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커피잔을 감싸 쥐었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1화. 우리가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좋아서.”

태헌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침 햇살이 바다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해원은 두 손으로 따뜻한 커피잔을 감싸 쥐었다.

지난밤과는 전혀 다른 바다였다.

어둠 속에서는 파도 소리만 들렸는데, 아침이 되자 수평선도 보이고 멀리 작은 배들도 보였다.

그런데 해원의 눈에는 이상하게 바다보다 태헌이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듯한 눈.

커피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

평범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특별한 순간에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근사한 식당에서 고백을 받거나,

꽃을 받거나,

가슴이 터질 듯한 입맞춤을 하거나.

그런데 지금 해원을 흔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침 일곱 시.

누군가 자신을 깨워주고,

커피를 건네고,

“잘 잤어?” 하고 묻는 것.

해원은 그 평범함이 무서웠다.

너무 오래 갖지 못했던 것이어서.

“왜 그렇게 봐?”

태헌이 물었다.

“내가 뭘.”

“계속 보잖아.”

“착각하지 마.”

“그럼 내가 볼까?”

태헌이 해원을 빤히 바라봤다.

해원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아침부터 왜 그래.”

태헌이 웃었다.

“윤해원.”

“왜.”

“얼굴 빨개졌어.”

“햇빛 때문에 그래.”

“아직 햇빛도 제대로 안 떴는데.”

“커피 마셔.”

“마시고 있잖아.”

둘은 또 웃었다.

해원은 이런 시간이 좋았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채워지는 시간.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했다.

해원의 짐이라고 해봐야 작은 가방 하나뿐이었다.

태헌이 그것을 들었다.

“이게 다야?”

“응.”

“진짜네.”

“뭐가?”

“여행 갈 때 핸드백 하나면 된다는 거.”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속옷은?”

해원이 태헌의 등을 세게 때렸다.

“야!”

태헌이 웃으며 도망갔다.

“아파!”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해.”

“궁금하잖아.”

“뭐가 궁금해!”

“진짜 아무것도 안 가지고 다니나.”

“바보야. 필요한 건 챙겼겠지.”

태헌이 웃었다.

“역시 챙겼네.”

“강태헌!”

카라반 앞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해원은 화난 척했지만 자신도 웃고 있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이상하게 자주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출발할 시간이 됐다.

해원은 자신의 차 앞에 섰다.

태헌도 따라왔다.

“조심해서 가.”

“응.”

“졸리면 꼭 쉬고.”

“알았어.”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잔소리하냐?”

“걱정하는 거야.”

그 말에 해원이 잠깐 멈췄다.

걱정.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말을 들은 게 언제였을까.

사람들은 해원이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알아서 하겠지.

황해원은 아니,

윤해원은 강하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잘 해결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해원 자신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태헌은 자꾸 말했다.

힘들면 말해.

피곤하면 쉬어.

졸리면 운전하지 마.

추우면 말해.

별것 아닌 말들.

그런 말들이 자꾸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태헌아.”

“응.”

“너는 언제 가?”

“좀 있다가.”

“카라반 정리해야 해?”

“응.”

“혼자?”

“그럼 누구랑 해.”

해원은 주변을 둘러봤다.

“도와줄까?”

태헌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네가?”

“왜.”

“집에 간다며.”

“조금 늦게 가면 되지.”

태헌이 웃었다.

“됐어.”

“왜?”

“너 피곤해.”

“안 피곤해.”

태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원이 바로 정정했다.

“조금 피곤해.”

태헌이 웃었다.

“잘했어.”

또 그 말이었다.

잘했어.

해원도 웃었다.

“나 이제 힘들다고 잘 말하지?”

“많이 발전했네.”

“그러니까 상 줘.”

말하고 나서 해원이 멈췄다.

태헌도 멈췄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태헌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무슨 상?”

“아니야.”

해원이 얼른 차 문을 열었다.

태헌이 문을 잡았다.

“왜 도망가.”

“안 도망가.”

“상 달라며.”

“취소.”

“취소 안 돼.”

“놔.”

“싫은데.”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해원은 태헌을 올려다봤다.

어제보다 더 가까웠다.

태헌은 웃지 않았다.

해원도 웃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피하지 않았다.

태헌이 아주 낮게 물었다.

“해원아.”

“응.”

“키스해도 돼?”

그 말이 너무 정직해서 해원은 오히려 웃음이 날 뻔했다.

이 남자는 끝까지 묻는다.

손을 잡아도 되는지.

가까이 가도 되는지.

그리고 이제는 입을 맞춰도 되는지.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태헌을 바라봤다.

태헌도 기다렸다.

몇 초가 길었다.

해원이 아주 작게 말했다.

“그것까지 꼭 물어봐야 해?”

태헌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응.”

“왜?”

“싫으면 안 할 거니까.”

