파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분례?”
“예.”
“어디 사는 사람인데?”
“이 근처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노파는 잠시 생각했다.
“아, 분례네?”
노식의 눈이 커졌다.
“아십니까?”
“알지. 그런데 그 집은 오래전에 이사 갔는데.”
노식은 숨을 골랐다.
“어디로 갔습니까?”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몰라. 남편 일 때문에 옮겼다고 했던가.”
노식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노파가 덧붙였다.
“그런데 그 집에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여자 하나가 있었어.”
노식이 고개를 들었다.
“젊은 여자요?”
“응. 말수가 적고 얼굴이 참 고왔지.”
노식의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노파는 잠시 생각했다.
“연화였던가…”
노식은 숨을 멈추었다.
“한연화요?”
노파는 손뼉을 쳤다.
“그래! 한연화!”
노식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여자가 어떻게 지냈습니까?”
노파는 한숨을 쉬었다.
“참 딱한 여자였지.”
“왜요?”
“밤마다 아이를 찾는 소리를 했거든.”
노식의 손이 떨렸다.
노파는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잃은 줄 알았어.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아이가 어디 살아 있다고 믿는 모양이더라고.”
노식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노파는 계속 말했다.
“새벽이면 마을 뒷산에 올라가곤 했어.”
“왜요?”
“몰라. 그냥 서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더라.”
노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연화는 아이가 살아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살았다.
노파는 노식을 살폈다.
“그 여자를 왜 찾으슈?”
노식은 잠시 망설였다.
“오래전 인연이 있습니다.”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노식은 다시 물었다.
“그 뒤에 어디로 갔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노파는 잠시 생각했다.
“분례네가 떠날 때 그 여자도 같이 갔는지는 모르겠어.”
노식은 수첩을 꺼냈다.
“혹시 다른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까?”
노파는 한참 생각했다.
그러다 말했다.
“아, 하나 있어.”
노식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입니까?”
“그 여자가 편지를 자주 썼어.”
노식의 눈이 커졌다.
“편지를요?”
“응. 그런데 부치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노파는 말했다.
“우체국에 가는 걸 본 적이 없거든. 늘 편지만 쓰고 서랍에 넣었다고 했어.”
노식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한연화가 남긴 편지는 한 통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어쩌면 매년 아이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아이가 몇 살이 되었는지 헤아리며.
어떤 얼굴로 자라고 있을지 상상하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이에게 말을 걸며.
노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편지들을 찾아야 한다고.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한 여자가 어머니로 살아온 시간이었다.
같은 날 저녁.
김씨 집안에서는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도현의 원고지가 사라진 것이었다.
도현은 바카라상 서랍을 뒤졌다.
바카라 사이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명숙이 방문 앞에 나타났다.
“뭘 그렇게 찾아?”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원고지요.”
“무슨 원고지?”
“글짓기 대회에 낼 거요.”
명숙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제목이 뭔데?”
“우리 가족이요.”
명숙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가족?”
“네.”
명숙은 비웃듯 웃었다.
“너는 우리 가족에 대해 뭘 안다고 글을 써?”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숙은 말을 이었다.
“가족이 뭔지도 모르면서.”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누나.”
“왜?”
“제 원고지 봤어요?”
명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의심하는 거야?”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명숙은 차갑게 말했다.
“네 물건은 네가 잘 챙겨.”
그녀는 돌아섰다.
도현은 한참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바카라상 서랍을 뒤졌다.
원고지는 없었다.
그날 밤 도현은 원고지를 새로 꺼냈다.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글이 전과 달라졌다.
처음에는 가족의 모습을 적으려 했다.
이번에는 가족의 마음을 적고 싶어졌다.
그는 천천히 썼다.
'우리 집에는 높은 담장이 있습니다.'
'담장 밖에서 보면 우리 집은 아주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담장 안에서는 서로 마음을 잘 모릅니다.'
도현은 연필을 멈추었다.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적었다.
'나는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조금 더 친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원고지를 접었다.
이번에는 바카라상 서랍에 넣지 않았다.
푸른색 공바카라 사이에 끼워두었다.
다음 날.
서윤은 학교에서 도현을 만났다.
도현의 표정이 어두웠다.
“오빠.”
“응.”
“무슨 일 있어?”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서윤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거짓말.”
도현은 웃지 않았다.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오늘 글 발표해서 칭찬받았어.”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응.”
“잘했네.”
서윤은 웃었다.
“오빠도 글 잘 쓰잖아.”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나도 글짓기 대회 나가.”
서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응.”
“무슨 글?”
“우리 가족.”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가족 이야기잖아.”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서윤아.”
“왜?”
“가족은 꼭 서로 좋아해야 해?”
서윤은 눈을 깜빡였다.
“당연하지.”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왜?”
서윤은 말했다.
“우리 집도 맨날 싸우거든.”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너희 집도?”
“응. 엄마랑 할머니도 가끔 싸우고, 나도 혼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은 웃었다.
