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은 질투하지 않는다

“얘기 좀 하자니까.”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7화
남사친은 질투하지 않는다

“타.”

강태헌은 다시 한번 말했다.

윤해원은 차 문을 열지 않았다.

“왜?”

“얘기 좀 하자니까.”

“여기서 해.”

“길 한복판에서?”

“네가 갑자기 나타났잖아.”

태헌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해원은 창문 안쪽의 남자를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페 안에서 최준서와 광고 이야기를 하며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당신 같은 얼굴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고,

돈을 내는 게 아니라 돈을 받고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카페 문을 나오자마자 강태헌이 나타났다.

그것도 이런 얼굴로.

평소 같으면 능글맞게 웃으며 한마디 했을 인간이 지금은 웃지도 않았다.

“너 화났어?”

해원이 물었다.

“내가 왜.”

“얼굴이 그런데.”

“원래 이렇게 생겼어.”

“웃기고 있네.”

태헌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타. 데려다줄게.”

“나 지하철 타고 가면 돼.”

“윤해원.”

“왜.”

“오늘만 말 좀 들어.”

그 말이 이상했다.

해원은 잠시 태헌의 얼굴을 바라보다 결국 조수석 문을 열었다.

“오늘만이다.”

“알았어.”

“그리고 나한테 명령하지 마.”

“알았다니까.”

해원은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밖의 소음이 사라졌다.

좁은 차 안에 둘만 남았다.

갑자기 너무 조용했다.

태헌이 시동을 걸지 않았다.

해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긴데.”

태헌은 앞만 바라봤다.

“그 남자.”

해원은 웃음이 터졌다.

“또 그 남자야?”

“몇 살이야?”

“몰라.”

“모른다고?”

“처음 봤는데 나이를 왜 물어.”

태헌이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본 남자랑 한 시간 넘게 있었잖아.”

“미팅이니까.”

“일 얘기만 했어?”

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태헌.”

“왜.”

“너 지금 질투해?”

정적.

해원은 태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태헌은 창밖만 바라봤다.

해원이 웃었다.

“아까는 남사친은 질투 안 한다며.”

태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맞아.”

“그럼 지금 뭐 하는 건데?”

“확인.”

“뭘 확인해?”

“네가 이상한 놈한테 또 속는지.”

해원은 헛웃음을 쳤다.

“내가 애냐?”

“가끔 애보다 더해.”

“야.”

“어제도 광고라며 갔다가 2년 치 학원비 내라고 했다며.”

“그래서 안 했잖아.”

“그러니까.”

“뭐가 그러 니까야.”

해원은 팔짱을 꼈다.

“나 이번엔 확인 다 했어. 촬영 하루, 페이 있고, 등록비 없고, 교육비 없고. 계약 조건도 보내준댔어.”

태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계약서 오면 나한테 보내.”

“왜?”

“봐줄게.”

“네가 뭔데.”

그 한마디에 태헌의 얼굴이 멈췄다.

해원도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세게 말했나 싶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헌은 자신의 남편도 아니고,

남자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었다.

친구.

오래된 남자 사람 친구.

딱 그것뿐이었다.

태헌이 낮게 말했다.

“그러네.”

목소리가 달라졌다.

해원이 그를 바라봤다.

“삐쳤어?”

“내가 몇 살인데 삐치냐.”

“한 살 어린놈.”

그제야 태헌이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팽팽했던 공기가 풀렸다.

해원도 따라 웃었다.

“근데 진짜 왜 왔어?”

이번에는 태헌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근처였어.”

“거짓말.”

“뭐가.”

“너 여기 잘 안 오잖아.”

“오늘 왔어.”

“왜?”

태헌이 운전대를 잡았다.

“보고 싶어서.”

해원이 움직임을 멈췄다.

태헌이 곧바로 덧붙였다.

“네가 또 사고 칠까 봐.”

해원은 눈을 흘겼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해원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귀가 조금 뜨거워졌다.

보고 싶어서.

그 앞에 붙은 말보다

그 네 글자가 먼저 마음에 들어왔다.

태헌은 그런 해원을 힐끗 바라봤다.

“너 얼굴 빨개졌냐?”

“햇빛 때문이야.”

“지금 해 거의 졌는데.”

“차가 더워.”

“에어컨 켜줄까?”

“운전이나 해.”

태헌이 웃었다.

차가 천천히 도로로 들어갔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해원은 창밖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 이번 거 하고 싶어.”

“광고?”

“응.”

“해.”

“안 말려?”

“왜 말려.”

“아까 그 남자 못마땅해했잖아.”

태헌은 전방을 보며 말했다.

“일은 일이지.”

“그럼 사람은?”

“뭐.”

“최준서.”

이름을 듣는 순간 태헌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한 번 두드렸다.

