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시작하고 달라진 것

“오늘부터 1일.”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3화. 연애를 시작하고 달라진 것

“오늘부터 1일.”

영상통화가 끝난 뒤에도 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

윤해원은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창문을 열었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이상했다.

스무 살도 아니고.

서른도 아니고.

이 나이에 ‘1일’이라니.

해원은 혼자 피식 웃었다.

“유치하게.”

그런데 입꼬리는 자꾸 올라갔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태헌이었다.

‘안 자?’

해원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영상통화를 했으면서 또 연락이었다.

‘왜?’

‘여자친구한테 잘 자라고 못 했어.’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여자친구.

아까 남자친구라는 말보다 더 이상했다.

‘누가 여자친구야?’

답은 바로 왔다.

‘윤해원.’

‘착각하지 마.’

‘오늘부터 1일이라며.’

‘네가 그랬지.’

‘네가 응 했잖아.’

해원은 웃었다.

‘취소.’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왜.”

“취소가 어디 있어.”

“내 마음이지.”

“연애가 무슨 인터넷 쇼핑이야? 주문 취소하게.”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싫으면 반품해.”

“싫어.”

“왜?”

“이미 뜯었어.”

해원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야!”

태헌이 웃었다.

“뭘 생각한 거야?”

“너 지금 일부러 그러지?”

“난 포장 뜯었다는 뜻인데.”

“강태헌.”

“네.”

“끊는다.”

“잠깐.”

웃음기가 조금 사라진 목소리였다.

“해원아.”

“응.”

“잘 자.”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따뜻했다.

“너도.”

“꿈에서 봐.”

“싫어.”

“나는 볼 건데.”

“마음대로 해.”

“응. 내 여자친구니까.”

해원은 정말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한참 동안 웃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해원은 시계를 확인했다.

7시 12분.

“뭐야.”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어젯밤까지 여자친구라고 난리를 치던 사람이 아침 인사 하나 없었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바쁜가 보지.”

세수를 했다.

다시 확인했다.

없었다.

옷을 입었다.

또 확인했다.

없었다.

“내가 왜 이걸 보고 있어.”

스스로가 한심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겨우 하루.

정확히는 몇 시간.

그런데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8시가 조금 넘어 메시지가 왔다.

‘일어났어?’

해원은 바로 봤지만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

1분.

2분.

다시 메시지가 왔다.

‘잔다고?’

해원은 그제야 답했다.

‘일어났어.’

‘근데 왜 답이 늦어?’

‘바빴어.’

‘뭐 하느라?’

해원은 잠시 고민하다 썼다.

‘너 기다리느라.’

보내고 나서 눈이 커졌다.

“미쳤어.”

취소하려는 순간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이미 봤다.

태헌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원은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

또 받지 않았다.

메시지가 왔다.

‘방금 그거 다시 말해봐.’

‘싫어.’

‘나 아침부터 심장 안 좋아.’

‘병원 가.’

‘의사가 윤해원이라니까.’

해원은 결국 웃었다.

이 남자와 연애하면 자꾸 웃게 될 것 같았다.

점심 무렵 태헌에게 사진 한 장이 왔다.

커피 두 잔이었다.

‘뭐야?’

‘커피.’

‘두 잔인데?’

‘응.’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예전에 만나던 사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연락.

머리로는 정리됐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누구랑 있어?’

보내고 나니 자존심이 상했다.

태헌은 바로 답했다.

‘질투?’

‘아니.’

‘맞는데.’

‘누구냐고.’

사진이 한 장 더 왔다.

커피 맞은편에는 노트북과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메시지.

‘거래처 사람이랑.’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곧이어 메시지가 왔다.

‘근데 좋다.’

‘뭐가?’

‘네가 나 누구랑 있는지 궁금해하는 거.’

‘안 궁금해.’

‘방금 물어봤잖아.’

‘그냥.’

‘윤해원.’

‘왜.’

‘질투하면 질투한다고 하기로 했잖아.’

어젯밤 통화가 떠올랐다.

혼자 결론 내리지 말자.

화나면 화났다고 하고.

질투하면 질투한다고 하고.

해원은 한참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솔직하게 썼다.

‘조금.’

태헌의 답이 없었다.

10초.

20초.

30초.

해원이 괜히 불안해졌다.

‘왜 말 없어?’

그제야 답이 왔다.

‘좋아서.’

해원이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요즘 좋다는 말을 참 자주 했다.

오후에 태헌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몇 시에 끝나?”

“왜?”

“보고 싶어서.”

“어제 봤잖아.”

“어제는 어제고.”

“나 피곤해.”

태헌이 잠깐 조용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해원은 바로 말을 바꿨을 것이다.

아니, 괜찮아.

볼 수 있어.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진짜 좀 피곤해.”

태헌이 말했다.

“그럼 쉬어.”

해원은 이상하게 서운했다.

“응.”

“집 가서 밥 먹고 일찍 자.”

“알았어.”

“전화할게.”

“응.”

전화를 끊었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피곤하다고 한 건 자신이었다.

쉬라고 한 건 당연했다.

그런데 왜 서운하지?

“보러 온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말하고 나서 스스로 웃겼다.

오면 피곤하다고 할 것이고,

안 오면 서운했다.

연애라는 게 원래 이렇게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가.

저녁.

해원은 집에 들어와 간단히 밥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태헌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8시.

9시.

해원은 참다못해 메시지를 보냈다.

‘뭐 해?’

답이 없었다.

5분.

10분.

“됐어.”

휴대전화를 엎어놓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해원은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에 누가 오지?

현관으로 가 인터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강태헌이었다.

해원은 문을 열었다.

“너 뭐야?”

