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6화.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사는 것
‘그 말이면 충분해.’
강태헌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윤해원은 침대에 누워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웠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태헌의 이마에 붙어 있던 거즈.
붕대가 감긴 팔.
그리고 차에서 내리기 전 자신을 바라보며 했던 말.
사랑해.
해원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사랑은 무슨.”
혼잣말을 했지만 가슴은 정직했다.
쿵.
쿵.
병원에서 태헌을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 더 크게 뛰었다.
좋아한다는 말에는 웃을 수 있었다.
보고 싶다는 말에는 장난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은 해원에게 너무 무거웠다.
살아온 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떠난 사람도 있었고,
사랑한다면서 상처를 준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알았다.
사랑이라는 말이 관계를 지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보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어디까지 온 걸까.”
좋아하는 건 분명했다.
보고 싶었다.
기다렸다.
연락이 없으면 궁금했다.
아프다는 말에 한밤중 병원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좋아하는 사람과 매일을 함께한다는 것.
그 사람의 좋은 모습뿐 아니라 피곤한 얼굴까지 보는 것.
생활 습관.
돈.
가족.
혼자 있고 싶은 시간.
서로의 과거.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 안으로 들어오는 것.
해원은 눈을 감았다.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태헌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두 번 가기도 전에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잤어?”
“응.”
“어디 아파?”
“아침부터 그것부터 물어?”
“어디 아프냐고.”
태헌이 웃었다.
“괜찮아.”
해원의 표정이 굳었다.
“강태헌.”
“왜?”
“우리 규칙.”
잠시 조용하더니 태헌이 말했다.
“아프면 말하기.”
“그렇지.”
“팔 조금 아파.”
“또?”
“목도 조금 뻐근하고.”
“또?”
“이마는 괜찮고.”
“진짜?”
“응.”
해원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병원 다시 가.”
“이 정도로 뭘.”
“가.”
“윤해원.”
“왜.”
“너 원래 이렇게 잔소리 많았어?”
“싫어?”
태헌이 바로 대답했다.
“좋아.”
해원은 할 말을 잃었다.
“너는 뭘 해도 좋다고 하냐.”
“네가 하는 건.”
“미쳤네.”
“조금.”
해원이 웃었다.
태헌이 물었다.
“어제 몇 시에 잤어?”
“몰라.”
“늦게 잤지?”
“응.”
“왜?”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아니.”
“맞네.”
“아니거든.”
“윤해원.”
“왜.”
“나 사랑한다고 해서 밤새 고민했어?”
해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 진짜!”
태헌이 웃었다.
“맞는구나.”
“그 말을 왜 갑자기 해.”
“갑자기는 아니지. 어제 했잖아.”
“그러니까.”
해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 말 쉽게 하지 마.”
태헌의 웃음이 멈췄다.
“쉽게 한 거 아닌데.”
“알아.”
“그런데?”
해원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말이 좀 무거워.”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이 계속 말했다.
“좋아한다는 건 지금 마음 같아.”
“응.”
“근데 사랑한다는 건.”
해원은 한참 적당한 말을 찾았다.
“내일도 포함된 말 같아.”
전화기 넘어가 조용했다.
“다음 달도.”
“응.”
“내년도.”
“응.”
“그래서 무서워.”
태헌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대답하라고 했어?”
“아니.”
“그럼 천천히 해.”
해원은 눈을 감았다.
또 그 말이었다.
천천히.
“난 내가 하고 싶어서 한 말이야.”
태헌이 말했다.
“네가 같은 말을 해줘야 완성되는 말 아니야.”
“안 서운해?”
“조금은.”
솔직한 대답이었다.
해원은 웃었다.
“서운하긴 하네.”
“당연하지.”
“그런데 왜 괜찮은 척해?”
“괜찮은 척 아니야.”
태헌이 잠시 숨을 골랐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대답받아내려고 사랑한다고 한 건 아니니까.”
그 말이 또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오후.
해원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전 태헌이 앉았던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둘이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던 자리.
손을 잡았던 자리.
키스했던 자리.
별것 아닌 소파가 갑자기 특별해진 게 우스웠다.
해원은 그곳에 앉았다.
문득 생각했다.
이 집에 태헌이 자주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칫솔 하나.
컵 하나.
슬리퍼 하나.
옷 몇 벌.
그렇게 한 사람의 물건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윤해원. 너무 멀리 갔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해원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인터폰을 확인했다.
강태헌이었다.
해원은 문을 열었다.
“너 병원 갔어?”
인사도 없이 물었다.
태헌이 웃었다.
“갔다 왔어.”
“의사가 뭐래?”
“괜찮대.”
“팔은?”
“며칠 아플 거래.”
“목은?”
“괜찮고.”
해원이 그의 팔을 살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어?”
“보고 싶어서.”
“환자가 돌아다녀?”
“나 환자 아니야.”
“어제 응급실 갔다 온 사람이 환자지.”
태헌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갈게.”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누가 들어오래?”
태헌의 발이 멈췄다.
“나갈까?”
해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들어와.”
“진짜 어렵다, 윤해원.”
“싫으면 가지.”
“싫다고 한 적 없어.”
태헌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를 마시던 중 태헌이 갑자기 말했다.
“해원아.”
“응.”
“너 혼자 있는 거 좋아하지?”
“응.”
“많이?”
해원은 잠시 생각했다.
“응.”
“왜?”
“편하니까.”
“나랑 있는 건?”
해원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것도 편해.”
태헌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짜?”
“요즘은.”
“처음에는?”
“귀찮았지.”
태헌이 헛웃음을 쳤다.
“너무 솔직한데.”
“솔직하라며.”
“그래도 조금 포장해 줘.”
해원이 웃었다.
태헌도 웃었다.