해원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봐. 싫잖아.”

“내가 왜 그 인간을 좋아해야 돼?”

“처음 봤으면서.”

“너도 처음 봤잖아.”

“근데 괜찮아 보였어.”

태헌의 표정이 굳었다.

해원은 장난기가 생겼다.

“말도 조곤조곤하고.”

“그래.”

“나한테 자신감도 주고.”

“그래.”

“잘생기기도 했고.”

태헌이 갑자기 방향지시등을 켰다.

차가 갓길 쪽으로 빠졌다.

“왜 세워?”

태헌이 차를 세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너 일부러 그러지?”

해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뭘?”

“그 남자 얘기.”

“아닌데.”

“윤해원.”

“왜.”

“너 나 놀리는 재미 붙였냐?”

해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맨날 나 놀리잖아.”

태헌은 한동안 해원을 바라봤다.

웃지도 않았다.

그 눈빛이 생각보다 진지해서

해원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왜 그렇게 봐.”

태헌이 낮게 말했다.

“너는 참 편하다.”

“뭐가.”

“나한테.”

해원은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니까 편하지.”

“그래.”

짧은 대답.

그런데 태헌은 이상하게 씁쓸하게 웃었다.

해원이 물었다.

“뭐야.”

“아무것도.”

“또 아무것도.”

“가자.”

태헌이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원이 물었다.

“강태헌.”

“왜.”

“너는 나한테 여자 소개해달라고 하잖아.”

“응.”

“근데 내가 다른 남자 괜찮다고 하면 왜 기분 나빠해?”

태헌의 손이 멈췄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내가 기분 나쁘대?”

“얼굴에 쓰여 있어.”

“네 착각이야.”

“그럼 최준서랑 밥 한번 더 먹어도 돼?”

태헌이 바로 말했다.

“싫어.”

너무 빨랐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해원이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뭐?”

태헌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말했다.

“일 때문에 보는 건 상관없어.”

“방금 싫다며.”

“개인적으로 보는 건 싫다고.”

해원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왜?”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태헌.”

“운전 중이야.”

“세워.”

“싫어.”

“아까는 잘만 세우더니.”

태헌은 웃지도 않았다.

해원은 옆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혹시…”

말이 목에서 걸렸다.

태헌이 물었다.

“혹시 뭐.”

해원은 결국 말을 바꿨다.

“아니다.”

“말해.”

“싫어.”

이번에는 해원이 창밖으로 돌아섰다.

차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조금 전 대화가

평소의 장난과는 달랐다는 것을.

해원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태헌이 차를 세웠다.

해원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고마워.”

“응.”

문을 열렸는데 태헌이 불렀다.

“해원아.”

해원이 돌아봤다.

태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왜.”

태헌이 물었다.

“만약에.”

“뭐?”

“네가 진짜 혼자가 되면.”

해원의 표정이 굳었다.

태헌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다시 결혼할 생각 있어?”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질문은 처음이 아니었다.

너 아직 이혼 안 했어?

그때마다 농담처럼 넘겼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왜 자꾸 그걸 물어?”

태헌의 눈빛이 흔들렸다.

해원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물었다.

“내가 이혼하는 게 너한테 왜 중요해?”

정적.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은 조금 기다렸다.

“말 못 해?”

그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네가 아직 남의 여자니까.”

해원의 숨이 멎었다.

차 안이 너무 조용해졌다.

태헌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이상은 묻지 마.”

해원은 문을 열었다.

내려야 하는데

몸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남의 여자.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해원은 결국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문을 닫기 직전 말했다.

“강태헌.”

“응.”

“나 네 여자도 아닌데 왜 남의 여자야?”

태헌의 얼굴이 굳었다.

해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날 밤.

태헌은 집으로 돌아와 검은 수첩을 펼쳤다.

윤해원.

절대 시험하지 말 것.

내가 먼저 흔들리면 안 된다.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태헌은 두 번째 문장을 바라보다

펜으로 천천히 줄을 그었다.

이미 지킬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적었다.

기다린다.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같은 시간.

해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HS프로덕션이었다.

광고 촬영 최종 확정입니다.

그 아래 또 하나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리고 감독님께서
윤해원 씨를 다른 작품에도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해원의 눈이 커졌다.

곧이어 한 문장이 더 왔다.

상대역이 있는 촬영입니다.

해원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강태헌을 떠올렸다.

하필이면 그 순간,

태헌에게서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집 들어갔어?

해원은 몇 초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응.

그리고 일부러 하나를 더 보냈다.

나 다음 촬영 상대역 있대.

읽음 표시가 떴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1분.

3분.

5분.

해원은 웃음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십 분 뒤,

태헌에게서 딱 한 줄이 왔다.

남자야?

해원은 결국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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