“근데 싸우고 나면 다시 밥 먹잖아.”
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가족은 싸워도 다시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사람들 아닐까?”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시간이 늘 편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있을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면 식탁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서윤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오빠.”
“응.”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을래?”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응.”
“왜?”
서윤은 웃었다.
“그냥. 오늘 우리 집에 감자조림 했거든.”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괜찮을까?”
서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오빠 좋아하잖아.”
도현은 조금 웃었다.
서윤은 그의 팔을 잡았다.
“가자.”
두 아이는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그날 저녁 도현은 황씨 집안의 작은 밥상에 앉았다.
전옥분은 그에게 밥을 한 공기 더 퍼주었다.
“많이 먹어라.”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옥분은 웃었다.
“밥 먹는데 무슨 인사를 그렇게 하니.”
이정순은 감자조림을 도현의 밥그릇 가까이 놓아주었다.
“이거 좋아하니?”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윤은 옆에서 떠들었다.
“할머니, 도현 오빠 글짓기 대회 나간대!”
옥분은 놀라 바라보았다.
“그래?”
도현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네.”
옥분은 웃었다.
“잘됐구나. 무슨 글을 쓰니?”
“가족 이야기요.”
옥분은 잠시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가족 이야기는 참 어렵지.”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옥분은 웃었다.
“사람이 많을수록 마음도 많으니까.”
도현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그날 저녁 황씨 집안의 밥상은 시끄러웠다.
서윤은 학교 이야기를 했고, 정순은 시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옥분은 손녀에게 밥을 흘리지 말라고 잔소리했다.
그러다 모두 함께 웃었다.
도현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가족이라는 것이 꼭 같은 피를 나눈 사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며칠 뒤.
김씨 집안의 안채에서 윤정애는 도현의 원고지를 발견했다.
명숙의 바카라상 서랍 안이었다.
정애는 딸의 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그것을 보았다.
원고지 첫 장에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우리 가족.'
정애는 조심스럽게 펼쳤다.
도현의 글씨였다.
'우리 집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많이 하십니다.'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십니다.'
'누나들은 학교에 다니고 나는 공부를 합니다.'
정애는 다음 장을 넘겼다.
'우리 집에는 높은 담장이 있습니다.'
'담장 밖에서 보면 우리 집은 아주 좋아 보입니다.'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다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가끔 우리 집이 무섭습니다.'
정애는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음 줄을 읽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원고지를 내려놓았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명숙이었다.
“엄마?”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니?”
명숙은 원고지를 보았다.
얼굴이 굳어졌다.
“그걸 왜 봐요?”
정애는 조용히 물었다.
“네가 가져왔니?”
명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애는 다시 물었다.
“도현이 원고지를 네가 가져왔어?”
명숙은 고개를 돌렸다.
“그냥…”
정애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그랬니?”
명숙은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싫어서요.”
정애는 딸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렇게 싫었니?”
명숙은 울음을 터뜨렸다.
“도현이가 우리 가족 이야기까지 잘 쓰는 게 싫었어요!”
정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숙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공부도 잘하고, 아버지한테 사랑도 받고, 이제 글까지 잘 쓰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애는 딸을 끌어안았다.
명숙은 어머니 품에서 울었다.
정애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날 정애는 처음으로 딸에게 말했다.
“명숙아.”
“네…”
“네가 아무리 속상해도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안 돼.”
명숙은 고개를 들었다.
정애는 눈물을 닦았다.
“도현이가 잘못한 게 아니잖니.”
명숙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낯설었다.
어머니가 도현의 편을 드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정애는 원고지를 들어 올렸다.
“이건 도현이에게 돌려줘야 해.”
명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
정애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사과해야 한다.”
명숙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밤.
박노식은 충청도에서 돌아왔다.
그의 가방에는 작은 수첩이 들어 있었다.
최분례의 옛 주소.
한연화가 머물렀다는 마을.
그리고 그녀가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
노식은 사랑채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그는 한연화가 남긴 봉투를 꺼냈다.
아직 열지 않은 편지였다.
노식은 봉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알았다.
한연화는 아이를 잊지 않았다.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아이에게 편지를 쓰며 살았다.
노식은 봉투를 손에 쥐었다.
이 편지는 언젠가 도현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전해야 할까.
도현은 아직 열 살이었다.
집안의 비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렇다고 영원히 숨길 수도 없었다.
노식은 한참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먼저 한연화를 찾기로.
그녀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보기로.
그 후에야 도현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노식은 봉투를 다시 넣었다.
그때 사랑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도현이었다.
노식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도현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예. 정리할 것이 조금 있어서요.”
도현은 방 안을 바라보았다.
“뭐 정리하세요?”
노식은 잠시 망설였다.
“옛날 서류입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아저씨.”
“예.”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셨어요?”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냥요.”
노식은 미소 지었다.
“엄하셨지만 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잘해주셨어요.”
“그렇지요.”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거짓말도 하셨어요?”
노식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무엇을요?”