그 순간 해원의 마음 한쪽이 풀렸다.

해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게 대답이었다.

태헌의 손이 먼저 해원의 볼에 닿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이 닿았다.

짧았다.

놀랄 만큼 짧았다.

태헌은 바로 물러났다.

해원이 눈을 떴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해원이 먼저 물었다.

“끝이야?”

태헌의 눈이 커졌다.

“뭐?”

해원은 말해놓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니…….”

태헌이 웃기 시작했다.

“윤해원.”

“왜.”

“너 진짜 사람 미치게 한다.”

“내가 뭘.”

“끝이냐며.”

“그런 뜻 아니었어.”

“그럼 무슨 뜻인데?”

해원이 태헌의 가슴을 밀었다.

“비켜.”

태헌이 해원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이번에는 해원이 피하지 않았다.

태헌이 다시 물었다.

“한 번 더?”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태헌이 조금 천천히 다가왔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길었다.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듯 조심스러웠다.

해원은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면서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

오래 잊고 살았던 자신의 일부를 다시 만난 것 같았다.

태헌이 먼저 떨어졌다.

해원의 눈을 바라봤다.

“괜찮아?”

해원이 웃었다.

“너는 그것도 물어?”

“응.”

“바보.”

“괜찮냐고.”

해원은 잠시 태헌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태헌이 안도한 듯 웃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해원은 알았다.

이 남자도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만 떨린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좋았다.

“나 갈게.”

해원이 말했다.

“응.”

“이번엔 안 잡아?”

“잡으면 안 갈 거야?”

“아니.”

“그럼 가.”

해원이 눈을 흘겼다.

“진짜 정 없다.”

태헌이 웃었다.

“또 왜.”

“됐어.”

해원이 차에 탔다.

태헌이 문을 닫아주었다.

창문을 내리자 태헌이 말했다.

“도착하면 연락해.”

“응.”

“진짜로.”

“알았어.”

해원은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로 보니 태헌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해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 시간쯤 달렸을까.

신호에 멈춰 서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해원은 블루투스로 전화를 받았다.

“왜?”

태헌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해원아.”

조금 전까지의 장난기가 없었다.

해원은 바로 알아챘다.

“왜 그래?”

“운전 중이지?”

“응.”

“일단 운전해.”

“뭔데.”

태헌이 잠시 말이 없었다.

“태헌아.”

“응.”

“무슨 일 있어?”

전화기 너머에서 태헌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 서울 올라가야 할 것 같아.”

“갑자기?”

“응.”

“무슨 일인데?”

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누가 아파?”

“아니.”

“그럼?”

한참 뒤 태헌이 말했다.

“연락이 왔어.”

“누구한테?”

다시 침묵.

해원은 괜히 불안해졌다.

“태헌아.”

“응.”

“누구냐고.”

태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예전에 만나던 사람.”

해원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꽉 잡았다.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왜?”

해원이 물었다.

자신도 놀랄 만큼 목소리가 차분했다.

“왜 연락했는데?”

“아직 몰라.”

“그런데 서울까지 올라가?”

“만나자고 해.”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과 한 시간 전.

자신은 태헌과 처음 입을 맞췄다.

그런데 지금,

예전에 만나던 여자가 그를 찾고 있었다.

“가.”

해원이 말했다.

태헌이 잠시 말이 없었다.

“해원아.”

“가서 만나.”

“너 괜찮아?”

그 말이 싫었다.

괜찮냐고 묻는 것이.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예전의 습관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괜찮지.”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태헌이 말했다.

“또 그 말한다.”

해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무슨 말.”

“괜찮다는 말.”

“진짜 괜찮아.”

“윤해원.”

“운전 중이야.”

“해원아.”

“나중에 얘기해.”

해원은 전화를 끊었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해원은 앞만 바라봤다.

아무 일도 아니다.

예전에 만나던 사람일 뿐이다.

누구나 과거는 있다.

자신도 있다.

태헌에게 과거의 여자가 있었다고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가슴이 이렇게 답답할까.

조금 전 그의 입술이 아직 기억나는데.

손의 온기도 남아 있는데.

해원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쓴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하자고 했잖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

태헌에게 인지.

자기 자신에게 인지.

휴게소가 보였다.

해원은 차를 세웠다.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또 받지 않았다.

세 번째.

해원은 화면을 바라봤다.

강태헌.

조금 전까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르는 것이 무서웠다.

잠시 후 전화가 끊겼다.

메시지가 왔다.

‘도망가지 마.’

해원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가 왔다.

‘이번에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야.’

해원은 화면을 바라봤다.

답하지 않았다.

태헌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가 먼저 다 얘기할게.’

해원은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까지만 해도 사랑은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았다.

사랑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자리까지 함께 내어주게 된다는 것.

해원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강태헌…….”

처음으로 그의 이름이 아프게 느껴졌다.

2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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