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가지 마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20화. 오늘 밤은 가지 마

카라반 문을 닫은 뒤에도 해원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태헌이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공간이 달라진 것 같았다.

작은 침대와 테이블.

창문에 걸린 얇은 커튼.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컵 두 개.

밖에서는 파도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해원은 침대 끝에 앉았다.

아까 태헌이 잡았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한번 잡은 게 뭐라고.

스무 살도 아니고.

누군가와 손을 잡는 일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한지.

해원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혼잣말했다.

“윤해원, 정신 차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은 밤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불편한 거 없어?’

해원은 웃었다.

문 하나 열면 되는 거리를 굳이 메시지로 묻는다.

‘없어.’

곧 답이 왔다.

‘추우면 말해.’

‘안 추워.’

잠시 뒤.

‘또 안 춥대.’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안 춥거든.’

‘황…….’

입력 중이던 메시지가 사라졌다.

다시 왔다.

‘윤해원 씨는 평생 안 춥고 안 힘들고 안 아프지?’

해원은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몇 년 전 제주에서 했던 말과 똑같았다.

‘오늘은 좀 피곤해.’

보내놓고 자신도 놀랐다.

태헌의 답은 한동안 오지 않았다.

그러다 딱 한 줄이 도착했다.

‘잘했어.’

해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뭘?’

‘힘들다고 말한 거.’

해원은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이상한 남자였다.

예쁘다고 했을 때보다,

좋아한다고 했을 때보다,

그 한마디가 더 따뜻했다.

잘했어.

힘들다고 말한 거.

해원은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파도 소리는 계속 들렸다.

해원은 몸을 뒤척이다 결국 일어났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카라반 앞 작은 조명 아래 태헌이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휴대전화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해원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놓고,

정작 가까이 오지는 않는 사람.

해원이 들어간 뒤에도 차로 가지 않고 저렇게 앉아 있는 사람.

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태헌이 돌아봤다.

“왜 나왔어?”

“잠 안 와.”

“추운데.”

“안 추워.”

태헌이 웃었다.

“그 말 금지.”

해원이 그의 옆 의자에 앉았다.

“너는 왜 안 자?”

“나도 잠 안 와.”

“왜?”

태헌이 해원을 한번 바라봤다가 다시 바다를 봤다.

“누구 때문에.”

“누구?”

“모르는 척하지 마.”

해원이 웃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게.”

태헌도 웃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사람을 잠 못 자게 하네.”

해원은 괜히 바다를 바라봤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 냄새가 났다.

멀리 어선의 불빛 몇 개가 보였다.

해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헌아.”

“응.”

“넌 안 무서워?”

“뭐가?”

“우리.”

태헌이 고개를 돌렸다.

해원은 바다만 바라봤다.

“나이 먹고 누군가를 다시 좋아하는 거.”

태헌은 잠시 생각했다.

“무섭지.”

해원이 그를 봤다.

“너도?”

“나도 사람이야.”

“안 그런 것 같아서.”

“왜?”

“넌 뭐든 쉽게 하는 것처럼 보여.”

태헌이 웃었다.

“여행도 잘 다니고, 혼자서도 잘 있고, 어디서든 잘 지내니까?”

“응.”

“그거랑 이건 다르지.”

“뭐가?”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여행지는 마음에 안 들면 떠나면 되잖아.”

“사람은?”

“마음에 들어버리면 못 떠나니까.”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헌이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그래서 나도 무서워.”

“뭐가 제일?”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는 거.”

해원의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왜 없어져.”

“넌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응.”

태헌은 담담했다.

“너 힘들면 말 안 하고 혼자 정리하잖아.”

해원은 부정하지 못했다.

“사람도 그래.”

그 말에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내가 사람을 정리한다고?”

“상처받기 전에 먼저 마음 접는 사람 같아.”

해원은 웃으려다가 웃지 못했다.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조금 아팠다.

“그래서.”

태헌이 말했다.

“나도 겁나.”

해원은 처음 알았다.

자신만 무서운 게 아니었다.

늘 여유 있어 보이는 강태헌도 자신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럼 왜 시작했어?”

해원이 물었다.

“뭘?”

“나 좋아하는 거.”

태헌이 웃었다.

“그걸 내가 시작했나?”

“그럼?”

“정신 차려보니까 그렇던데.”

“언제?”

“말했잖아. 제주.”

“그때부터 지금까지?”

태헌이 잠시 생각했다.

“계속 똑같지는 않았어.”

그 대답이 해원은 오히려 좋았다.

“살다 보면 잊고 지낸 적도 있고.”

“응.”

“다른 사람 만나볼까 생각한 적도 있고.”

해원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태헌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뭐가.”

“표정.”

“내 표정이 왜.”

“질투해?”

“미쳤어?”

태헌이 웃었다.

“맞네.”

“아니거든.”

“윤해원.”

“왜.”

“귀엽다.”

“죽을래?”

태헌이 소리 내 웃었다.

해원도 결국 웃었다.

이렇게 또 넘어간다.

조금 아픈 이야기를 하다가도 웃게 된다.

태헌과 있으면 그랬다.

잠시 후 태헌이 조용히 말했다.