“어른도 잘못할 수 있다고요.”
노식은 한참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도 잘못한 일이 있었을까요?”
노식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김만석을 평생 모셨다.
그의 장점도 알고 있었고, 잘못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잘못 중 하나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아이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노식은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
“네.”
“세상에 잘못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도요?”
노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잘못하면 어떻게 해야 해요?”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인정해야지요.”
“그다음에는요?”
“바로잡아야 합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노식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조용히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도련님도 편히 주무십시오.”
도현은 돌아섰다.
노식은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날 그는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까.
김만석의 명령을 따랐던 일.
한연화의 흔적을 지우는 데 협조했던 일.
도현이 자신의 출생을 모르게 만든 일.
그 모든 것에 자신도 바카라임이 있었다.
노식은 봉투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는 바로잡아야겠지요.”
1980년 5월의 마지막 주.
김도현은 글짓기 대회에 원고를 제출했다.
제목은 '우리 가족'이었다.
그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서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잘못하면 사과하겠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강인호 선생님은 그 글을 오래 읽었다.
그리고 원고지를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는 도현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에 남는 것이 있었다.
아이가 가족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소박하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
잘못하면 사과하는 것.
함께 웃는 것.
어른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 어린아이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날 저녁.
윤정애는 도현의 작은방 앞에 섰다.
손에는 원고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명숙의 방에서 발견한 도현의 첫 번째 원고였다.
정애는 문을 두드렸다.
“도현아.”
“네, 어머니.”
“잠깐 들어가도 되겠니?”
“네.”
정애는 문을 열었다.
도현은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정애는 원고지를 내밀었다.
“이거.”
도현은 놀라 바라보았다.
“제 원고지예요.”
정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숙이 방에서 찾았어.”
도현은 원고지를 받아들었다.
정애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도현아.”
“네.”
“네가 쓴 글을 읽어봤어.”
도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죄송해요.”
정애는 놀라 바라보았다.
“왜 사과하니?”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냥…”
정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닌가 싶구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정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정작 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정애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네가 집이 무섭다고 썼더구나.”
도현의 눈이 커졌다.
그는 원고지를 꼭 쥐었다.
정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러니?”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애는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뒤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요.”
정애는 숨을 멈추었다.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요.”
그 말은 정애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그녀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도현은 울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정애는 천천히 아이 앞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도현아.”
도현은 움찔했다.
정애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아이가 자신의 손길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똑똑히 보았다.
정애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정애는 다시 말했다.
“네가 무서워하게 만든 건 내 잘못이야.”
도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애도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한참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정애도 아이를 억지로 끌어안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날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날 밤.
도현은 푸른색 공바카라을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적었다.
'오늘 어머니가 미안하다고 하셨다.'
잠시 멈추었다.
'처음이었다.'
도현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는 다음 문장을 쓰지 못했다.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공바카라을 덮었다.
그리고 창밖의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 아래 작은 새싹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도현은 생각했다.
사람도 나무처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까.
오늘 미안하다고 말한 어머니가 내일도 자신에게 친절할 수 있을까.
그는 아직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그것이 아홉 해 동안 외로움을 견뎌온 아이의 마음이었다.
같은 밤.
박노식은 사랑채에서 한연화의 편지를 다시 꺼냈다.
그는 봉투를 바라보았다.
열 해 동안 열리지 않은 편지.
그 안에는 어떤 말이 들어 있을까.
아이를 향한 사랑일까.
세상을 향한 원망일까.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겨놓은 마지막 인사일까.
노식은 봉투를 손끝으로 만졌다.
그러나 끝내 열지 않았다.
그 편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도현의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봉투를 다시 넣었다.
그리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
'한연화의 행적을 계속 찾을 것.'
그 아래에 또 한 줄을 적었다.
'아이에게 진실을 전할 때를 준비할 것.'
노식은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에서는 밤바람이 불었다.
감나무 잎들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그는 한참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밀은 오래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감춘 시간만큼 더 많은 사람의 삶을 흔들 수 있다고.
그날 밤 김씨 집안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잠들었다.
윤정애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사과한 일을 떠올렸다.
명숙은 어머니가 도현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지 알 수 없었다.
박노식은 한연화를 찾을 다음 길을 생각했다.
그리고 김도현은 작은방에서 푸른색 공바카라을 베개 옆에 놓고 잠들었다.
그 공바카라에는 아직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들이 쌓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태어난 순간에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침묵을 선택하며, 어떤 손길을 내미는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1980년 봄.
김씨 집안의 높은 담장 안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가 곧 용서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과 한마디가 지난 상처를 모두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여전히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한연화가 남긴 편지.
그 편지가 열리는 날, 김도현은 자신이 알고 있던 가족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은 다만 열 살 소년이 감나무 아래 작은 새싹에 물을 주며 내일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는 내일이 반드시 오늘보다 따뜻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진실은 밝혀지는 순간보다, 밝혀지기까지의 시간이 더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편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편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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