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지 마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2화. 도망가지 말라는 사람
휴게소 주차장.
해원은 운전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헌에게서 온 마지막 메시지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도망가지 마.’
그리고 그 아래.
‘이번에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
‘내가 먼저 다 얘기할게.’
해원은 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술에 남아 있던 첫 입맞춤의 기억이 따뜻했다.
카라반 앞에서 마주 보던 태헌의 얼굴.
“키스해도 돼?”
끝까지 묻던 남자.
그런 남자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말했다.
예전에 만나던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고.
서울에 올라가야 할 것 같다고.
해원은 눈을 감았다.
질투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하나였다.
아프기 싫었다.
이제 겨우 마음 한쪽을 열었는데, 벌써부터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강태헌.
해원은 한참 바라보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왜.”
“어디야?”
“휴게소.”
“운전 안 하고 있지?”
“응.”
태헌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무슨 얘기하려고?”
“해원아.”
“응.”
“나 지금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거 아니야.”
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는 만나자고 했다며.”
“맞아.”
“그런데?”
“안 만나기로 했어.”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헌이 계속 말했다.
“전화받고 처음에는 가야 하나 싶었어. 오래전에 정리 못 한 얘기가 하나 있었거든.”
“무슨 얘기?”
“그 사람이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어.”
해원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어.”
“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헌이 조용히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해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누구?”
묻고 나서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태헌이 낮게 웃었다.
“진짜 몰라서 물어?”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해원.”
태헌이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너.”
그 한 글자가 해원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래도 쉽게 풀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오늘 알았겠지.”
“내 얘기했어?”
“이름은 안 했어.”
“왜?”
“그건 네 얘기니까.”
해원이 가만히 있었다.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는 말할 수 있어도, 네가 누군지는 내가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았어.”
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휴게소를 오갔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데 자신만 멈춰 있는 것 같았다.
“태헌아.”
“응.”
“그 사람 오래 만났어?”
잠깐의 침묵.
“응.”
“얼마나?”
“몇 년.”
해원은 눈을 감았다.
“좋아했겠네.”
“좋아했지.”
그 대답이 아팠다.
차라리 아니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태헌은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많이?”
“그때는.”
해원이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솔직하네.”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지금도 마음 있으면?”
“없어.”
“어떻게 확신해?”
태헌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말했다.
“그 사람 전화받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
“뭔데.”
“네가 알면 어떡하지.”
해원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왜?”
“네가 또 문 닫을까 봐.”
태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침에 겨우 조금 열어줬는데.”
해원은 가슴이 아팠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어렵게 마음을 열었는지.
“그래도 만나.”
해원이 말했다.
“누구를?”
“그 사람.”
“싫어.”
“왜?”
“만날 이유가 없어.”
“정리할 게 있다며.”
“전화로 정리했어.”
“그래도 오래 만난 사람이잖아.”
“그래서 더 만나면 안 돼.”
해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태헌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예의가 아니니까.”
해원의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나 아직 네 여자 아니야.”
태헌은 곧바로 대답했다.
“알아.”
“그런데?”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여자잖아.”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꼭 그렇게 말하더라.”
“어떻게?”
“사람 할 말 없게.”
태헌이 작게 웃었다.
“그럼 이제 도망 안 갈 거야?”
“누가 도망간대.”
“전화 세 번 안 받았잖아.”
“생각 좀 하느라고.”
“혼자?”
“그럼 누구랑 해.”
“나랑 해.”
해원이 멈칫했다.
“뭘?”
“생각.”
태헌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 사이에서 뭔가 생기면 혼자 결론 내리지 말자.”
우리 사이.
그 말이 또 나왔다.
해원은 조용히 들었다.
“화나면 화났다고 하고.”
“응.”
“질투하면 질투한다고 하고.”
“내가 언제 질투했어?”
태헌이 웃었다.
“지금.”
“아니거든.”
“그럼 왜 옛날 여자 얼마나 만났는지 물어봐?”
“궁금해서.”
“그게 질투야.”
“강태헌.”
“응.”
“전화 끊는다.”
“알았어. 미안.”
말은 미안하다면서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해원도 결국 웃었다.
조금 전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던 마음이 이상하게 풀렸다.
“해원아.”
“응.”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아까.”
태헌이 말을 멈췄다.
“뭐?”
“키스.”
해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해?”
“난 중요한데.”
“뭐가.”
“후회해?”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헌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 뒤 해원이 말했다.
“안 해.”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뭐라고?”
“두 번 말 안 해.”
“한 번만 더.”
“싫어.”
태헌이 웃었다.
“나 지금 기분 되게 좋다.”
“왜?”
“오늘 아침부터 계속 좋았는데 잠깐 지옥 갔다 왔거든.”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버한다.”
“진짜야.”
“운전이나 잘해.”
“너도.”
“응.”
“그리고.”
“또 뭐.”