“근데 이상하게 안 되더라.”

“뭐가?”

“다른 사람.”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랑 비교해서가 아니라.”

태헌이 말을 골랐다.

“그냥 마음이 안 움직였어.”

“그래서 혼자 있었어?”

“응.”

“외롭지 않았어?”

“외로웠지.”

“그럼 아무나 만나지.”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넌 아무나 만날 수 있어?”

해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없잖아.”

그랬다.

외롭다고 아무나 옆에 둘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지났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혼자 있는 것보다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태헌이 말했다.

“그래서 너한테도 서두르라고 안 할 거야.”

“얼마나 기다리게?”

“몰라.”

“내가 끝까지 대답 안 하면?”

태헌이 웃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또 그렇게 말한다.”

“뭐가?”

“좋아하면서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것처럼 말해?”

태헌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포기하는 게 아니야.”

“그럼?”

“존중하는 거야.”

해원은 입을 다물었다.

태헌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네 마음까지 내 것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 말이 해원의 가슴에 오래 머물렀다.

바람이 조금 세졌다.

해원이 두 팔을 감쌌다.

태헌이 바로 일어났다.

“추워?”

이번에는 해원이 고집부리지 않았다.

“조금.”

태헌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해원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너는?”

“난 괜찮아.”

해원이 웃었다.

“너도 똑같네.”

“뭐가?”

“안 춥고, 안 힘들고.”

태헌도 웃었다.

“그러네.”

해원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태헌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익숙한 향이 났다.

그 순간 해원은 갑자기 울컥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너무 오래 혼자 버틴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옷 한 벌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태헌이 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아니야.”

“눈 왜 그래?”

“바람 불어서.”

태헌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조금 가까이 앉았다.

해원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태헌이 놀란 듯 내려다봤다.

“뭐 해?”

“손.”

“왜?”

“잡으라고.”

태헌의 입가에 천천히 웃음이 번졌다.

“이제 허락 안 받아도 돼?”

“손만.”

“아.”

실망한 척하는 목소리였다.

해원이 웃었다.

“싫으면 말고.”

손을 거두려는 순간 태헌이 잡았다.

“누가 싫대.”

두 손이 포개졌다.

이번에는 태헌이 먼저 잡은 것이 아니었다.

해원이 내민 손이었다.

그 작은 차이가 해원에게는 컸다.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해서 한 걸음 가는 것.

그게 좋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태헌이 물었다.

“내일 몇 시에 갈 거야?”

해원의 가슴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내일.

당연히 돌아가야 했다.

자신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도 있었고.

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런데 돌아간다는 말을 듣는 순간 벌써 아쉬웠다.

“아침 먹고.”

“그래.”

태헌은 붙잡지 않았다.

해원은 괜히 서운했다.

“그래?”

“응.”

“그게 끝이야?”

태헌이 해원을 봤다.

“그럼 뭐라고 해?”

“몰라.”

“가지 말라고 해?”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헌이 웃었다.

“가지 마.”

“됐어.”

“방금 해달라는 거 아니었어?”

“아니거든.”

“그럼 가.”

해원이 손을 빼려 했다.

태헌이 놓지 않았다.

“왜.”

“안 갈 거라며.”

“내일은 가야지.”

태헌이 장난기 없는 얼굴로 해원을 바라봤다.

“오늘 밤 말이야.”

해원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오늘 밤은 가지 마.”

태헌의 목소리가 낮았다.

“어디 가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해원은 그제야 알았다.

그 말은 카라반에 있으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자기 곁에서 도망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한마디 뒤에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태헌의 손이 조금 더 단단하게 해원의 손을 감쌌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입을 맞추지 않았다.

서로를 끌어안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원은 그 어떤 입맞춤보다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뒤 해원이 일어났다.

“이제 진짜 잘게.”

“응.”

몇 걸음 가다가 뒤돌아봤다.

태헌이 그대로 서 있었다.

“강태헌.”

“왜?”

해원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내일 아침에 깨워줘.”

태헌이 웃었다.

“몇 시?”

“일곱 시.”

“알았어.”

해원은 카라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려다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태헌아.”

“응?”

“너도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자.”

태헌은 대답 대신 웃었다.

해원은 문을 닫았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해원은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카라반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똑똑.

“해원아.”

태헌의 목소리였다.

“일어나.”

해원은 이불속에서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참 이상했다.

몇 년을 알고 지낸 남자인데,

처음 듣는 아침 목소리였다.

그런데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겁이 날 정도였다.

해원은 그 순간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매일 아침 듣게 된다면 어떨까.

그리고 바로 그 생각 때문에 가슴이 철렁했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순간보다,

그 사람이 내 일상이 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더 무서운 것인지도 몰랐다.

해원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태헌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잘 잤어?”

해원은 헝클어진 머리로 그를 바라봤다.

“응.”

태헌이 웃었다.

“왜?”

“아니.”

“뭔데?”

“그냥.”

태헌이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해원이 받아 들었다.

“좋아서.”

어제 자신이 왔을 때 그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해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바다는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해원은 아직 몰랐다.

그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태헌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두 사람 사이의 평온한 시간을 완전히 흔들어놓게 될 줄은.

2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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