태헌이 한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밥 먹었어?”

“먹었지.”

“거짓말.”

“먹었다니까.”

“뭐 먹었는데?”

해원이 잠시 생각했다.

“그냥.”

태헌이 웃었다.

“그냥이라는 음식도 있어?”

“왜 왔어?”

“피곤하다며.”

“그러니까 왜 왔냐고.”

태헌이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먹을 거 주러.”

“전화하지.”

“전화하면 오지 말라고 할 거잖아.”

맞았다.

해원은 말문이 막혔다.

“주고 갈게.”

태헌이 봉투를 건넸다.

해원이 받지 않았다.

“진짜 가게?”

“피곤하다며.”

“응.”

“그럼 쉬어야지.”

태헌은 정말 돌아서려 했다.

해원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잡았다.

태헌이 멈췄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해원이 먼저 손을 놓았다.

“커피라도 마시고 가.”

태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피곤하다며.”

“커피 한 잔 마시는 건 괜찮아.”

“나 들어가도 돼?”

그 말에 해원은 잠깐 멈칫했다.

친구였을 때와 달랐다.

어제부터 이 남자는 남자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미 두 번 입을 맞췄다.

집 안이라는 공간이 갑자기 다르게 느껴졌다.

태헌은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해원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

태헌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태헌은 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왜 봐?”

“궁금했어.”

“뭐가.”

“윤해원이 사는 곳.”

“별거 없어.”

“너답네.”

“그게 무슨 뜻이야?”

“필요한 건 다 있는데 쓸데없는 건 없어.”

해원이 웃었다.

“사람도 그래.”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쓸데없는 사람은 안 둔다고?”

“응.”

“그럼 나는?”

해원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글쎄.”

태헌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심사 중이야?”

“응.”

“언제 끝나는데?”

“평생 안 끝날 수도 있어.”

태헌이 웃었다.

“그럼 평생 옆에 있어야겠네.”

해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

평생.

그 단어는 아직 무거웠다.

태헌도 해원의 표정을 읽은 듯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작은 움직임이 해원은 좋았다.

자신이 부담스러워하는 순간을 알아채는 사람.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커피를 마셨다.

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무슨 프로그램인지 모를 예능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편했다.

한참 뒤 태헌이 말했다.

“해원아.”

“응.”

“손 줘.”

“왜?”

“그냥.”

해원이 손을 내밀었다.

태헌이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해원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손 하나 잡는 데 허락을 묻던 사이였다.

오늘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있었다.

이것이 연애인가 싶었다.

거창한 사건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이 내 일상 안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왜.”

“보고 있었어.”

“뭘.”

“너.”

“보지 마.”

“왜?”

“부담스러워.”

“그럼 눈 감을까?”

“그래.”

태헌이 정말 눈을 감았다.

해원이 웃었다.

“바보.”

태헌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태헌의 시선이 해원의 입술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눈으로 올라왔다.

“해원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해원은 알았다.

무엇을 묻으려는지.

“또 물어보려고?”

태헌이 웃었다.

“응.”

“매번?”

“네가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해원이 한참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안 물어봐도 돼.”

태헌의 표정이 멈췄다.

“진짜?”

해원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태헌이 천천히 다가왔다.

입술이 닿았다.

첫 키스보다 조금 길었다.

두 번째보다 조금 더 편안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태헌의 손은 여전히 해원의 손을 잡고 있었다.

키스가 끝난 뒤에도 둘은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태헌이 이마를 해원의 이마에 살짝 댔다.

“큰일 났네.”

“왜?”

“집에 가기 싫어.”

해원이 웃었다.

“가.”

“역시.”

“뭐가.”

“윤해원답다.”

“내일 할 일 있잖아.”

“있지.”

“그럼 가.”

태헌이 일어났다.

현관까지 걸어갔다.

신발을 신었다.

해원은 문 옆에 서 있었다.

태헌이 문을 열려다 돌아봤다.

“해원아.”

“응.”

“연애하니까 뭐가 제일 달라?”

해원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기다리는 거.”

“뭘?”

“연락.”

태헌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해원은 괜히 덧붙였다.

“조금.”

“나는 많이.”

“뭐가?”

“네 연락 기다리는 거.”

해원이 웃었다.

태헌이 문을 열었다.

“갈게.”

“응.”

“잘 자.”

“너도.”

문이 닫히기 직전 해원이 불렀다.

“태헌아.”

태헌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왜?”

해원이 잠시 망설였다.

“내일도 연락해.”

태헌이 웃었다.

아주 환하게.

“매일 할 건데.”

문이 닫혔다.

해원은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

연애를 시작했다고 세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일도 일해야 했다.

돈도 벌어야 했다.

해결해야 할 일도 여전히 많았다.

피곤한 날도 올 것이다.

서운한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는 달라졌다.

하루가 끝날 때,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해원은 거실 불을 끄려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태헌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벌써 보고 싶어.’

해원이 웃으며 답했다.

‘방금 갔잖아.’

곧 답이 왔다.

‘그러니까 큰일이라고.’

해원은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천천히 적었다.

‘나도 조금.’

이번에는 보내고도 취소하지 않았다.

잠시 후 태헌에게서 답이 왔다.

‘그 조금이 자꾸 커졌으면 좋겠다.’

해원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미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것을.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피곤하다는 말을 숨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내일도 연락하라고 말하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하루하루 쌓여,

어느 순간 한 사람을 자신의 일상 안에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윤해원은 침실로 들어가다 다시 휴대전화를 보았다.

강태헌.

그 이름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친구의 이름도,

한 살 어린 남자의 이름도 아니었다.

해원이 기다리기 시작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2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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