“집 도착하면 전화해.”
“알았어.”
“진짜.”
“알았다니까.”
“윤해원.”
“왜.”
태헌이 잠시 침묵했다.
“고마워.”
해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뭐가.”
“전화받아줘서.”
그 말에 해원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그런 말이 더 마음에 남았다.
전화받아줘서 고맙다.
도망가지 않아 줘서 고맙다.
자신의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해원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고속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한 시간쯤 지나 서울이 가까워질 무렵 태헌에게 메시지가 왔다.
‘도착했어?’
신호에 멈춘 해원이 답했다.
‘아직.’
‘난 도착.’
‘집?’
‘응.’
잠시 뒤 또 메시지가 왔다.
‘근데 이상하다.’
‘뭐가?’
‘아침까지 같이 있었는데 벌써 보고 싶어.’
해원은 웃었다.
‘병이네.’
‘큰 병.’
‘병원 가.’
‘의사가 윤해원인데.’
‘돌팔이야.’
‘그래도 갈래.’
해원은 혼자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용기를 냈다.
‘나도.’
보내고 나서 심장이 뛰었다.
메시지를 취소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태헌에게서 답이 없었다.
10초.
20초.
30초.
해원이 괜히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그러다 전화가 왔다.
“왜!”
받자마자 해원이 소리쳤다.
태헌이 웃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몰라.”
“나도 뭐?”
“운전 중이야.”
“신호 대기잖아.”
“어떻게 알아?”
“방금 메시지 보냈으니까.”
해원이 웃었다.
“끊어.”
“해원아.”
“왜.”
“나도 보고 싶어.”
이번에는 해원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였다.
집에 도착한 해원은 현관문을 열었다.
익숙한 집이었다.
늘 돌아오던 공간.
그런데 이상하게 어제와 달라 보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거울 앞을 지나가다 멈췄다.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표정이 달랐다.
해원은 거울 속 자신에게 물었다.
“좋아해?”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태헌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해원은 받지 않았다.
곧 메시지가 왔다.
‘왜 안 받아?’
‘씻지도 않았어.’
‘그래서?’
‘못생겼어.’
‘내가 판단할게.’
‘싫어.’
다시 영상통화.
해원은 한참 고민하다 받았다.
화면에 태헌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
태헌이 말했다.
“뭐.”
“예쁜데?”
“끊는다.”
“잠깐!”
태헌이 웃었다.
해원도 웃었다.
둘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다.
오늘 먹은 것.
길이 막혔던 것.
카라반 정리한 것.
제주 날씨.
다음 여행.
그러다 어느 순간 말이 끊겼다.
화면 속에서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
태헌이 먼저 말했다.
“해원아.”
“응.”
“우리 이제 뭐야?”
해원의 웃음이 멈췄다.
“뭐긴 뭐야.”
“친구?”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끼리 키스해?”
“실수였나 보지.”
태헌의 표정이 굳었다.
“윤해원.”
해원은 그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농담이야.”
“그런 농담하지 마.”
“왜?”
“진짜 놀랐잖아.”
그 순간 해원은 알았다.
강태헌도 자신만큼 불안하다는 것을.
좋아한다고 먼저 말한 사람이 더 강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마음을 내놓은 만큼 더 두려울 수도 있었다.
해원이 화면 속 태헌을 바라봤다.
“태헌아.”
“응.”
“우리 그냥.”
잠시 숨을 골랐다.
“좋아해 보자.”
태헌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
“좋아해 보자고.”
“그게 무슨 뜻이야?”
해원이 웃었다.
“나도 몰라.”
“윤해원.”
“싫으면 말고.”
“잠깐만.”
태헌이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거 우리 만나자는 말이야?”
해원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응.”
태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해원이 웃었다.
“왜 그래?”
“잠깐.”
“뭐 하는데?”
“좋아서.”
그 말에 해원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잠시 후 태헌이 손을 내렸다.
“그럼 오늘부터?”
“뭐가?”
“1일.”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한 살 어린 티 낸다.”
“한 살 어려도 남자친구는 남자친구야.”
“누가 남자친구래?”
“방금 네가.”
“좋아해 보자고 했지.”
“그게 그거지.”
“아닌데.”
“맞아.”
“강태헌.”
“응.”
“너 너무 좋아하지 마.”
태헌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건 좀 늦은 것 같은데.”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헌이 웃었다.
“잘 자. 윤해원.”
해원도 웃었다.
“너도 잘 자.”
통화가 끝났다.
어두워진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해원은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친구라…….”
어색했다.
조금 우스웠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쉰을 넘어서도 누군가와 ‘오늘부터 1일’을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에는 적당한 나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젊은 날에는 사랑부터 시작하고 인생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각자의 인생을 품은 채 사랑할 자리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윤해원과 강태헌.
두 사람은 그렇게 친구라는 이름을 내려놓았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22화 끝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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