그런데 잠시 후 태헌이 진지하게 물었다.
“혼자 있는 게 좋은데 나랑 연애하는 건 안 불편해?”
해원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질문이었다.
어쩌면 자신도 계속 생각하던 것이었다.
“태헌아.”
“응.”
“나는 누가 내 생활 안으로 너무 많이 들어오는 게 싫어.”
태헌은 가만히 들었다.
“내가 뭘 하는지 다 알아야 하고.”
“응.”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응.”
“내 시간을 전부 같이 써야 하고.”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못 해.”
태헌이 물었다.
“나도 그래?”
“아직은 아니야.”
“다행이네.”
“근데 나중에는 모르지.”
“그러면 말해.”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뭘?”
“나 너무 들어왔다고.”
태헌이 웃었다.
“한 발 나갈게.”
해원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기분 안 나빠?”
“왜 나빠.”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잖아.”
“같이 있는 것하고 붙어 있는 건 다르지.”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헌이 말했다.
“나는 네 인생에 들어가고 싶은 거지, 네 인생을 차지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 말에 해원의 시선이 멈췄다.
태헌은 아무렇지 않게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해원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말이 아니었다.
한참 뒤 해원이 물었다.
“그럼 너는?”
“뭐가?”
“어떤 연애하고 싶은데?”
태헌은 잠시 생각했다.
“같이 여행 가고.”
“응.”
“맛있는 거 먹고.”
“응.”
“힘든 날 전화하고.”
“응.”
“가끔 싸우고.”
“싸우는 것도 넣어?”
“안 싸울 수는 없잖아.”
해원이 웃었다.
“그리고?”
“각자 할 일 하고.”
“응.”
“그러다 늙으면.”
태헌이 말을 멈췄다.
해원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늙으면?”
태헌이 웃었다.
“같이 여행 다니면 좋겠다.”
“카라반으로?”
“그것도 좋고.”
“맨날?”
“아니.”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네가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나도 혼자 있고.”
“그럼 같이 사는 게 아니잖아.”
말이 먼저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잠시 멈췄다.
해원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고.”
태헌이 웃었다.
“같이 사는 생각 했어?”
“안 했어.”
“방금 했잖아.”
“강태헌.”
“응.”
“맞을래?”
“팔 아파.”
해원은 결국 웃었다.
태헌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함께 산다’는 말이 지나갔다.
계획도 아니었다.
약속도 아니었다.
그저 농담처럼 스쳐간 말.
그런데 한번 나온 말은 마음 어딘가에 남았다.
저녁을 먹고 태헌이 돌아갈 시간이 됐다.
현관 앞.
태헌이 신발을 신었다.
해원이 물었다.
“내일 뭐 해?”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냥.”
“보고 싶어서?”
“아니.”
“그럼?”
“팔 괜찮은지 보려고.”
“그게 보고 싶은 거야.”
“아니라니까.”
태헌이 웃었다.
“내일은 약속 있어.”
해원이 잠시 멈췄다.
“무슨 약속?”
“사람 만나.”
“누구?”
태헌이 해원을 빤히 바라봤다.
“왜?”
“그냥.”
“남자.”
해원의 얼굴이 풀렸다.
그걸 본 태헌이 웃었다.
“지금 안심했지?”
“아니.”
“했는데.”
“가.”
태헌이 문을 열었다.
그러다 다시 돌아섰다.
“해원아.”
“왜.”
“이번 주말 비어?”
“왜?”
“바다 갈래?”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또?”
“응.”
“어디?”
“제주.”
해원의 표정이 멈췄다.
제주.
그곳은 두 사람에게 그냥 여행지가 아니었다.
몇 년 전 태헌의 마음이 시작된 곳.
검은 우산 하나를 함께 썼던 곳.
“그때 갔던 바다?”
“응.”
“비 안 오면?”
태헌이 웃었다.
“우산 하나 들고 기다리지 뭐.”
해원도 웃었다.
“미쳤어.”
“갈래?”
이번에는 ‘생각해 볼게’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태헌의 눈이 커졌다.
“진짜?”
“응.”
“생각 안 해봐도 돼?”
“응.”
“왜?”
해원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가고 싶으니까.”
태헌이 웃었다.
“나랑?”
해원은 잠깐 망설였다.
예전 같으면 바다 보러 간다고 했을 것이다.
제주가 좋아서 간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응.”
해원이 말했다.
“너랑.”
태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이 닫힌 뒤 해원은 현관에 기대어 섰다.
제주.
이번에는 달랐다.
우연히 같은 섬에 있던 두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도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서로를 보러 가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해원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여행이 끝나면 두 사람은 지금과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걸.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가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보는 것.
좋은 날뿐 아니라,
피곤한 날도.
예쁜 모습뿐 아니라,
흐트러진 모습도.
말이 많은 시간뿐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날 밤 태헌에게 메시지가 왔다.
‘비행기 예약했다.’
해원이 웃었다.
‘빠르네.’
‘마음 바뀔까 봐.’
‘취소할 수도 있어.’
‘안 돼.’
‘왜?’
잠시 후.
‘우산 하나 샀거든.’
해원은 웃음을 터뜨렸다.
‘큰 거?’
‘아니.’
‘왜?’
태헌의 답이 왔다.
‘큰 거 사면 멀리 걸어도 되잖아.’
해원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답했다.
‘바보.’
태헌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붙어 걸을 거지?’
해원은 이번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응.’
보내고 나서도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았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강태헌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이.
그리고 며칠 뒤.
윤해원과 강태헌은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둘에게는 첫 여행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여행에서 태헌이 자신에게 아주 현실적인 질문 하나를 꺼낼 것이라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질문보다 더 어려운 질문.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냐는 질문을.
26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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